소설리스트

디 임팩트-501화 (501/575)

[501] 디 임팩트 21권 1화

마리지스호

샤르비티와 함께 반역을 일으킨 사촌들은 기념일을 코앞에 두고 하나둘 베일성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들을 맞이한 건 갑작스러운 헤브론 성주 알레드로의 죽음이었다.

“믿을 수가 없군, 샤르비티가 알레드로를 죽이다니!”

흥분한 음성으로 말하며 보게슨 베일은 말없이 앉아 있는 마리지스 베일을 응시했다.

사촌들은 서로 파벌이 존재했는데, 그중 이들 둘과 죽은 알레드로는 한 파벌로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우리들이 샤르비티를 지지하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병력들을 은밀히 이동시켜 반역을 꿈꿀 수 있었단 말인가!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뤼호른 가문과 접경 지역에 있던 샤르비티의 군사들은 이들 사촌들에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을 통해 소문을 통제하며 신속히 이동할 수 있었다.

열세 명의 사촌들 중 누구 하나라도 반역에 동의치 않았다면 샤르비티군은 이동 중 발각되어 대공과 불리한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가 헤브론의 금광에서 금을 빼돌린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말없이 앉아 은색 술잔의 겉 표면을 노려보던 마리지스가 차분히 답했다.

그러자 보게슨은 반백의 수염을 흔들며 손바닥으로 탁자를 여러 번 내리쳤다.

“그깟 금 좀 손대면 어떻단 말인가? 우리에게 그 정도 아량도 베풀지 못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왜 그를 지지해야 하나!”

“맞습니다. 그는 우리의 지지를 필요로 했었습니다.”

“필요로 했었다? 그럼 지금은 필요치 않단 말인가?”

“필요했다면 우리의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알레드로를 저리 쉽게 죽이진 못했을 겁니다.”

“빌어먹을 자식! 내가 제 놈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했는데, 감히!”

다혈질인 보게슨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싸움에 능한 사람이다. 병사들을 배후에서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가 아니라 맨 앞에서 피를 뒤집어쓰며 싸우는 돌격형 지휘관이다.

그는 십수 년 전만 하더라도 전투부대를 이끌고 베일 가문의 여러 전투에 참전해 공을 많이 세우기도 했다.

그런 그가 불같이 화를 내자 방 안의 집기들이 그의 마음처럼 요동쳤다.

“당장 가서 따져 물어야겠어!”

“그러지 마십시오.”

마리지스는 고개를 저으며 흥분한 보게슨을 만류했다.

“한번 움직인 칼은 또다시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샤르비티에게 명분을 주지 마십시오.”

“붉은 성의 대공과 총력전을 앞두고 있네. 설마 우리들에게까지 그 칼을 휘두를까?”

“샤르비티는 호탕하면서도 음모를 잘 꾸미는 양면적인 면이 있는 자입니다. 쉽게 보고 들어갔다간 알레드로처럼 불명예스러운 죄목을 달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마리지스는 2층 선실의 창문을 열었다.

갑판에 도열한 수백의 병사와 선원 들이 보였고, 거대한 돛대엔 강바람에 베일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울부짖는 사자 깃발이 휘날렸다.

이 거대한 함선은 남부 베일의 항구도시를 통치하는 마리지스 베일의 이름을 딴 마리지스호로, 수년에 걸쳐 건조된 튼튼한 배였다.

바다의 태풍에도 견딜 수 있는 이 배를 유독 사랑한 마리지스는 평상시에도 이 배에서 자주 생활하고 있었고, 베일성에 도착한 지금도 육지가 아닌 이 배를 자신의 거처로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마치 태풍이 불기 전날처럼 말입니다.”

* * *

수문을 통해 도시를 빠져나온 작은 배 위의 에드는 노를 저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간이 갈수록 회색 구름이 모여들며 점차 검은 하늘에 가까워져 갔다.

겹겹이 쌓이는 짙은 먹구름은 곧 무시무시한 위세로 비를 쏟아 낼 것만 같았다.

“신경이 쓰이냐?”

도현의 물음에 에드는 미소를 지었다.

“조금요. 배를 띄우기 전엔 하늘이 맑았는데 그사이에 이렇게 구름이 끼네요. 아무래도 도시로 돌아갈 땐 비를 맞겠는데요?”

