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 디 임팩트 21권 13화
혹독한 고문에 망가져 버린 몸을 이끌고 그녀가 도착한 곳은 바로 동생의 집이다.
이곳에서 그녀는 작은 촛불 하나에 의지해 어둠 속에서 여러 날을 보내며 아픈 몸을 겨우 추슬러 움직일 수 있는 체력을 확보했다.
“지금쯤 샤르비티는 부하들과 어울려 술과 고기를 즐기고 있겠지?”
오늘이 5일째 되는 기념일.
금식과 금주를 통해 샤르비티의 부친을 추모하는 애도의 기간이 지났고, 이제 먹고 마시는 축제의 기간이다.
작년만 하더라도 그녀는 샤르비티가 내리는 술잔을 직접 받고 마치 그녀가 대단한 인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부심이 넘쳤었다.
“모두 저주받아서 죽기를 바란다. 샤르비티부터 그 자식 놈들까지 모두 다!”
촛불을 끄고 식탁 의자에서 일어난 그녀는 동생 집을 나서 리드만 사제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여러 날 씻지 않고 행색도 초라한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거지 몰골이었다.
절뚝이며 밤거리를 걷던 그녀는 리드만 사제의 집 근처에 이르러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입으로 바람을 후 하고 길게 불었다.
바람의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그녀는 회오리치는 바람에 몸을 싣고 위로 떠올랐다.
한동안 떠오르던 그녀는 회오리바람이 사라지려고 할 때쯤 리드만 사제의 맞은편 집 지붕 위에 사뿐히 발을 디뎠다.
엎드린 그녀는 지붕과 한 몸이 되어 리드만 사제의 집을 내려다봤다.
창문이 모두 닫혀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집을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파악이 가능한 위치였다.
‘그자도 왔을까?’
그녀에게 있어 도현은 악몽과 같은 존재였다.
붉은 성을 날려 버릴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망가트린 자.
동생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은 그녀 자신과 샤르비티였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선 도현의 행동이 그녀의 불행에 불을 지핀 건 사실이었다.
분한 눈빛으로 도현을 떠올리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해 주던 일곱 신의 사제 리드만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그는 내게 진심으로 기도를 해 주었는데,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며칠 전 동생의 옆집 아이들의 눈망울 보고 느꼈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또다시 그녀를 괴롭혔다.
숨을 쉴 수가 없고, 호흡이 가빠 왔다.
콧구멍과 입을 크게 벌려 주변의 공기를 급히 빨아들이던 그녀는 리드만의 집 입구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한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눈빛이 어찌나 날카롭던지 먼 거리를 뛰어넘어 그녀의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급히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사내는 팔짱을 낀 상태로 허공을 날아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서 있는 것 만으로도 놀라운 압박감을 선사하는 자.
몸이 절로 긴장한 그녀는 급히 바람을 날리는 동시에 지붕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녀의 발밑에는 구름처럼 뭉친 바람 덩어리가 그녀의 몸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콧방귀를 낀 칼라치는 바위처럼 날아오는 묵직한 바람을 손으로 간단히 부숴 버리고 비호처럼 몸을 날려 벨라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벨라는 화염이 일렁이는 마법 채찍을 만들어 뒤에서 자신의 머리채를 움켜쥔 칼라치를 공격했다.
눈썹이 꿈틀한 칼라치는 벨라의 마법 채찍을 남은 한 손으로 휘감아 힘으로 파괴해 버렸다.
그 놀라운 광경에 벨라는 온몸의 힘이 쫙 빠져 버렸다.
“이거 놔.”
“넌 누군데 저 집을 감시하고 있는 거지?”
“감시하고 있지 않았다. 그냥 지켜본 거야.”
“나에겐 그 말이 그 말 같은데.”
눈빛이 차가워진 칼라치는 그녀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가 벽에 던졌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부딪힌 벨라는 허리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고, 집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예요?”
로나는 머리카락이 길게 헝클어져 얼굴을 가리고 있는 벨라를 쳐다보며 물었다.
“밖에서 이곳을 감시하고 있더군.”
칼라치의 대답에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에드, 따라와.”
