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502화 (502/575)

[502] 디 임팩트 21권 2화

그가 로니올을 만나러 온 이유는 성안의 분위기를 떠보기 위함이었다.

못난 자이긴 하지만 내성 안의 샤르비티가 어떤 마음인지 미루어 짐작할 만한 것을 알려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만 내보내십시오. 우린 지금 대화 중이었잖습니까.”

무게 있는 그의 말에 로니올은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다가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싫습니다. 여긴 내 집이고, 내가 호위 무사를 가까이하는데 꺼릴 게 뭐 있겠습니까?”

“내가 누구인지 잊은 겁니까? 난 당신의 숙부입니다. 그리고 차후 대공이 될 사람을 지지할 수도 있지요.”

“찾아온 용건이나 말씀하십시오. 밤을 지새웠더니 아주 피곤해 죽겠습니다.”

도현이 없는 사이 악마가 출현할까 봐 뜬눈으로 밤을 보낸 그는 하품을 길게 하며 숙부를 쳐다봤다.

마리지스는 비록 작지만 남부 베일의 항구도시를 다스리는 자였다.

모욕감이 일순 그의 몸을 뒤덮었다.

차가워지는 마리지스의 표정을 한쪽에서 지켜보던 도현은 상체를 가볍게 숙이며 로니올에게 말했다.

“전 잠시 물러나 있겠습니다. 말씀 나누십시오.”

“그럴 필요 없는데…….”

로니올은 말을 얼버무리다가 이내 승낙을 했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 도현은 회랑에 설치된 흔들의자에 앉아 정원을 바라봤다.

강에서 봤던 마리지스가 찬밥 신세인 로니올을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지만 방 안에 계속 있을 순 없었다.

“소나기인 줄 알았는데, 비가 계속 올 것 같지 않습니까?”

눈치를 보며 다가온 용병대장이 말을 붙여 왔다.

“그런 것 같소.”

“험, 거 어제 있었던 일은 말이오, 내가 말했지만 순 오해요. 그 시녀가 잘못 본 것이고, 내 휘하의 용병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소. 혹여나 마음에 두고 우릴 오해할까 봐 다시 말하는 거지만 말이오.”

도현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비가 내리는 정원으로 향해 있었다.

“비가 많이 오는군.”

도현이 회랑에서 사라지자 용병대장의 인상이 구겨졌다.

“빌어먹을 자식. 두고 봐라 꼭 죽여 버릴 테니까!”

* * *

비가 내리는 길가에 마차 한 대가 섰다. 안에는 노예 출신 상인 포만드가 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뒷골목 술집과 도박장의 수입 장부를 들여다보다가 머리가 아픈지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이놈들이 또 수작을 부리는군.”

그는 뒷골목을 벗어나 상인으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술집과 도박장은 그의 부하가 운영하는 중이다.

한데, 중간에 돈을 가로채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모른 척하고 있으니 그 금액이 점점 커지고 있다.

“손을 한번 봐야겠어.”

장부를 마차에 고정된 청동 상자 안에 던지듯 집어넣은 그는 팔짱을 끼고 밖을 내다봤다.

유리로 된 마차의 창문은 쏟아지는 비 때문에 흐릿해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마차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생각에 슬며시 창문에 얼굴을 가져다 대던 그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차 밖에 서 있는 사람과 두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의 눈은 인간의 눈이 아닌 것처럼 붉디붉었다.

탄력 있는 근육질의 몸매를 가진 포만드는 덩칫값을 못하고 급하게 헛바람을 삼켰다.

이때 마차 문이 열리며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이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왜 놀라십니까?”

소년의 물음에 포만드는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놀라긴.”

소년은 대상단의 주인 알믄의 집에서 일을 하는 노예로, 그의 귀가 되어 주고 있는 아이였다.

“눈은 왜 그 모양이냐?”

“음식을 잘못 먹어서인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이 부으며 이렇게 되었습니다. 보기 많이 흉합니까?”

“별로.”

“저거 먹어도 됩니까?”

노예 소년은 마차 안에 있는 탐스러운 여러 종류의 과일을 보며 물었다.

“물론이지. 마음껏 먹어라.”

“감사합니다.”

소년은 허겁지겁 바구니 안에 담긴 과일들을 입에 넣었다.

