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 디 임팩트 21권 11화
“다른 사촌들과 연계 없이 너희 둘만 감옥을 습격한 것을 보면, 이 일을 알고 있는 사촌들은 아마 너희 둘뿐이겠지?”
보게슨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샤르비티는 사자를 움직여 의자에 말없이 앉아 있는 마리지스에게로 향했다.
“배를 좋아하는 마리지스여, 왜 먼저 나를 찾아오지 않았느냐? 난 너만은 살려 두려 했는데.”
“…….”
“이제 난 별수 없이 네 항구도시를 불태우고, 네 가족까지 찾아내 물고기 밥이 되게 할 것이다. 아니, 그럴 필요 없이 겁에 질린 항구 주민들이 네 가족을 먼저 찾아내 내게 바치며 용서를 구할지도 모르지.”
“내 가족은 찾을 수 없을 거요. 이미 전서구를 날려 만일을 대비했으니까.”
담담한 그의 음성에 샤르비티는 여유로운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잘못 알고 있어. 네 가족 주변엔 내가 심어 놓은 자들이 있으니까. 그들이 어디로 가든 내 부하들이 위치를 알려 줄 것이다.”
“없는 사실을 지어내지 마시오.”
“과연 그럴까? 내가 아무런 대비 없이 너희들을 쳐내려 하겠느냐? 너희들이 다스리는 성과 영지엔 이미 나의 사람들이 여러 신분으로 들어가 있다. 꽤 오래전부터 말이야.”
침착했던 마리지스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렸다.
“누가 너희들에게 정보를 발설했는지 알려 준다면 네 가족의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
“웃기는 소리. 마리지스, 그의 말을 설마 믿는 건 아니겠지?”
보게슨이 속지 말라는 듯 경고를 했다.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고 싶군요.”
“이보게, 마리지스!”
눈살을 찌푸린 보게슨이 의자에 앉아 있는 마리지스에게 다가가려 하자 친위대들이 그를 막았다.
“자네 갑자기 왜 이러는가! 정말 저자에게 굴복할 것인가!”
“저자의 입을 막아라.”
샤르비티의 지시에 친위대원들은 작은 돌을 강제로 그의 입안에 쑤셔 넣었다.
“조용해졌군. 말해 보게, 마리지스. 누가 자네에게 그 정보를 제공했지?”
샤르비티는 내부의 적을 찾아내 정리하려 했다. 큰 전쟁을 앞두고 이런 불안 요소를 내부에 남겨 두는 것은 매우 위험했기 때문이다.
마리지스는 바닥에 엎드려 자신을 올려다보는 보게슨의 시선을 외면하고 천천히 답했다.
“대상인 알믄이 알려 줬소.”
“그가?”
샤르비티의 눈빛이 깊어졌다.
알믄은 베일 가문의 영지 내에 존재하는 가장 큰 상단의 주인이었다.
죽은 아비의 후광으로 대상인의 칭호를 받는 자.
“믿기 어려운 말이로군. 그자가 뭐가 아쉬워 자네에게 그런 정보를 제공했다는 말인가? 오히려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데.”
“그와 난 남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요. 그는 기념식장에 오면 죽을 테니, 가족을 데리고 멀리 떠나라고 내게 충고를 했소. 하지만 난 그의 충고를 무시하고 오히려 당신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며 보게슨과 함께 대공의 자녀들을 구해 붉은 성으로 가려 했지.”
마리지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포만드 대신 알믄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웠다.
‘포만드야, 네가 알려 준 정보의 대가는 이렇게라도 치러 주마.’
알믄을 죽여 달라는 포만드의 요구를 그는 간접적으로 행하고 있었다.
어차피 알믄은 샤르비티를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상인 중 한 명으로, 그가 피해를 당하면 샤르비티 역시 그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죽음을 앞둔 마리지스의 냉정한 계산이었다.
마음속으로 미소를 짓던 그는 고개를 돌려 보게슨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보게슨도 그의 속셈을 간파했는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샤르비티는 알믄이 정보 제공자라는 말에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자가 이일을 어찌 알고서 자네에게 정보를 제공했지?”
