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 디 임팩트 21권 7화
“오냐! 나부탄 네놈을 갈기갈기 찢은 후에 들어가마!”
시간을 길게 끌어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에 나부탄을 상대하는 보게슨이나 많은 수의 친위대원들을 상대하는 마리지스나 마음이 급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일까, 나부탄은 미친 듯이 웃으며 철문 앞에서 창을 휘둘렀다.
“내가 죽기 전까지는 한 놈도 못 들어간다!”
치열한 싸움이 다시 전개됐고, 철문 앞 광장은 피와 시신으로 뒤범벅이 되어 갔다.
그리고 얼마 후, 싸움의 향배가 결정됐다.
“음!”
묵직한 신음을 흘린 나부탄은 내장이 흘러나오는 아랫배를 한 손으로 막으며 철문에 등을 기댔다.
“끝을 내 주마.”
나부탄 때문에 발이 묶여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 보게슨은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철문에 기댄 나부탄을 향해 다가갔다.
“역시 한번 배신한 자식이라 그런지, 잘도 갈아타는군.”
“뭐라?”
보게슨의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내 말이 틀렸느냐? 알조베티를 배신하고 이제는 샤르비티까지 배신하는 네 참모습을 보라는 것이다!”
“이런, 망할 자식을 봤나!”
얼굴이 붉게 변한 보게슨은 자신을 비웃는 나부탄의 머리를 잡아 철문에 강하게 짓이겼다.
우저저적.
이마부터 콧등까지 길게 찢어진 나부탄은 힘없이 철문 앞에 쓰러졌다.
아랫배에서 내장이 삐져나올 정도로 중상을 입은 그는 보게슨에게 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네놈 주인이 날 먼저 배신해서 내가 이렇게 된 것이다! 알고나 지껄여라, 이놈!”
배신이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한 보게슨은 발을 들어 나부탄의 얼굴을 완전히 박살 내려 했다.
그 순간, 갑자기 녹슨 철문이 안에서부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마력이 깃든 철문 소리는 광장의 모든 이목을 집중시켰다.
모두가 저 철문 하나 때문에 싸우고 있었는데, 그것이 열리고 있으니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더구나 철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얼굴에 쇳덩이 같은 가면을 착용하고 있어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모비롱을 죽이고 감옥 안에서 외로운 사색을 이어 갔던 철가면 휴반트는 장내의 상황을 가볍게 훑어본 뒤,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려놨다.
“왜 에린은 죽어야만 했던 걸까? 나와 그녀는 처음부터 만나서는 안 되는 저주받은 사이였을까?”
“이곳에 미친놈도 있었군.”
보게슨은 뜬금없는 휴반트의 말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중상을 입고 그에게 제압되어 있던 나부탄이 피투성이 얼굴로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웃어? 실성을 했나? 이 상황에서 저 기쁨에 찬 웃음은 뭐란 말인가?’
미간을 찌푸린 그를 향해 나부탄이 말했다.
“그가 나섰으니 너희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다.”
“저자가 누군데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는 너희들의 친구인 알레드로와 그 호위대를 홀로 전멸 시킨 자다.”
“뭐?”
보게슨의 뇌리로 흘려들었던 얘기 하나가 떠올랐다.
알레드로가 죽을 때, 그의 집에 여자 가면을 쓴 검사가 출현했다는 사실.
크게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부탄이 그 일을 거론하고 있다.
“너희들 짓이 아니었나?”
“그를 죽인 건 사실 우리가 아니야, 바로 저 사람이지.”
보게슨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어 철문을 열고 등장한 사내를 응시했다.
언제 바뀌었는지 철가면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름다운 여성의 가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모비롱을 죽여 복수를 끝냈지만 내 마음은 공허하고, 외로울 뿐이다.”
누구에게 말을 건네는 게 아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홀로 대답을 하던 휴반트는 검을 뽑아 번개처럼 휘둘렀다.
상상할 수 없는 압력을 동반한 그의 검을 보게슨이 막는 순간, 그가 자랑하던 붉은 강철 장갑이 산산조각 났고 양손은 팔뚝부터 잘렸다.
단 한 수에 보게슨의 생명과 같은 무기와 양팔을 끝장낸 휴반트는 우아한 동작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옆으로 검을 내뻗었다.
