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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508화 (508/575)

[508] 디 임팩트 21권 8화

멀어지는 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니올은 발로 땅을 걷어찼다.

“빌어먹을 친위대장. 알아서 날 모시고 가야지, 저희들끼리만 쏙 가는군.”

돌아서던 그는 철문이 활짝 열린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도현에게 소리쳤다.

“어디 가는 거야! 우리도 그만 가야지! 그곳엔 아무도 없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은 보고 싶군요, 감옥의 모습이 어떤지.”

“혼자 보고 와. 난 좀 쉴 테니까.”

도현은 텅 빈 지하 감옥 내부를 둘러봤다.

대공의 자식들이 눈앞에서 사라진 뒤였지만, 그들이 머물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딱딱한 나무 침대와 자체적으로 감옥 안에서 해결한 듯한 용변의 흔적.

그리고 벽에 낙서처럼 그려진 알 수 없는 그림과 글귀들.

아마도 샤르비티를 증오하는 내용인 것 같았다.

“보게슨과 마리지스는 왜 이들을 구하려 했던 걸까?”

도현은 대공의 자식들 중 한 명이 사용했을 딱딱한 나무 침대에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댔다.

“처음엔 알레드로가 죽고, 이제는 보게슨과 마리지스가 배신을 했다. 샤르비티와 사촌들 사이에 동맹이 깨진 걸까?”

연이어 벌어지고 있는 사촌들의 죽음과 배신은 도현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튼 열세 명의 사촌들 중, 이제 남은 건 열 명뿐이로군.”

양팔이 잘려 붙잡힌 저 둘은 치료를 받아 생명을 구한다 해도 샤르비티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도현은 조금 더 안쪽까지 들어가 봤다.

사실 그가 감옥 내부를 둘러보는 이유는 휴반트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호기심이 생겼다.

단순히 감옥을 지키는 목적으로 있었던 건 아닌 느낌이 들었다.

횃불이 타오르는 복도를 걸으며 빈 감방을 확인하던 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끼이익.

반쯤 열린 감방의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피 냄새가 훅 하고 밀려왔다.

‘심한 고문을 받고 죽었군.’

처참한 형태로 죽어 있는 거구의 사내를 내려다보던 도현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어두운 벽면엔 슬픈 얼굴을 한 여자의 얼굴이 거대한 크기로 조각되어 있었다.

나의 사랑. 에린.

* * *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유베린은 휴반트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내 입장이 난처해질 뻔했어.”

“큰일도 아닙니다.”

“내게는 큰일이네, 보게슨과 마리지스가 대공의 자식들을 구하려 하다니.”

“그들은 왜 배신을 한 겁니까?”

“우리 일에 관심이 생기는 건가?”

유베린이 미소를 보이자 휴반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눈앞에 보이는 일이니까.”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자네 마음에 위로가 될 수는 없겠지만, 감히 말하자면 때로는 상처를 잊기 위해선 다른 일에 관심을 두는 것도 좋다네.”

다른 일이라는 게 무엇이 있을까?

에린을 잃고 세상을 다 잃은 기분이 든 휴반트는 그의 말이 별반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문득 유베린이 왜 샤르비티를 돕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당신은 왜 샤르비티를 돕고 있는 겁니까?”

“나 말인가?”

유베린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침묵의 기사단장이 기사단을 해체한 후, 난 몇 년을 방랑하며 살았네. 심한 두통과 알 수 없는 배신감에 내 영혼은 썩어 가고 있었지. 그때 도착한 곳이 야심에 찬 샤르비티의 영지였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는 그의 영지에서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마침내 깨달았고, 실행했네. 그를 대공으로 만들어 주는 것, 그 하나의 목표에 내 마음을 쏟자 나의 영혼은 다시 숨을 쉬고 두통이 줄어들더군.”

어두운 눈빛으로 휴반트를 바라보던 유베린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네도 한번 해 보게. 고통이 어느 정도는 사라질 테니까. 나와 함께해 보겠나?”

숲속의 사자

“저 오래된 광장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다니…… 우울한 일이에요.”

