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 디 임팩트 21권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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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경기장 한쪽엔 깊은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가 존재했다.
그 입구는 마차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고 높이도 상당해서 마치 지하 도시의 입구처럼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베일 가문이 수백 년 전 성을 증축하고 도시의 규모를 키우면서 건설된 이 경기장은 한때 검투사들의 시합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그들이 대기하며 시합을 준비하던 장소가 바로 이 경기장 지하 공간이었다.
그러나 경기장 지하엔 검투사들의 공간뿐만 아니라 감옥도 존재했는데, 백여 년 전 지하에 물이 차올라 죄수들은 물론 간수까지 떼죽음을 당한 뒤로, 감옥은 더 이상 운영되지 않고 폐쇄되었다.
경기장에 인접한 건물에서 스산한 찬 바람이 부는 경기장 지하 입구를 감시하던 검은 복장의 사내는 몇 달째 같은 장소를 감시하는 게 지겨웠는지 작게 하품을 했다.
주변엔 그와 같은 감시인들의 시선이 서로 교차하며 거미줄 같은 감시망을 이루고 있어서, 감시인들을 동시에 죽이지 않는 한 들키지 않고 저 안으로 침입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품을 하던 사내는 한 조를 이루고 있는 동료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돌아가면서 잠 좀 잘까?”
“정신 나갔어?”
5층 높이의 지붕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경기장으로 향하는 길을 감시하던 사내는 제안을 한 사내를 날카롭게 쏘아봤다.
“방심할 때 쥐새끼들이 들어오는 법이라고.”
“병신, 누가 알고 이곳을 와? 지난 몇 달간 수상한 낌새도 없었잖아. 붉은 성의 대공은 자식을 버렸다니까.”
“너야말로 멍청해. 제일 위험할 때가 너처럼 긴장을 푸는 순간이라고. 어느 부모도 자식을 포기하는 법은 없어.”
지붕에 엎드려 길을 감시하던 코가 긴 사내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하아, 어쩌다 너 같은 자식하고 한 조를 이뤘는지 정말 답답하군.”
“졸다 대장님께 걸리면 너나 나나 다 죽는 거야. 교대조 올 때까지 긴장 풀지 말고 감시나 똑바로 해. 일반 병사도 아니고, 우린 친위대잖아. 이름값을 해.”
“이름값이라……. 해야지, 유베린 님이 우릴 이만큼 강하게 훈련시켜 줬으니까.”
그들에게 유베린은 하늘 같은 존재였다.
하품을 했던 사내가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물었다.
“한데, 넌 어느 쪽이야? 대장님이야, 아니면 샤르비티 님이야?”
“무슨 소리야 그게?”
“자식, 모르는 척하기는. 우리가 비록 샤르비티 님의 친위대지만 우리를 여기까지 성장시켜 준 건 대장님이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너와 난 지금보다 훨씬 약한 존재였잖아.”
사내의 목소리가 은밀해졌다.
“샤르비티 님의 휘하에 있는 무장들이 유베린 님을 질시하는 게 난 눈에 보인다고. 이번 전쟁이 끝나면 분명 유베린 님을 모함해서 끌어내리려는 수작을 부릴 게 틀림없어. 그럴 때 우리가 누구 편에 서야 하냐는 거지.”
“음…….”
“친위대 분위기는 너도 잘 알 거야. 우리를 움직이는 건, 샤르비티 님이 아니라 대장님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는 동료의 말에 코가 긴 사내는 침묵으로 동조를 했다.
“아무튼 우리 친위대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대장님을 배신해선 안 된다고. 또 모르잖아, 우리 대장님이 대공이 될지.”
“이 미친 자식!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해! 우리 대장님은 결코 샤르비티 님을 먼저 저버릴 분이 아니시다!”
“아, 알았으니까, 좀 조용히 해.”
사내는 귀를 막는 시늉을 하다가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에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이놈, 제법이구나.”
묵직한 음성으로 사내를 칭찬한 보게슨은 손에 잡힌 사내의 검을 두 동강 낸 후, 남은 한 손으로 사내의 목을 쳤다.
머리와 목 사이가 통째로 잘려 나간 친위대원은 비명도 못 지르고 누운 상태로 숨이 끊어졌다.
그 옆에 한 조를 이루고 있던 코가 긴 사내가 도울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다.
“어딜.”
보게슨은 코가 긴 사내가 적의 침입을 알리는 호각을 불려고 하자 붉은색 강철 장갑을 앞으로 내밀었다.
중지를 가리고 있던 뾰족한 강철 장갑의 손가락 부분이 튀어나와 사내의 얼굴에 박혔다.