마치 생전에 에린이 검을 들고 장난을 치는 것과 같은 검술이었지만 그 안에 실린 파괴력은 휴반트의 것이었다.
보게슨을 돕기 위해 달려들던 마리지스의 검을 간단히 파괴하고 들어간 휴반트의 검은 뒤늦게 몸을 빼려는 마리지스의 허리를 길게 베어 버렸다.
“크윽!”
뒤로 휘청이던 마리지스의 몸에 다시 휴반트의 검이 다가왔다.
“에린이 날 만난 건 저주였을까?”
우울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 그를 향해 마리지스가 반사적으로 급히 대답했다.
“아니오!”
“…….”
휴반트는 마리지스의 눈앞에서 검을 우뚝 멈췄다. 잠시 그를 노려보던 휴반트는 뒤를 돌아봤다.
광장에 새로이 나타난 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누가 감히 감옥을 습격하는 건가!”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공의 딸을 보러 온 로니올이었다.
그는 도현이 없었다면 광장 싸움에 개입하지 않고 바로 도주를 선택했을 것이다.
‘아버지 눈에 들 좋은 상황이야.’
중간에 설치된 함정을 넘어오느라 말을 버리고 온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친위대를 공격하던 보게슨의 부하 한 명과 검을 섞었다.
그러나 보게슨이 데리고 온 부하들은 하나하나가 강자들이라 로니올은 금세 수세에 몰렸다.
당황한 그는 외쳤다.
“로이, 뭐 해! 날 좀 도와주지 않고!”
도현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 방관할 수 없어 로니올을 궁지에 내몰고 있는 자를 적당히 검으로 위협하며 로니올과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그의 관심은 검을 들고 서서 이쪽 방향을 쳐다보고 있는 휴반트에 쏠려 있었다.
‘이곳에 휴반트가 있었다니.’
경기장 지하 감옥에서 벌어지는 싸움도 놀라웠지만, 그가 있다는 게 더욱 놀라웠다.
휴반트는 친위대를 도와 싸우는 로니올과 도현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검을 옆으로 그었다.
허리에 검상을 입은 마리지스가 기습을 하려다 보게슨처럼 양손이 잘려 뒤로 튕겨져 나갔다.
“저들은 누구요?”
휴반트의 물음에 밖으로 밀려 나오는 내장을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은 나부탄이 고통을 참으며 대꾸했다.
“젊은 사내는 샤르비티 님의 장자 로니올이고, 그 옆의 중년인은 아마 그의 호위 무사일 겁니다.”
“흠…….”
예리한 눈빛으로 도현의 검술을 지켜보던 휴반트는 자리에서 일어난 나부탄을 돌아봤다.
“움직이면 위험할 텐데.”
“괜찮습니다. 전에도 내장에 흙이 묻은 걸 털어 내고 집어넣은 적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옷을 뜯어 아랫배를 칭칭 휘감은 나부탄은 자신의 창을 들고 싸움이 한창인 곳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보게슨과 마리지스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 정신을 잃은 상태였지만 아직 모든 게 끝난 게 아니었다. 남은 적들이 끈질기게 버티며 친위대원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이곳의 책임자로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휴반트는 나부탄을 따라가며 물었다.
“왜 내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지 않았소?”
“유베린 님이 당신을 방해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직한 그의 말속엔 유베린에 대한 짙은 충성심이 묻어났다.
“당신도 참으로 둔한 사람이로군. 그냥 있으시오, 내가 저들을 처리할 테니.”
휴반트는 수십 명이 뒤엉킨 싸움장에 난입해 적들을 짚단처럼 베어 넘겼다.
무섭게 적을 베어 버리는 그의 실력에 근처에서 싸우던 로니올은 깜짝 놀라며 쳐다봤다.
바람처럼 사람 사이를 오가며 검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을 눈으로 따라잡기도 어려웠다.
“로이, 저자 굉장한데?”
“그렇군요.”
도현의 눈빛이 깊어졌다.
친위대를 돕는 걸 보면, 예상대로 샤르비티와 손을 잡은 것 같았다.
칼라치가 몸이 정상이 아닌 상황에서 휴반트라는 존재는 그들의 임무에 있어 커다란 장애물이다.
‘여기서 그를 처리해야 할까?’
