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 디 임팩트 21권 15화
“칼라치가 상대하면 된다.”
“몸이 정상이 아닌데 어떻게 그를 상대하겠어요. 도현이 휴반트를 상대하려는 이유가 다 그것 때문인데, 당신도 칼라치를 못 미더워했잖아요.”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율리비어스는 계단을 내려와 도현 앞에 섰다.
“네가 샤르비티를 죽여라. 그 수밖에는 없다. 만약 휴반트가 나타나면 칼라치와 내가 그자를 상대하겠다. 어차피 내일 싸움은 어디가 위험하고 어디가 덜 위험하고가 구분이 되지 않는 아수라장이 될 테니까.”
* * *
마법 사슬에 속박돼 벽에 기대어 있던 벨라는 도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힘없이 말했다.
“역시 당신도 여기 와 있었네. 신의 갑옷 얘기를 하면 당신이 나타날 줄 알았지.”
“그래서 일부러 신의 갑옷 이야기를 지어낸 건가?”
“천만에! 신의 갑옷은 진짜 존재해!”
도현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다가 허리를 굽혀 그녀의 입에 수통을 기울였다.
“마셔, 물을 줘도 안 마신다고 들었어.”
“날 가둬 두고 있으니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완강히 물 마시기를 거부했다.
“네가 붉은 성에서 한 짓을 생각해 봐. 우리가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나?”
“난 너희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알려 줬잖아. 신의 갑옷 말이야. 그런데도 왜 날 믿지 못하고 가둬 두고 있는 거야? 난 샤르비티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러니까 날 풀어 줘. 너희들과 함께 싸울게.”
도현은 고문으로 얼굴이 망가진 벨라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봤다.
샤르비티에게 충성을 다 바친 그녀의 최후는 참으로 비참했다. 몸은 망가지고 가족은 죽고.
“그건 안 돼.”
“날 풀어 달란 말이야!”
그녀는 고함을 지르며 도현에게 달려들었다. 도현은 무거운 눈빛으로 그녀의 이마에 손가락을 가볍게 댔다.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그녀는 뒤로 날아가 침대에 떨어졌다.
“당신은 지금 정상이 아니야. 그 불안한 심리 상태로는 우리를 돕지 못해.”
“너만 아니었으면 내 동생은 살 수 있었는데…… 나쁜 자식.”
침대에서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도현이 나직이 말했다.
“누군가에겐 내가 나쁜 놈이 되겠지. 반대로 또 다른 사람에겐 좋은 사람이 되겠고. 당신과 난 서로 반대편에서 싸웠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하고 싶어. 난 당신 동생을 죽이지 않았어. 그렇다고 당신이 죽인 것도 아니고. 그는 샤르비티가 죽인 거야. 그것만 명심해.”
“레듀모!”
벨라는 침대에 누워 폭포수 같은 눈물을 쏟아 냈다.
도현이 한 말이 그녀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 동생을 네가 죽인 게 아니라는 단 한마디.
실제로 그녀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그렇게 위로해 줬다는 게 고마웠다.
그것도 붉은 성에서 적으로 싸운 당사자로부터 들으니, 그 감정의 미묘함이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폭포수 같은 눈물을 쏟아 내던 그녀가 진정을 하자 도현은 그녀를 침대에서 일으켜 앉혔다.
“우리는 우리 일을 완수하려 노력할 거야. 당신은 당신 삶을 새로 찾아가. 대공의 사람들이 당신을 발견하면 가만두려 하지 않을 테니까.”
도현은 말을 하며 수통을 다시 그녀 입에 물려 줬다.
눈동자를 움직여 위에서 내려다보는 도현을 가만히 응시하던 벨라는 입을 벌려 물을 마셨다.
건조하고 갈라졌던 벨라의 입술이 물기를 머금으며 생기를 조금씩 찾아갔다.
작은 수통이 다 빌 정도로 물을 많이 마신 그녀는 고개를 뒤로 빼며 수통에서 입을 뗐다.
“됐어, 그만.”
도현은 뒤로 물러나 수통의 마개를 닫은 후, 의자를 끌고 와 그녀 앞에 앉았다.
“괜찮다면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어.”
“그 갑옷 이야기겠지?”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샤르비티가 신의 파편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갑옷. 어떻게 생겼고, 어떤 능력을 발휘하는지 알고 싶어.”
* * *
헬구스는 달빛이 흐르는 집 앞 나무에 기대 홀로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몹시 침울했다. 칼라치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든든한 친구 한 명 만들어 놨더니, 이게 뭐야, 젠장. 이제 누굴 믿고 왕실로 돌아가서 왕좌를 차지하나.”