호각을 든 친위대원의 몸이 작살에 맞은 물고기처럼 한차례 퍼덕였고, 보게슨은 무표정한 얼굴로 강철 손가락을 회수했다.
가느다란 줄과 연결된 강철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숨이 끊어진 친위대원은 지붕을 굴러 아래로 추락을 했다.
쿠웅.
높은 건물에서 시체가 되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주변 곳곳에서 거의 비슷하게 들려왔다.
보게슨과 마리지스의 부하들이 손을 쓴 것이다.
“시체를 숨겨라.”
길 위에 떨어진 시체들을 한곳에 모아 감춰 둔 보게슨과 마리지스의 부하들이 경기장 지하 입구로 집결했다.
그들의 수는 대략 서른 명.
두 사람 휘하의 부하들 중 최고의 실력자들만 선별해서 데리고 왔다.
이들 개개인은 샤르비티의 친위대원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비열하게 싸워도 된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지하 감옥에 있는 녀석들을 제거한 후, 대공의 자녀들을 구해 낸다.”
보게슨은 마리지스의 부하들까지 일일이 눈을 맞혀 준 후, 뒤돌아섰다.
감시자들이 사라진 경기장 지하 입구가 눈에 크게 들어왔다.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됐습니다.”
친위대원의 피가 묻은 검을 들고 서 있던 마리지스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당연한 말. 이 모든 건 의리 없는 샤르비티, 그놈이 초래한 일. 대가를 치르게 해 줘야지.”
보게슨은 붉게 빛나는 강철 장갑을 오므렸다 펴며 마리지스를 스쳐 앞으로 나섰다.
“어떤 놈이든 내 앞을 가로막으면 이 장갑으로 살과 뼈를 뜯어서 내 분노를 잠재우겠어!”
그들은 신속히 움직여 지옥의 입구처럼 입을 벌리고 서 있는 지하에 진입했다.
서른 명이 넘는 많은 인원들이 달리고 있었지만, 바닥의 먼지만 너풀거릴 뿐 소음은 거의 나지 않았다.
보게슨과 마리지스 그리고 그의 부하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거의 기적과 같은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함정입니다.”
마리지스의 심복 마법사가 주름진 눈빛으로 지팡이를 휘젓자, 허리 높이로 지그재그로 설치된 가느다란 줄이 형광색으로 밝게 빛이 나며 위치를 드러냈다.
어두운 지하에 설치된 함정은 10여 미터는 넘어 보였다.
“일어나라, 땅이여!”
노마법사의 주문에 땅이 반응하더니 구름다리 형태의 돌다리가 생성됐다.
“바로 사라질 겁니다. 서두르십시오.”
노마법사의 조언에 마리지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폭이 한 뼘도 안 되는 돌다리 위를 먼저 건너갔고, 그 뒤를 이어 보게슨과 부하들이 연이어 건넜다.
마지막 사람이 함정 지대를 통과했을 때쯤, 돌다리는 모래처럼 부서지며 원래의 땅속으로 사라져 갔다.
얼마간 더 들어가자 한때 검투사들이 대기하던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
격자 형태의 많은 방엔 해골도 보였고, 버려진 녹슨 무기들도 상당히 많이 쌓여 있었다.
그곳을 통과해 아래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자 작은 광장 같은 널찍한 공간이 보였다.
거쳐 온 곳과 달리 화로의 불빛이 환하게 밝히고 있는 광장엔 백여 명 가까운 친위대원들이 철벽 같은 위용으로 길게 늘어선 채 철문 하나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웬 놈들이냐!”
친위대원들을 이끄는 털북숭이 지휘관이 벼락같은 호통을 쳤다. 광장에 윙윙거리는 메아리가 칠 정도로 그의 목소리와 기백은 실로 대단했다.
“비켜라, 나부탄!”
보게슨은 앞장서서 달려오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의 붉은 강철 장갑이 용암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누가 제작했는지 알 수도 없는 고대의 붉은 강철 장갑은 보게슨을 전장의 미치광이로 만든 기물이자 마물이었다.
“당신은 보게슨!”
보게슨을 뒤늦게 알아본 나부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뭐 하는 짓이요! 이곳은 유베린 님의 영역이오!”
“대공의 자식들을 내놓아라!”
“무슨 소리요! 이곳엔 그들이 없소!”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확인하겠다!”
반백의 수염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보게슨은 한 마리 성난 붉은 곰과 같았다.
“흥! 죽고 싶어 환장했군!”
눈빛이 차가워진 나부탄이 손짓을 하자 로브를 입은 친위대 소속 노마법사가 거만하게 등장해 지팡이로 땅을 내려쳤다.