“비를 맞아야 한다면 맞아야겠지. 그나저나 구름이 참 빨리 움직이는구나.”

후드로 전체적인 얼굴 모습을 가린 도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뒤로 몸을 뉘였다.

눈을 감고 잠이라도 자듯 누워 있는 스승을 잠시 바라보던 에드는 묵묵히 노를 저었다.

삐그덕. 삐그덕.

노 젓는 소리는 에드의 차분하고 안정된 호흡처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일정하게 강 위에 퍼져 갔다.

가만히 노 젓는 소리를 귀담아 듣던 도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노 젓는 움직임 속에서 제자의 발전하고 있는 검술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이다.

‘검의 끝은 어디일까?’

제자의 발전을 기뻐하던 도현은 묵직한 자신의 고민 속에 빠져 들어갔다.

그가 경험해 본 가장 강한 검은 누가 뭐래도 용의 검이었다. 그러나 그의 검은 폭발적인 파괴력이 깃들었을지언정 검술의 현묘함에서는 태선군이 사용했던 천검술만은 못했다.

‘태선군이 마지막에 사용한 그 검은 그가 깨쳐 만든 검법은 아닐 거야. 만약 그랬다면 그날 나는 그의 손에 죽었을 테니까.’

도현은 무인이자 검도인이었다.

끝없이 자신과 싸우며 검의 끝을 보고 싶은 열망과 욕망.

그것은 도현에게 있어 숨길 수 없는 본능과 같았다.

사실, 태선군에게 훔쳐 배우다시피한 천검술에 호검술을 섞어 검은 용의 검을 막아 내지 못했다면 도현은 이 자리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원말 명초에 활약했다는 절세 고수 담기량의 검은 얼마나 대단했을까? 검선이라 불리던 검선문 문주 이연백의 검은 또 어떻고…….’

태선군이 사용한 천검술이 오원신공을 창안한 검선문의 제 7대 문주 이연백의 검술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도현은 막연히 과거에 활약한 그들을 동경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었다.

“스승님, 저 배입니다.”

제자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 도현은 두 눈을 뜨고 일어났다.

커다란 덩치 때문에 도시에 진입하지 못한 많은 배들이 강 위에 닻을 내리고 떠 있었는데, 그중 한 배를 에드가 가리키고 있었다.

해적질한 물품을 내다 파는 상선으로, 짐브리오와 계약을 맺고 그들을 돕기로 한 배다.

“배에 오르시겠습니까?”

도현은 가까워지는 상선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다. 옆으로 지나쳐서 이 부근을 한 바퀴 돌아보자.”

“알겠습니다, 스승님.”

일을 벌이고 탈출할 경로를 실제로 두 눈으로 확인해 보던 도현은 상선들 속에서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거대한 배와 마주쳤다.

사자 깃발이 휘날리는 거함, 마리지스호였다.

그곳에서 작은 배가 여러 척 내려왔고, 사람들이 옮겨 타고 있었다.

지나치던 도현은 그들 중에 눈에 익은 두 명의 인물을 알아봤다.

‘저들은…….’

보게슨 베일과 마리지스 베일이었다.

“옆으로 비켜라!”

마리지스가 타고 있는 작은 배 안의 병사들이 기세등등한 얼굴로 외쳤다.

그들이 가는 방향에 도현이 탄 배가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강바람에 출렁이는 배 위에서 멀뚱히 저들을 쳐다보던 에드는 도현에게 물었다.

“스승님, 욕을 하면서 비키라는데요?”

“그럼 비켜 줘야지.”

도현과 에드가 탄 배가 옆으로 노를 저어 가자 잠시 후, 여러 척의 배들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마리지스나 보게슨은 그들끼리 대화를 주고받느라 옆에서 쳐다보고 있는 작은 배 위의 도현은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도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멀어지는 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산처럼 높은 배의 선두가 보였다.

‘저들의 배인가 보군.’

마리지스호를 눈여겨보던 도현은 놓았던 노를 잡았다.

하늘에서 빗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돌아가자.”

“네, 스승님.”

소나기처럼 내려붓는 빗줄기를 맞으며 노를 젓던 에드가 문득 물었다.

“스승님, 아까 그 배에 탔던 사람들 말입니다. 혹시 샤르비티의 사촌들 아니었습니까?”