알믄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소년은 신선한 과일을 먹을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소년이 그 많은 양의 과일을 다 비울 동안 아무 소리 없이 지켜보던 포만드는 소년이 빈 바구니에서 떨어질 즈음에서야 넌지시 물었다.

“그래, 오늘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왔느냐?”

“며칠 전에 알믄과 도시 수비대장이 얘기하는 걸 엿들었습니다.”

“오, 그래? 그들이 무슨 말을 나눴느냐.”

“곧 있을 기념일에 누굴 죽인다고 했습니다.”

소년의 말에 포만드는 눈을 빛내며 소년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누굴 말이냐?”

“…….”

“왜 말이 없어?”

“돈을…….”

포만드는 장부를 넣어 둔 청동 상자 안에서 금화 주머니를 꺼내 소년의 손에 쥐여 줬다.

주머니를 열어 금화 개수를 세어 본 소년은 품 안에 주머니를 넣으며 자신이 들은 얘기를 모두 털어놨고, 포만드의 얼굴은 굳어졌다.

“잘못 들은 게 아니겠지?”

“틀림없습니다.”

“흠.”

포만드는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수고했다.”

“그럼 전 그만 가 보겠습니다. 저도 나중에 포만드 님처럼 노예 신분을 벗고 훌륭한 상인이 될 겁니다.”

다부진 소년의 말투에 포만드는 빙그레 웃으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특하구나. 하지만 그럴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그동안 수고했다. 이제 다른 녀석을 너 대신 사용해야겠어.”

포만드의 단단한 손이 소년의 목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소년은 몸부림치며 포만드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검투사 노예 출신인 포만드의 노련하고도 억센 손아귀를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빗속에 들썩이던 마차는 이내 잠잠해졌다.

냉정한 눈빛으로 축 늘어진 소년의 품에서 금화 주머니를 회수한 포만드는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이 정보를 어디에 사용하는 게 좋을까…… 흐흐흐.’

* * *

어두운 밤, 가늘어진 빗줄기를 뚫고 작은 배 한 척이 거함 마리지스호로 접근했다.

강바람에 강물이 넘실거리며 작은 배의 옆면을 후려치자 배는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다시 균형을 잡았다.

“배는 탈 게 못 돼.”

보게슨 베일은 마리지스호로 접근하는 작은 배 위에서 투덜거렸다.

수중전이라도 벌어지면 그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물고기 밥이 될 처지였다.

작은 배는 마리지스호 옆면에 바짝 붙었고, 잠시 후 마리지스호 갑판에 설치된 두 개의 거대한 도르래에서 줄이 내려와 작은 배를 통째로 위로 끌어 올렸다.

2층 선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리지스는 창문을 닫고 곧 들어올 보게슨을 기다렸다.

기품 있지만 비에 젖어 흐느적거리는 모자를 벗으며 선실에 들어선 보게슨은 마리지스의 호위 무사들이 내미는 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닦았다.

“모두 나가거라.”

호위 무사들을 밖으로 내보낸 마리지스는 따뜻한 차를 보게슨에게 직접 대접했다.

밖에서는 남부 베일의 항구도시를 통치하는 영주의 신분이었지만 둘만이 있을 땐 허물없이 가깝게 지내는 형제나 다름없었다.

보게슨 역시 작지만 자신만의 영지가 있었다. 물론, 대공 알조베티 베일의 영향력 아래였지만.

“알레드로가 죽었다는 그 집에 가 보았는데,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더군. 강한 호위대를 그렇게 자랑하더니 우습게 죽었어. 그래, 로니올은 만나 봤나?”

“네.”

입속에 퍼지는 차향을 음미하던 마리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상한 점은 없더군요.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자기 기분에 들떠 살고 있었습니다. 알레드로가 죽은 것을 은근히 거론하며 내게도 조심하라고 하는데…… 마치 자신이 그를 죽인 것처럼 눈에 힘을 주더군요. 어찌나 가소롭던지.”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샤르비티가 우리에게 등을 돌린 것 같지는 않군. 만약 그랬다면 가벼운 그 녀석이 은연중에 말실수를 했을 테니 말일세.”

보게슨이 무성한 턱수염을 훑어 내리며 말했다.