광장이 보이는 높은 건물의 창가에 기대서 나직이 중얼거리던 리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심성이 독한 계집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느냐?”

“내가 심성이 독하다구요?”

리타는 뒤돌아서서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율리비어스의 등을 노려봤다.

“누가 그래요? 난 착한 사람인데.”

“오래간만에 듣는 웃기는 소리로군. 네가 착하다면 나도 착한 사람이겠지.”

“뭐라구요? 당신은 대륙에서 악명이 자자한 마법사잖아요. 어떻게 나와 비교를 해요?”

“나도 젊었을 적엔 너처럼 착한 사람이라고, 한때 착각을 했다. 한데, 남들은 날보고 마법에 미친 자라며 기피하더군.”

허리를 굽혀 마법진을 그리던 율리비어스는 고개를 돌려 리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본인만 모르는 거야, 자신이 어떤 자인지. 후에나 알게 되지. 나처럼 인생을 거의 다 보낸 후에야.”

“마법사가 아니라 점쟁이군. 사람들 관상이나 보고 다니지 그래요?”

“비꼬지 마라. 마법사는 심성이 독해야 돼. 그것은 장점이지, 결코 단점이 될 수 없다. 날 보거라. 세상 시선에 겁을 먹었다면 지금의 위대한 내가 탄생하지 않았을 테니까.”

차가운 미소를 보인 율리비어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방 안에 마법진을 그리는 데 열중했다.

좁쌀처럼 작은 마법어들이 한 자 한 자 밝은 빛을 내며 바닥에 흡수됐다.

뚝 뚝.

정신을 집중하며 마법진을 만드는 율리비어스의 주름진 얼굴에서 땀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마음엔 안 들지만 마법진에 있어서만큼은 인정해 줘야겠어.’

같은 마법사로서 그녀는 약간의 경외심을 느끼며 한쪽에 쪼그려 앉아 조금씩 완성되는 거대한 마법진을 바라봤다.

율리비어스의 마법진을 위해 어제 어베인과 짐브리오는 상의 끝에 많은 보석을 주고 광장에 접한 이 건물을 통째로 사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광장 건너편에 있는 또 다른 건물도 샀다.

율리비어스가 계획한 마법이 펼쳐지기 위해선, 광장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보는 위치에서 두 곳의 마법진이 발동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설마, 이 마법진이 수십 년 전 도시를 파괴했다는 그 마법진은 아니겠죠?”

그녀는 어제부터 품어 온 의심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대공에게 테르논의 석판을 얻기 위해서 그는 무슨 짓이든 할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죽고 죽이는 게 전쟁이다. 너희들도 샤르비티의 병사들을 인정사정없이 죽일 각오를 하고 이곳에 온 게 아니더냐?”

부드러운 천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낸 율리비어스는 감정 없는 눈빛으로 질문을 던진 리타를 응시했다.

“우린 살인마가 아니에요. 그날 광장엔 샤르비티와 병사들뿐만 아니라, 수십만의 군중도 모일 거란 말이에요.”

“누구든 죽는다. 내가 그 죽음을 조금 더 앞당긴다고 해서 그게 무슨 큰일이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냉정한 그의 말에 리타는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의심을 풀기 위해 확인차 물어본 것인데, 그의 모호한 말이 그녀를 화들짝 놀라게 했다.

“그냥 해 본 소리죠? 그렇죠?”

“난 실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릴 속였어! 도현이 그 계획을 찬성할 줄 알아요?”

“그 녀석도 나만큼 대공의 승리에 집착하던 것 같던데, 과연 반대할까?”

“함부로 판단하지 마세요, 그는 당신과 달라요.”

부모를 죽인 원수에 의해 길러진 그녀는 율리비어스 말처럼 심성이 독한 편에 속했다. 그래서 때론 과감하게 흑마법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는 따뜻한 감정도 가지고 있다.

샤르비티를 없애기 위해 애꿎은 도시 사람, 수십만 명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동료들에게 당장 이 사실을 알리겠어요.”