상황만 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고민을 곧 접어야만 했다. 어떻게 소식을 듣고 왔는지, 유베린이 수백의 친위대를 직접 이끌고 광장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오, 친위대장이 왔군. 그가 왔으니 이곳에서 내가 싸운 걸 아버지께 보고할 거야.”
로니올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짓다가 도현을 살짝 원망했다.
“그런데 왜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은 거야? 로이의 실력이라면 저기 여자 가면 쓴 자만큼 싸울 수 있었잖아?”
“악마 사냥꾼은 아무 데서나 힘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가 돋보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 가만 그러고 보니 포만드가 여자 가면 쓴 검사 얘기를 했었는데. 설마 뒷골목 소문이 정말이었던 거야?”
로니올은 깜짝 놀라며 적을 모두 베어 버린 휴반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글쎄요. 어쩌면 그럴 수도.”
담담히 대답을 한 도현은 마차에서 내리는 유베린을 응시했다.
그는 지하 감옥이 습격당했는데도 불구하고 표정 하나 변화가 없었다.
마차에서 내린 유베린은 무심한 눈빛으로 싸움이 끝난 광장 일대를 둘러봤다.
경비를 서던 많은 친위대원들이 희생됐고, 지휘관 나부탄은 중상을 입었다.
샤르비티의 아들 로니올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려 하자 그는 몸을 돌려 휴반트에게 걸어갔다
로니올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차가운 모습이었다.
머쓱해진 로니올은 쉴 새 없이 그의 욕을 해 댔다.
“내가 대공이 되면 제일 먼저 저 건방진 자식을 죽여 버릴 거야.”
도현은 한심한 로니올의 말에 귀를 닫고 멀리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유베린과 휴반트의 모습을 주시했다.
‘두 사람 행동이 매우 자연스러워.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처럼.’
저들의 정확한 관계를 궁금해하던 도현은 로니올에게 나직이 물었다.
“유베린의 과거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친위대장?”
로니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확한 건 몰라 나도. 다만 아버지가 지나가는 말씀처럼 침묵의 기사단 얘기를 꺼낸 적이 있으신데, 그가 그곳 출신일지도 모르지.”
“그렇군요.”
도현은 대상인 압할라를 보호하려고 했던 침묵의 기사단 출신 폴허먼을 잠시 떠올렸다.
“죄수들을 바로 옮긴다!”
족쇄와 수갑이 채워진 두 사내와 한 여자가 얼굴에 복면이 채워진 채 마차로 옮겨졌고, 수백의 친위대가 마차를 앞뒤로 에워쌌다.
몇 대의 마차엔 부상당한 사람들과 사로잡힌 적들도 실렸다.
부하들을 지휘해 순식간에 광장을 정리하고 떠날 준비를 마친 유베린은 멀뚱히 서 있는 로니올을 그때서야 알은체했다.
“나부탄에게 들었습니다, 도움을 주셨다고요.”
특유의 고저 없는 음성이 유베린의 입안에서 흘러나왔다.
“돌아가서 아버지께 말씀 좀 잘해 주시오. 내가 목숨을 걸고 저 배신자들을 막아 냈다고 말이오.”
로니올은 보게슨과 마리지스가 갇혀 있는 마차를 가리키며 어깨에 힘을 가득 주었다.
“그리하지요. 한데, 이 시간에 이곳은 왜 오신 겁니까?”
“예지력이라고나 할까. 뭐 아무튼 지나는 길에 나도 모르게 오고 싶었소.”
차마 대공의 딸 때문에 왔다는 소리는 못 하고 로니올은 되는대로 둘러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뭔가 짐작이 됐는지 유베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섰다.
“잠깐만. 저들은 어디로 데려가는 거요?”
“이곳이 노출됐으니,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야겠지요.”
유베린은 로니올의 뒤에 말없이 서 있는 도현을 힐끔 쳐다본 뒤 마차에 올라탔다.
“가자!”
유베린의 한마디에 중무장한 친위대 수백이 광장을 벗어나려 했다.
“이보시오, 친위대장, 아까 오다가 통로에서 우리 말이 함정에 걸려 죽었는데, 말 두 필만 놓고 가시오!”
마차 밖에서 들리는 로니올의 고함 소리에 유베린은 귀찮은 표정으로 말 두 필을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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