짐브리오는 에드를 데리고 신속히 집 밖으로 나갔다. 또 다른 감시자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당신 누구죠?”
로나의 질문에 벨라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로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다시 물었다.
“안 들려요? 묻고 있잖아요.”
“날 보내 줘.”
벨라의 당당한 요구에 리타는 국자를 휘두르며 외쳤다.
“웃기는 소리 하시네! 너 같으면 지금 이 상황에서 널 풀어 줄 것 같아! 신분이나 밝히라구!”
율리비어스와 힘들게 마법진을 설치하고 돌아온 그녀는 동료들을 위해 야식을 만드는 중이었다.
내일 있을 싸움에서 동료들이 조금이라도 힘을 내고 크게 다치지 않기를 기원하는 의미였다.
한데 향신료를 넣어야 하는 중요한 순간에 반갑지 않은 감시자의 등장으로 인해 그녀는 그만 그것을 과하게 넣고 마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녀에게 이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재앙과 같았다.
“얼마나 정성을 들인 요리인데.”
“날 보내 줘.”
같은 말만 반복하는 그녀에게 어베인이 조용히 다가가 검을 뽑아 휘둘렀다.
벨라의 얼굴을 가려 주던 긴 머리카락들이 싹둑 잘려 나갔다.
“이제 얼굴이 좀 보이는군.”
어베인은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턱을 받쳐 세웠다.
고문으로 흉하게 변한 그녀의 얼굴이 사람들 시선 가득 들어왔다.
“힘든 일을 겪었나 보군.”
“이 손 치워!”
벨라는 구경거리처럼 자신을 응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됐는지 어베인의 손을 탁 치며 고개를 숙였다.
“나 저 여자 누군지 알아요!”
벨라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던 리타는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누구지?”
어베인이 묻자 리타는 국자를 흔들며 답했다.
“저 여자는 대공 부인의 시녀로 위장해 붉은 성을 파괴하려 했던 그 여자예요. 벨라 말이에요.”
리타는 붉은 성에서 벨라를 두 번 봤다.
한 번은 도현과 함께 대상인 압할라의 목이 담긴 청동 상자를 들고 대공 부인을 만나는 자리였고, 두 번째는 도현이 고대 유적터에서 정신을 잃은 벨라를 대공 측에 넘기던 순간이다.
두 경우 모두 가까이서 벨라를 봤기 때문에 집 안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벨라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여자가 벨라라고?”
사람들은 놀란 눈빛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벨라를 응시했다.
“틀림없다니까요. 얼굴이 저렇게 된 건, 대공 부인의 고문을 받아서 일거에요. 하지만 저 상처 뒤에 가려진 본래의 얼굴은 그대로예요. 붉은 성에서 도망쳤다더니, 정말 여기서 다시 볼 줄이야.”
“그래, 내가 벨라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벨라가 고개를 치켜들며 버럭 고함을 지르자 리타는 들고 있던 국자로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이게 뭐 잘했다고!”
음식 냄새가 묻어나는 국자에 머리를 얻어맞은 벨라는 고개를 획 돌리며 앞으로 손을 뿌렸다.
가까이 온 리타를 마법으로 공격한 것이다.
묵직한 바람이 얼굴에 파도처럼 밀려오자 리타는 마왕이 그려진 검은 방패를 즉시 소환해 자신을 보호했다.
“반사!”
마왕의 방패에 부딪힌 벨라의 바람은 고무공처럼 튕겨 시전자인 벨라의 어깨를 때렸다.
그 충격에 벨라는 뒤로 넘어지며 천장을 올려다보는 신세가 됐다.
“곤란하게 됐군.”
어베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벨라는 샤르비티의 부하다. 그녀가 집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볼일이 아니다.
이때 에드를 데리고 집 주변을 조사한 짐브리오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밖은 조용하던데.”
“이상해요. 샤르비티가 몸도 정상이 아닌 여자를 감시자로 보냈을 리가 없잖아요.”
로나는 벨라의 행색을 훑으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위장이 아닌 실제 악취 나는 옷을 입고 있었고,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손톱 빠진 손을 좌우로 흔들며 고통을 참고 있었다.
간혹가다 터져 나오는 마른기침은 깊은 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힘겨움이 묻어났다.