“도시 수비대장에게 직접 들었다고 했소. 그래서 나도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도시 수비대장이 알믄에게?”
샤르비티의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말장난을 하는 것이라면 내겐 통하지 않아.”
“확인해 보시오. 그가 알믄에게 정보를 제공했는지, 안 했는지.”
흔들림 없는 그의 대답에 샤르비티는 사람을 보내 도시 수비대장을 내성으로 즉시 불러들였다.
말을 타고 허겁지겁 달려온 도시 수비대장은 심상치 않은 숲 안의 공기에 긴장하며 샤르비티 앞에 예를 취했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경은 최근에 대상인 알믄을 만난 적이 있으시오?”
도시의 방어를 책임지는 도시 수비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알믄에게 기념식장에서 벌어질 일도 말해 줬는가?”
“그건…….”
말끝을 흐리던 도시 수비대장은 결국 인정을 했다.
“그렇습니다. 그는 도시 수비대에 많은 기부를 하고 있고, 도움도 주고 있어서…….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알믄은 입이 무거워서 절대 비밀을 떠들고 다닐 자가 아닙니다.”
“경은 경솔하군.”
차가운 샤르비티의 목소리에 도시 수비대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답했다.
“용서하소서.”
“내 사촌들을 죽여 달라고 요구하던 많은 장수들 중에 한 명이 바로 경이 아니던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붉은 성으로 원정을 떠나면 이 성과 도시를 경에게 맡기려 했는데, 참으로 실망스러워.”
샤르비티가 눈짓을 하자 있는 듯 없는 듯 한쪽에서 지켜보던 친위대장 유베린이 등에서 검을 뽑아 단번에 내리쳤다.
설마 이 일로 죽기야 하겠냐는 안일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도시 수비대장은 반항 한번 못하고 그대로 목이 달아났다.
털썩.
공터에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싸늘한 눈빛으로 시신을 내려다보던 샤르비티는 마리지스에게 다가갔다.
“상황이 자네 말을 뒷받침해 주는군.”
“알믄은 어떻게 할 거요?”
“당연히 죽여야지. 잘 가게. 곧 자네 가족도 자네의 뒤를 따라갈걸세.”
사자가 달려들어 의자에 앉아 있던 마리지스의 얼굴을 통째로 삼켜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마리지스!”
비통한 음성으로 외치던 보게슨를 향해 또 다른 사자가 달려들었다.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두 사람을 표정 없는 얼굴로 응시하던 샤르비티는 유베린에게 지시했다.
“알믄을 조용히 죽이게, 상인 녀석들이 불안에 떨지 않도록. 우리에겐 상인들의 지지가 필요해.”
대상인 알믄과 연계된 자들이 적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사촌들의 동향은 어떻던가?”
“아직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기념일이 시작되는 내일 아침 보게슨과 마리지스의 죽음을 도시에 전파하게. 죄목은…… 반역이네.”
마법 사슬
동이 트는 시각, 2백여 명의 나팔수들이 광장 제단에서 기념일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을 불었다.
한두 명도 아닌 2백여 명이나 동시에 혼신의 힘을 다해 나팔을 불자 그 웅장한 나팔 소리가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 소리에 놀란 도시의 새들이 지붕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비상했다.
‘기념일이 시작됐군.’
새벽 명상에서 깨어난 도현은 창문을 통해 밝아 오는 아침 하늘을 응시했다.
그의 손에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앞으로 3일간 술과 음식은 금지됐지만, 차와 한 사발의 풀죽은 허용이 됐다. 물론, 도시 주민들에게까지 강제로 적용되는 사항은 아니다.
샤르비티의 병사와 로니올과 같은 그 가족과 수하들에게만 국한된 일이다.
3일간의 애도 기간과 그 뒤의 3일간의 축제. 그리고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제단의 의식.
임무에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다만 그 임무가 기대대로 흐를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었다.
생각 깊은 표정으로 차를 비우던 도현은 뒤를 돌아봤다.
술과 음식을 잔뜩 먹고 어제 하루 종일 잠만 잤던 로니올이 부은 얼굴로 그의 방에 나타났다.