“맞다, 마리지스와 보게슨이지.”

도현은 붉은 성을 떠나올 때 챙겨 온 그들의 초상화를 떠올리며 대꾸했다.

“지금 죽이면 기념식장에서 우리의 부담이 적어지지 않을 까요?”

“그렇긴 하겠지만 남은 자들은 소식을 듣고 그만큼의 방비를 더 하겠지. 아직 이 도시에 도착하지 않은 샤르비티의 사촌들도 있을 테고.”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에드는 노를 젓는 손에 힘을 주었다. 하늘을 가려 주는 천막이나 선실이 없는 좁고 작은 배 안에 빗물이 빠르게 고이고 있었다.

그러나 도현이 손을 한 번 휘젓자, 배 안에 고인 빗물은 한 줄기로 뭉쳐 배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스승님, 스승님은 강을 땅처럼 밟고 돌아다니실 수 있다고 짐브리오 아저씨에게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신법이 경지에 오르면 가능하다. 한번 해 볼 테냐?”

도현이 장난스럽게 말을 했지만 에드는 노를 놓고 벌떡 일어나 강물에 뛰어들었다.

제비처럼 수면 위를 달리는가 싶더니 몇 걸음 되지 않아 물속에 풍덩 빠진 그는 헤엄을 쳐 다시 배로 돌아왔다.

“아직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다시 노를 잡는 제자의 명랑한 모습에 도현은 피식 웃다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마음은 모든 걸 지배한다. 넌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강에 빠진 거야. 지금의 네 신법 경지라면 강에 빠지지 않고 조금은 달릴 수 있었어야 해.”

“다시 해 보겠습니다.”

비장한 표정으로 일어서던 에드는 그러나 곧 다시 자리에 앉았다.

도시의 서쪽 수문에 가까워진 것이다.

수문을 통과해 도시 내부로 진입한 그들은 머리 위를 가로 지르는 몇 개의 다리를 지나쳐 작은 배를 묶어 둘 수 있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선착장은 비를 피하기 위한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으로 매우 붐볐다.

선착장에는 앞서간 마리지스와 보게슨이 탄 배도 보였지만 그들은 배를 지키는 병사 몇만 남겨 둔 채 어디론가 사라진 듯했다.

배에서 내려 주변을 가볍게 훑어본 도현은 에드에게 조용히 말했다.

“난 그만 로니올에게 돌아가 봐야겠다.”

“예, 스승님.”

“기념일이 시작되면 도시의 분위기가 달라질 거야. 행동 조심하고.”

이틀 뒤면 기념일이 시작된다.

“걱정 마세요.”

에드는 허리에 손을 얹고 활짝 웃었다. 거뭇거뭇하게 올라온 턱수염이 그의 얼굴을 장식하고 있었다.

“어째 갈수록 짐브리오와 비슷해지는 것 같구나.”

“서, 설마요.”

“녀석.”

담담히 웃던 도현은 에드의 어깨를 토닥인 후 언덕 위로 올라갔다.

도시가 비에 젖고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채 비를 맞고 걸어가던 그는 얼마 후 로니올의 집에 당도했다.

방 안에 들어서던 그는 옆을 돌아봤다.

상인 포만드가 로니올의 호위대로 보낸 용병 중 한 명이 복도 모서리에서 그를 훔쳐보고 있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그의 침대에 독이 묻은 못을 뿌려 놓은 저들에게 그는 어제 경고를 했다. 하지만 경고가 약한 모양이었다.

젖은 옷을 갈아입은 도현은 복도로 나와 로니올을 만나러 갔다가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오, 어서 오게 로이, 약속대로 제시간에 돌아왔군.”

로니올은 도현을 반기다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마리지스에게 도현을 소개했다.

“숙부님, 이 사람은 제 호위 무사 로이입니다. 제가 거둔 사람인데 아주 검 솜씨가 뛰어납니다, 하하하!”

자랑하듯 도현을 소개한 로니올은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매부리코 중년인으로 변장한 도현을 깊은 시선으로 훑어보던 마리지스 베일은 곧 관심을 끊었다.

로니올의 호위 무사가 누군지 그가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고, 그가 온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이렇게 가벼운 녀석이 샤르비티의 장자라니. 샤르비티도 자식만큼은 제 마음대로 못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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