“난 감시자가 아니다. 샤르비티가 날 보내지도 않았고. 저자가 날 끌고 온 거야!”
비틀거리며 일어선 벨라는 말없이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칼라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손가락을 내리지 않으면 목을 잘라 주겠다.”
서늘한 칼라치의 경고에 벨라는 그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감시하는 게 아니라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건가?”
영주 딘이 물었다.
“붉은 성에 있어야 할 너희들이 보이기에 호기심이 생겨 지켜보고 있었다.”
“너는 목숨을 바쳐 붉은 성을 파괴하려고 할 만큼 샤르비티에게 충성을 바치던 자가 아닌가? 단순한 호기심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야.”
“내가 진짜 감시인이었다면 이곳은 벌써 샤르비티의 병사들로 가득했어.”
그녀의 항변에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한 번씩 마주 보았다. 그녀 말도 나름 일리가 있었다.
“어떻게 이곳을 알게 된 거지?”
“저 사람을 따라왔다.”
그녀의 시선이 리드만 사제에게로 향하자 모두들 그를 쳐다봤다.
“그는 며칠 전 거리에서 내게 기도를 해 주었다.”
리드만 사제는 무거운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번화한 거리에서 가족의 죽음에 비통해하던 여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설마 붉은 성에서 탈출한 벨라였을 줄이야.
“아, 그 여자였군. 헬구스가 거지인 줄 알고 준 은화를 내팽개치며 꺼지라고 했던 여자.”
영주 딘도 뒤늦게 기억을 해 냈다.
“이제 다 알았겠지? 그만 날 보내 줘.”
“당당하군.”
짐브리오는 단검을 뽑아 그녀의 가슴에 들이댔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감시든 호기심이든 그 모든 건 상관없다. 넌 샤르비티의 부하잖아. 어떻게 널 믿고 이대로 보내 줄 수가 있단 말이냐.”
산속에서 만났다면 엉덩이를 걷어차고 살려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내일 광장에서 일행의 명운을 건 전투를 벌여야 한다. 작은 방심으로 인해 모두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날 믿느냐고?”
벨라는 그녀의 가슴에 와 닿은 짐브리오의 단검을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붉은 피가 후드득 떨어지며 바닥을 적셨다.
“내 눈을 봐. 내가 샤르비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푸른 눈동자 깊숙한 곳에 증오 서린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꽃은 너무 어둡고 강해서 푸른 눈동자를 소유한 벨라의 정신까지도 갉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음…….”
짐브리오는 침음성을 흘렸다.
“난 더 이상 샤르비티의 부하가 아니야. 그는 내 남동생을 죽인 원수에 불과해. 그러니까, 날 그냥 내버려 둬.”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녀는 터벅터벅 걸어서 집을 나가려 했다.
그녀가 걸어간 길에는 그녀의 손에서 흘러내린 피가 점점이 이어져 있었다.
“속지 마세요. 저 여자는 죽은 척 연기를 해서 붉은 성을 빠져나올 정도로 주위 사람을 속이는 데 천재란 말이에요.”
정신을 차린 리타는 어둠의 전사 비골을 소환해 그녀를 가로막았다.
은빛 망토를 찬 비골은 광채가 나는 붉은 눈동자로 벨라를 내려다보며 당장이라도 도끼를 휘두를 자세를 취했다.
“당장 그 여자를 죽여라.”
2층에서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율리비어스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붉은 성에서 죽었어야 할 계집이었다. 겨우 저 여자 하나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다.”
“굳이 죽일 필요가 있겠소?”
리드만 사제는 연민 어린 눈빛으로 벨라를 바라보며 일곱 신의 성호를 그었다.
“거리에서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의 영혼은 죽어 가고 있었소. 샤르비티에 의해 그녀의 동생이 죽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닐 거요. 더 이상 적이 아니니 살려 줍시다. 그녀는 살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죽음과도 같은 고통일 테니까.”
“약한 소리하고 있군.”
“자비를 베풀자는 말입니다.”
리드만 사제는 끝까지 벨라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며칠 전 일곱 신의 이름으로 그녀를 축복했는데, 그가 보는 앞에서 그녀가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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