“그래서 약간은 안심이 되었습니다만, 한편으론 샤르비티가 우리와 관련된 일을 로니올에게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어서 여전히 방심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성안에 관리들을 여럿 만나고 오는 길일세. 성 밖에 주둔 중인 샤르비티군의 지휘관 중 한 명도 만나 보고. 그들은 모두 평상시처럼 나를 대하더군. 뭘 숨긴다거나 하는 눈치는 없어 보였어.”

“대공 알조베티가 그렇게 방심하다가 큰코다치지 않았습니까, 샤르비티에게.”

나직한 그의 말에 보게슨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네 말을 들을수록 영 찜찜하군.”

“백 번을 경계해도 지금은 과한 게 아닙니다. 알레드로의 죽음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맺은 맹약! 열세 명의 사촌들을 존중하고 부와 권력을 나눠 주겠다. 하지만 그는 알레드로를 죽임으로써 그 맹약을 깨트렸습니다. 그는 언제든 우리에게 칼을 휘두를 수 있게 된 겁니다.”

“날 죽이려 한다면 내가 먼저 그놈을 찾아가 죽여 버릴 거야! 빌어먹을 자식, 참고 있으려니!”

보게슨의 턱수염이 빳빳해졌고, 두 눈에선 광채가 번쩍였다.

열세 명의 사촌들 중 무력으로는 그가 으뜸이었고, 샤르비티도 보게슨에게만큼은 말을 조심할 정도였다.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내 말은 방심하지 말고 샤르비티를 경계하자는 뜻이었으니까.”

“젠장, 술이나 마시세! 분이 풀리지 않는군. 알레드로 그 녀석은 매년 내게 헤브론 금광에서 생산되는 황금을 아름다운 미녀상으로 만들어 선물로 보내 줬는데, 이제 누가 그런 소름끼치는 선물을 해 주겠는가!”

가난한 영지의 주인인 보게슨은 한탄을 하며 마른 웃음을 지었다.

“필요하다면 제가 매년 그 선물을 대신 해 드리죠.”

“자네가?”

“그렇습니다. 이 전쟁이 끝나고 우리가 생존해 있는다면요.”

“그것도 그렇군. 난 죽지 않아. 내 영지가 베일 가문의 어느 영지보다 부유해지기 전까지는.”

“그래야지요.”

호위 무사를 시켜 선실에 술과 음식을 차리게 한 마리지스는 죽은 알레드로를 기리며 보게슨과 막 술잔을 나누려 했다.

“영주님, 포만드라는 상인이 찾아와 만나 뵙기를 청합니다.”

“포만드?”

마시려던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마리지스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리고 오라.”

“예!”

“포만드가 누군가?”

보게슨이 술을 마시며 물었다.

“몇 년 전, 제 도시로 찾아와 낡은 배 두 척을 사 간 자가 있었습니다. 그자 이름이 포만드입니다.”

얼마 후, 상인 포만드가 조심스럽게 선실에 들어왔다.

열세 명의 사촌들 이름과 얼굴을 모두 다 기억하고 있던 그는 선실에 마리지스뿐만 아니라 보게슨까지 앉아 있자 흠칫하다가 서둘러 예를 표했다.

“상인 포만드, 인사드리옵니다.”

정중히 인사를 올린 그는 숙이고 있던 상체를 슬며시 들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무겁군. 말조심해야겠어.’

선실의 분위기가 무덤처럼 어둡고 무거워 까딱했다간 삐딱하게 앉아 있는 영주 보게슨에게 칼을 맞고 죽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전에 배를 사 간 그 상인이 맞지?”

“그렇습니다, 영주님. 기억해 주시는군요.”

“노예 출신 상인을 잊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듣기에 따라 기분이 나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상인 포만드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영주님이 싸게 주신 배를 이용해 남부 대륙에 다녀와 적지 않은 이익을 남겼습니다. 도중 폭풍우를 만나 죽을 위기를 넘기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그랬다니 다행이로군. 그래, 무슨 일로 날 찾아왔지?”

위엄 있는 마리지스의 눈빛에 포만드는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정보를 팔기 위해 왔습니다.”

“무엇을 판다고?”

“정보입니다, 영주님의 생명과 관련된.”

마리지스는 그의 대답에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재미있군, 내 생명과 관련된 정보라니. 말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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