그녀가 방을 나서려 하자, 율리비어스는 얼굴을 닦았던 수건을 휘둘렀다.

엿가락처럼 늘어난 수건이 리타의 발목을 휘감았다.

“나와 싸울 거예요?”

리타의 눈은 어느새 칙칙한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고, 얼굴과 목은 푸른 실핏줄이 드러나 마녀와 같았다.

“돌아와 앉아. 이것은 도시를 파괴할 만한 마법진이 아니니까.”

“그럼 조금 전 그 말들은 뭐죠?”

“그냥 말들이다, 일상적인 대화처럼. 나는 이런 생각이고, 너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서로 간의 대화. 그것을 듣고 네 멋대로 판단 내린 것뿐이지.”

리타는 잠시 그를 노려보다 방 안의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원래의 푸른 빛깔로 되돌아와 있었다.

“누가 들어도 오해할 만한 얘기였잖아요.”

“그것은 성급한 네 판단이겠지.”

“대체 이 마법진은 어떤 마법진이에요? 이제 말해 주세요, 오해받기 싫으면요.”

“네 조그마한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다.”

“무시하지 말아요.”

입술을 삐죽인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에 손을 척하고 올렸다.

“모습은 이래도 머리는 다 컸으니까요.”

“저도 궁금하군요, 어떤 마법인지.”

방 안에 소리 없이 나타난 도현이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어! 도현!”

리타는 든든한 우군이 생긴 사람처럼 반가워했다. 율리비어스를 상대하기엔 도현이 최고였기 때문이다.

“로니올 곁에 있어야 할 녀석이 잘도 돌아다니는구나.”

“새벽에 중요한 일이 벌어져서, 알리고자 잠시 시간을 냈습니다.”

“무슨 일?”

“새벽에 샤르비티의 사촌인 보게슨과 마리지스가 대공의 자녀들을 구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들이?”

도현은 새벽에 있었던 사건을 자세히 설명해 줬다.

아직 도시 내부엔 보게슨과 마리지스가 샤르비티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이 퍼지지 않고 있어서 리타와 율리비어스도 처음 듣는 정보였다.

도현은 이곳에 오기 전, 어베인과 짐브리오, 로나, 딘은 물론 칼라치와도 만나 새벽 사건을 전하며 샤르비티와 사촌들 사이의 동맹이 금이 간 것 같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잘됐다. 그들끼리 싸우면 어찌 됐든 우리에게 도움이 되잖아.”

리타는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좀 더 지켜봐야겠어. 소수의 사촌들 문제인지, 아니면 저들 전체의 문제인지는 확인이 안 됐으니까.”

“근데 철가면 휴반트가 저들 편에 섰다는 건 새벽 일로 확실해진 거네? 아니길 바랐는데.”

약간의 걱정을 품은 그녀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광장에서 그를 상대할 것 같은 예감이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한 시대에 씨드를 먹은 자가 두 명이나 동시에 나타나다니, 과거에도 그런 일이 있었나 모르겠군.”

율리비어스는 흥미로운 대결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가 씨드를 얻었다고 생각해요?”

리타가 묻자 율리비어스는 마법진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답했다.

“충분한 의심이 들 만큼 그자도 강하지 않느냐?”

“그래도 도현은 못 이길 거예요. 도현은 씨드 없이도 강했으니까요. 근본부터 달라요.”

“글쎄, 그건 두고 볼일이겠지.”

무미건조한 그의 대답에 리타는 약이 올랐는지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누구 편이에요?”

“당연히 너희들 편이지. 난 누구보다 대공이 전쟁에서 승리하길 바라는 사람이니까.”

도현은 등을 보인 채 마법진을 만들고 있는 율리비어스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이건 무슨 마법진입니까?”

“물의 마법진이다.”

“물의 마법진요?”

“그렇다. 고대 물의 신을 섬기는 일족들이 사용하던 마법들을 내가 응용한 것이다.”

“어떤 효과가 있는데요?”

호기심 짙은 눈빛으로 리타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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