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 디 임팩트 21권 14화
영주 딘은 리드만 사제가 저렇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전면에 나서는 일을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딘의 물음에 어베인은 주름 깊은 표정을 지으며 비골 앞에 서 있는 벨라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저 여자의 눈빛을 봐서 알겠지만, 불안한 면도 있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런 불안감 말이오.”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그녀를 내일까지 가둬 두는 거요. 그러면 우리 일에 지장도 없을뿐더러 그녀도 목숨을 부지하는 셈이지.”
딘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어베인은 로나와 짐브리오의 의사를 확인했다.
그들도 딘의 제안에 찬성을 했다. 동료인 리드만 사제가 저렇게까지 벨라를 살려 주라고 하는데,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칼라치.”
“알아서들 해, 난 그만 가볼 테니. 내일 광장에서 만나지.”
어베인에게 벨라의 처리를 위임한 칼라치는 바람처럼 집을 나가 버렸다.
남은 사람은 이제 율리비어스와 리타뿐이었다.
“너 운 좋은 줄 알아. 리드만 사제님이 널 살린 거야. 비골, 물러나라.”
리타의 지시를 받은 비골은 전투 자세를 풀고 도끼를 바닥에 내려놨다.
“간단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군. 역시 너희들과 손을 잡고 움직이는 건 성가신 일이야.”
율리비어스는 발로 마법진을 그렸다.
빛과 함께 생성된 마법진에서 속이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마법 사슬이 생성됐다.
손가락 두께에 길이가 2미터 정도 되는 투명한 마법 사슬을 손에 쥔 그는 벨라에게 그것을 던졌다.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날아간 마법 사슬은 벨라의 몸을 속박해 버렸다.
“뭐 하는 짓이야! 이거 풀어 줘!”
벨라는 마법을 사용해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투명한 마법 사슬은 은은한 빛을 내며 그녀의 모든 마법을 봉쇄해 버렸다.
“하루 정도 지나면 자유로워질 것이다.”
율리비어스는 리드만 사제를 힐끔 쳐다본 뒤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그의 방으로 들어갔고, 짐브리오는 벨라를 짐짝처럼 번쩍 들어서 사용하지 않는 방에 눕혔다.
“나쁜 놈들! 당장 날 풀어 줘! 난 내일 샤르비티를 죽이러 가야 돼!”
“미친 소리 그만하고 얌전히 있어. 계속 시끄럽게 하면 입을 막아 버릴 테니까.”
“너희들도 그자를 죽이러 왔잖아! 안 그래? 다 알고 있다고! 내가 도와줄게! 날 풀어 줘!”
“헛소리는 그만하고 입 좀 닥쳐!”
짐브리오는 커다란 주먹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제 겨우 조용해졌네.”
그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리드만 사제가 방에 들어왔다.
그의 머릿속에는 동생을 잃고 괴로워하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상처를 치료해 줘야겠지.’
그는 짐브리오의 단검을 맨손으로 잡아 상처가 난 그녀의 손을 치료해 준 후, 의자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얼마 후, 그녀가 깨어났다.
“내일이면 몸의 속박이 풀린다고 했으니 이곳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게.”
“당신은 왜 날 살리려고 했죠?”
마법 사슬에 몸이 묶인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며 힘없이 물었다.
“영혼까지 슬픔에 찬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잔인한 짓이야. 그것도 내가 일곱 신의 이름으로 축복까지 해 줬는데.”
“당신이 유능한 사제라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나요?”
“그럴 리가.”
리드만 사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저 자네는 이곳에 조용히 있다 자네 갈 길을 가게.”
의자에서 일어선 그에게 벨라가 다급히 물었다.
“도현은 어디 있죠?”
“도현?”
“그도 여기에 있나요?”
“무슨 이유로 그를 찾는 건가?”
리드만 사제가 다시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샤르비티에게는 신의 파편이 하나 더 있었어요. 그는 그것으로 그 무엇에도 뚫리지 않는 신의 갑옷을 제작해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있죠.”