그 순간 좌우에 설치된 거대한 화로에서 녹색 연기가 피어올라 순식간에 보게슨의 앞을 가로막았다.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던 녹색 연기는 돌바닥 광장에 흙을 만들고 그곳에 뿌리를 내린 나무를 만들더니 급기야 원시림을 형성해 보게슨을 휘감아 버렸다.
“마법 숲은 환상의 공간. 생명의 기운을 모두 빼앗기고 뼈만 남을 것이다, 흐흐흐.”
긴 손톱을 혀로 핥으며 사악한 미소를 짓던 노마법사의 미간에 돌연 무엇인가가 날아와 박혔다.
퍼억!
마법 숲에서 튀어나온 그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투명한 실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바로 보게슨의 강철 손가락이었다.
“내 손가락은 목표를 놓치지 않는다.”
마법 숲을 돌파하느라 피투성이가 된 보게슨은 실을 당겨 강철 손가락을 회수했다.
“허억!”
미간에서 피를 분수처럼 뿜어낸 노마법사는 원통한 눈빛으로 허우적대다 곁에 서 있는 지휘관 나부탄의 팔을 붙잡았다.
“지……휘관.”
“형편없는 늙은이.”
냉정한 눈빛으로 죽어 가는 마법사를 노려보던 나부탄은 그의 팔을 붙잡은 채 놓지 않는 마법사의 팔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털썩.
노마법사가 시체가 되자 화로에서 나오던 녹색 연기는 끊어졌고, 마법의 숲도 사라졌다.
나부탄은 허리에 걸어 놓은 뿔투구를 머리에 착용하며 백여 명의 친위대원들에게 명했다.
“적은 서른 명 남짓. 이 싸움은 우리의 것이다. 저들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예!”
나부탄은 바닥에 꽂아 둔 길쭉한 창을 뽑아 들고 질주해 오는 보게슨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어디 한번 해 봅시다, 영주 보게슨. 전장의 미치광이라는 그대가 얼마나 강한지 내가 확인해 보겠소.”
“얼마든지 보여 주마.”
보게슨은 빗살처럼 빠르게 날아오는 창을 피하지 않고 주먹을 마주 날렸다.
콰콰콰쾅쾅!
눈 깜짝할 사이에 여러 번 공방전을 벌인 그들은 서로 숨을 한 번씩 몰아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맞붙었다.
광장의 돌이 뜯겨 나가고, 주위 공기는 뜨겁다 못해 숨을 쉬기 곤란할 정도였다.
그것은 모두 용암의 열기를 내뿜는 보게슨의 장갑과 물러남을 모르는 나부탄의 창이 충돌하며 만든 결과였다.
‘이놈 실력이 의외로군. 창도 방해가 되고.’
웬만한 무기는 그의 강철 장갑을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세타이움이 첨가된 무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수준 높은 창 실력에 풍부한 실전을 겸비한 나부탄은 무기까지 좋아서, 보게슨이라 해도 단번에 그를 제압하기는 어려웠다.
창이라는 병기의 이점을 십분 발휘해 보게슨을 상대하던 나부탄은 주변을 곁눈질했다.
친위대원들이 인원수로는 저들을 압도했지만 예상과 달리 싸움은 팽팽했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점점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무력이 약하다고 소문난 마리지스 베일이 실제로는 보게슨 못지않은 강자였기 때문이다.
‘속이 시커먼 놈이었군. 세상을 속이고 있었다니.’
간결하면서도 절도 있는 마리지스의 검은 고도의 훈련을 쌓아 온 친위대원들의 아까운 목숨을 계속해서 죽여 나가고 있었다.
분노한 나부탄은 보게슨을 향해 맹렬하게 창을 찔렀다.
“보게슨, 죽여 버리겠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창 공격을 모두 와해시켜 버린 보게슨은 눈을 번뜩이며 유성처럼 빠른 일격을 날렸다.
가슴을 강타당한 나부탄이 허공 높게 떠올랐다가 땅에 처박혔다.
“매서운 맛이로군.”
나부탄은 부서진 갑옷을 벗어 던졌다.
그의 가슴엔 손바닥만 한 화상 자국이 생겨났다. 붉은 강철 장갑의 열기가 갑옷을 뚫고 들어와 그의 가슴에 흔적을 남긴 것이다.
화끈거리는 고통을 참으며 나부탄은 몸을 던졌다.
“어딜 들어가려고 하느냐!”
지하 감옥으로 통하는 철문을 열려던 보게슨은 나부탄의 위맹한 공격을 감히 무시하지 못하고 그와 다시 엉켜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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