“젠장, 저놈의 나팔 소리, 지겨워 죽겠어. 할아버지를 추모하는 기념일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로니올은 원피스처럼 생긴 잠옷을 입은 상태로 들어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3일간 굶어야 하다니, 미치겠네.”
“풀죽은 조금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도현의 말에 로니올은 인상을 쓰며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사람이 먹을 게 못 된다고. 돼지나 먹을 음식이야.”
“그래도 몸을 튼튼히 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봐야 풀죽이지. 맛없고 쓴 풀죽.”
로니올은 매년 되풀이되는 이 기념일이 싫었다.
“내가 대공이 되면 이딴 의식은 없애 버려야지.”
하품을 하며 일어선 그는 도현에게 손짓을 했다.
“로이, 같이 가지.”
“어디를 말입니까?”
“같이 목욕이나 하자고.”
이 집 지하엔 서너 명이 한꺼번에 이용할 수 있는 작은 목욕탕 같은 시설이 존재했다.
“전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고.”
도현은 몇 번 사양을 하다가 로니올이 짜증을 내려 하자 별수 없이 그를 따라 지하 목욕탕으로 향했다.
대리석 타일이 깔린 작은 지하 목욕탕은 일꾼들이 채워 놓은 뜨거운 물로 인해 수증기가 차 있었다.
“내 고향에선 목욕을 하며 우정을 다지지. 뭐, 로이와 난 신분 차이가 나서 우정을 나눌 사이는 아니지만 말이야. 아무튼 높은 신분인 내가 로이와 이렇게 목욕까지 같이한다는 건 영광으로 알아야 돼.”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으며 먼저 목욕탕 안으로 들어간 로니올은 뒤따라 목욕탕으로 들어오는 도현의 맨몸을 보고 움찔했다.
온몸에 굵은 지렁이 같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자세히 보면 오래된 상처에 다시 상처가 생기고 아문 반복된 흉터였다.
심장 주변은 물론 옆구리와 어깨, 복부, 등, 다리 할 것 없이 전신에 싸움 흔적이다.
마치 수백 번은 생사를 오간 사람의 몸 같았다.
‘완벽한 전사의 몸이다.’
로니올은 감탄과 두려움을 가지며 침을 꿀꺽 삼켰다.
“몸에 상처가 많네?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야.”
“그렇습니까?”
도현은 담담히 말하며 오랜만에 느끼는 뜨거운 물의 감촉을 즐겼다.
“어디서 생긴 상처들이지?”
“악마 사냥꾼이 되기 위해선 오랜 고행을 거쳐야 합니다. 그 과정 중에 생긴 상처들입니다.”
도현은 이계에 넘어와 싸운 수많은 전투를 잠시 떠올려 봤다.
몬스터와 실전을 쌓으며 내공을 높였고, 얼음탑주 같은 강한 마법사를 만나 때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브링틱의 회색빛 대지에서는 수만의 인간 몬스터와 혈전을 벌이고 바크 드라모스에게 저주받은 성주를 해방시켜 주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계에 머문 짧은 시간 동안 놀라운 일을 많이 경험한 것 같았다.
‘이제 이계에서 보낼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군.’
경험상 길어야 넉 달이고 짧으면 석 달이었다.
지구로 돌아가 차원 이동 에너지가 차 있는 스톤을 발견하지 않는 한, 이계 여행은 저 기간으로 끝이 난다.
‘율리비어스가 조금 만 더 신뢰가 가는 인물이었다면 그에게 팔의 문양을 보여 주며 도움을 청했을 텐데…….’
아쉽지만 도현은 율리비어스와 거리를 두기로 했다. 지금이야 목적이 같아서 한배를 탔지만, 그가 차원 이동의 단서가 될 수 있는 문양의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근데 그 팔의 문신은 뭐지? 황금을 바른 것처럼 반짝이던데?”
로니올은 조금 전 도현의 팔에서 본 황금빛 문신을 가리켰다.
“친분 있는 사람이 해 준 문신입니다.”
“독특하군. 황금색 문신은 처음 본 것 같아. 나도 그런 문신을 할 수 있을까? 가치 있어 보이는데.”
도현은 물속에서 은은히 황금빛을 발하는 팔의 문신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문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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