그녀의 놀라운 말에 리드만 사제의 표정이 굳어졌다.
태초에 세상에 퍼진 신의 파편은 하나하나가 세상을 뒤엎을 만큼 큰 힘을 감추고 있었다. 그것으로 만든 갑옷이라면 그 능력은 인간의 힘으로 대적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당신들이 샤르비티를 죽이러 온 것이라면 반드시 도현이 있어야 해요. 그걸 말하고 싶었어요.”
“왜 도현이 그런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벨라는 벽에 머리를 기대며 천천히 답했다.
“그는 붉은 성에서 내가 설치한 신의 파편을 한 차례 파괴했잖아요. 그러니 그라면 신의 갑옷으로 보호받는 샤르비티를 죽일 수 있지 않겠어요?”
신의 갑옷
제멋대로 사는 로니올이라 해도 내일 있을 기념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축제 기간 동안 마시던 술을 줄인 그는 아버지가 내성에서 보내 준 의식 복장을 미리 입어 보며 근엄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 섰다.
“어때, 잘 어울리는 것 같나?”
거울 속 모습을 들여다보던 로니올이 뒤에 서 있는 도현에게 물었다.
“어울리긴 합니다만, 독특한 옷이군요.”
교회의 성가대 복장처럼 전신을 뒤덮은 그 옷은 전면엔 산과 호수를 떠받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그림이 황금색 실로 수놓아져 있고, 등 부위엔 달과 태양이 교차하며 바다로 추락하는 모습이 검은색 실로 그려져 있었다.
의식용 의상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옷에 그려진 그림은 어떤 의미가 존재할 것 같았다.
“시선을 끄는 그림들이지. 이해해, 나도 처음 이 옷을 받아서 입어 보고는 뭐 이런 괴상한 그림들을 넣었나 싶었지.”
로니올은 말을 하며 황금 요대를 허리에 찼다.
“아버지는 영지를 떠나 1년 넘게 세상을 떠돌아다닌 적이 있으셔. 왜 대공의 자리를 빼앗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시고 답을 구하는 과정이라고 하셨지.”
“그래서 내린 결론이 지금의 상황이군요.”
“뭐, 그런 셈이지. 덕분에 난 대공의 아들이 되어 다음 대 대공의 자리를 넘볼 수 있게 된 것이고.”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나직이 웃은 로니올은 거울 옆 탁자 위에 놓아둔 단검을 집어 황금 요대에 장착된 검집에 꽂아 넣었다.
“아버지가 기념일을 시작한 건, 그 여행에서 돌아오고 난 무렵부터야.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듣기론, 아버지는 여행 중에 고대 사원을 발견해서 귀한 것들도 얻었다고 하는데, 뭐 내가 본 적이 있어야지. 아무튼 아버지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라니까, 내가 물어도 대답도 안 해 주시고.”
은근히 아버지를 비난하던 로니올의 눈에 거울 속에 비친 시녀가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한 말을 그동안 저 시녀가 계속 듣고 있었다.
“너, 이리 와.”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다가온 시녀의 목에 단검이 꽂혔다.
시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피를 흘리며 힘없이 쓰러졌다.
돌연한 그의 행동에 표정이 굳어진 도현은 서둘러 시녀의 상처를 살펴봤다.
‘늦었어.’
시녀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부릅뜬 그녀의 눈을 감겨 준 도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과하게 쓰신 것 같군요.”
“시녀야 많은데, 뭐. 이런 것들이 나중에 내게 위험을 초래한다고.”
냉정히 말한 로니올은 내일 입을 옷을 벗어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잘못했으면 내일 입을 옷에 피가 묻을 뻔했네.”
“…….”
도현은 실망감과 분노를 숨기며 뒤돌아섰다.
그동안 로니올과 지내며 도현은 내심 그에게 약간의 정과 미안함이 쌓이고 있었다. 그것들이 지금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다.
“로이, 어디 가는 거야?”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이 밤에? 설마 이 여자 죽였다고 화난 거야? 혹시 잠자리 시중을 들던 아이인가?”
터무니없는 그의 말에 도현은 쓴웃음을 흘리며 집 밖으로 나왔다.
‘내일이면 모든 게 결판이 나겠군.’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본 도현은,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 노드빌 경이 은신해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대공의 자식들을 구하기 위해 온 노드빌 경과 그 수하들은 조촐하게 술자리를 마련해 고향 얘기를 나누며 이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내일 있을 전투에 대한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직이 웃으며 못다 한 그들의 과거 이야기를 풀어낼 뿐이다.
“내일 광장에서 도움을 주고 싶지만, 강적이 등장해서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닐세, 자리를 마련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네.”
노드빌 경은 광장 지도를 봤다.
율리비어스가 강력한 마법으로 광장에 물이 넘치게 만든다고 했다. 그 혼란 속에서 그는 부하들과 대공의 자식들을 구해야만 한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노드빌은 투구에 술을 담아 내밀었다.
“여기 온 목적은 다르지만 우린 한 동료네.”
도현은 그리 깨끗지 못한 투구 안에 술을 잠시 바라보다 한 번에 그 술을 비워 버렸다.
숨죽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드빌의 수하들이 탁자를 손바닥으로 치며 흥겹게 웃었다.
“몸조심하게.”
노드빌의 말에 도현은 차분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도 조심하십시오.”
도현은 노드빌과 그 수하들을 한차례 쓸어 본 후, 창을 넘어 바람처럼 집을 나섰다.
신법을 발휘해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집과 건물의 지붕을 타고 달리던 그는 짧은 시간 만에 동료들이 모여 있는 집에 도착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집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벨라가 이 집에 있네.”
“벨라가요?”
도현은 속으로 놀라며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복도 쪽 방을 응시했다.
‘벨라가 왜 이곳에?’
궁금해하는 도현에게 어베인은 칼라치가 벨라를 잡아 온 일을 말해 준 후, 마지막에 리드만 사제가 그녀로부터 들은 갑옷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녀 말이 사실이라면 신의 파편으로 만들었다는 그 갑옷은 큰 변수가 될 것 같네.”
도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붉은 성에서 신의 파편이 얼마나 강력하고 위험한 물건인지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해 본 그였다.
‘바크 드라모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붉은 성은 그때 벌써 파괴됐을 거야. 그만큼 신의 파편은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그것으로 만든 갑옷을 샤르비티가 입고 있다고?’
보통의 힘으로는 그를 상대하기 어렵게 됐다.
“그나마 검은 용의 비늘을 네가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넌 철가면 녀석을 상대해야 하잖아.”
짐브리오가 2층 방에 있는 율리비어스를 의식해 목소리를 극도로 낮추며 말했다.
붉은 성에서 도현이 어떻게 파괴신의 파편을 없앴는지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있는 에드, 어베인과 로나, 짐브리오, 딘, 리드만, 리타와 자수정 속 락제프뿐이었다.
“칼라치에게 갑옷 이야기를 했습니까?”
“아직. 우리도 조금 전에야 그녀로부터 들었거든.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신의 파편을 상대할 만한 존재는 검은 용에게 선택받은 너밖에 없으니까.”
“너희들끼리 무슨 말을 그렇게 속닥이는 것이냐?”
2층에 나타난 율리비어스가 난간에 손을 얹고 지그시 도현을 내려다봤다.
“신의 파편 얘기를 하고 있었소.”
짐브리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게 무엇이 중요하다고. 붉은 성에서 파괴신의 파편을 도현이 없애지 않았느냐. 이번에도 도현이 샤르비티를 맡으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철가면 휴반트는 누가 상대하구요? 친위대장과 같이 다니는 걸 보면 그가 샤르비티를 지키는 게 분명하다고요.”
리타의 지적에 율리비어스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손을 움직이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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