왕실 서자 출신인 헬구스는 칼라치의 운명을 애석해했다.
내일 샤르비티와 사촌들을 죽이는 임무를 완수해도, 칼라치의 운명은 별반 달라질 게 없어 보였다.
최악의 경우 광장에서 최후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래, 그 친구 걱정을 할 게 아니지. 내 걱정이나 해야지.”
풀이 깔린 바닥에 벌렁 누운 그는 달과 별을 보는 것조차도 귀찮은지 눈을 굳게 감았다.
세상만사가 귀찮았다.
‘이러니 내가 살이 찌는 거야, 빌어먹을.’
그는 술병 옆에 놔둔 육포를 찾아내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어 댔다.
“헬구스.”
옆에서 들리는 도현의 목소리에 움찔한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도현이 나무 아래에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는 겁니까?”
주변을 둘러보며 도현이 천천히 걸어왔다. 집 앞에서 술을 마시는 건 헬구스 혼자였다.
“칼라치 때문에 마음이 울적해서 그러네.”
어두운 얼굴로 답한 그는 들고 있던 술병을 도현에게 내밀었다.
“자네도 너무했어. 내게는 사전에 언질이라도 해 줬어야지. 그랬으면 칼라치와 술이라도 더 자주 마셨지.”
“미안합니다.”
도현은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 그의 옆에 앉아 묵묵히 술을 몇 모금 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헬구스는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었다.
“아냐, 자네가 무슨 잘못이겠나. 칼라치 성격을 볼 때, 자네 입을 단속시켰겠지. 속상해서 하는 말이니까, 조금 전 말은 신경 쓰지 말게.”
“이해합니다. 저 같아도 서운했을 겁니다.”
도현은 술병을 돌려주며 불이 켜진 집을 응시했다.
“칼라치와 이디언은 안에 있습니까?”
“안에 있네. 난 일부러 밖으로 나왔어, 두 사람 사이에 방해가 될까 봐서.”
“칼라치의 몸은 어때 보입니까?”
“하아, 좋지 않네. 아까 낮에도 가슴 통증 때문에 힘들어하더군. 솔직히 나 같으면 벌써 포기하고 남은 시간 편히 지내자 했을 텐데, 그는 그럴 수 없다고 하더군.”
도현의 눈빛이 깊어졌다. 칼라치의 몸 상태가 이렇게 빨리 안 좋아질 줄 알았다면 붉은 성에서 그를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다른 방법을 강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대체할 사람이 없었다.
“그가 오늘 밤이라도 떠난다면 전, 그를 막지 않을 겁니다.”
“등을 떠밀어도 그는 가지 않을 거네. 그에겐 명예도 소중하니까. 다크캐슬에서 자네에게 느꼈던 패배감은 한 번이면 족하다는 게 그의 뜻이네.”
“그렇군요…….”
도현은 칼라치의 마음이 어떤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됐다.
“벨라 이야기는 들었는가? 칼라치가 아까 그녀를 잡았다 던데.”
“그렇지 않아도 그 일 때문에 왔습니다. 상황이 바뀌어서요.”
도현은 짧게 신의 파편과 갑옷 이야기를 했고, 헬구스는 인상을 잔뜩 썼다.
“곤란하게 됐군. 그자가 그런 것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다니.”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현관문이 열리며 칼라치가 모습을 보였다.
“들어오게.”
도현은 칼라치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디언은 도현과 한자리에 있는 게 여전히 불편했는지 눈인사만 나누고 헬구스가 있는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디언의 행동을 이해해. 그녀에겐 아직 네가 어렵고 어색한 존재야.”
“알고 있어. 그녀를 탓하진 않아.”
“벌써 새벽별이 떠 버렸군.”
칼라치는 이디언과 마시던 술을 새로운 술잔에 담아 도현 앞에 내려놨다.
“잠을 잘 수 없는 밤이 오고 말았다. 이런 이상하고 설레는 밤은 처음인 것 같다.”
“몸이 전보다 더 안 좋아 보여.”
앙상하게 마른 얼굴과 몸을 보며 도현은 걱정을 했다. 거대한 방패를 폭풍처럼 휘두르던 적발 거한의 사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나무처럼 마른 길쭉한 사내만이 앉아 있었다.
물론, 몸에서 풍기는 기세는 여전히 살아 있긴 했지만, 건강할 때와 비교하면 병자를 보는 듯했다.
“가벼운 몸도 나쁘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는 그를 잠시 말없이 응시하던 도현은 술잔을 옆으로 밀어 내며 말했다.
“이디언과 있을 시간을 길게 빼앗고 싶지 않아. 본론을 말하지. 샤르비티는 어떤 공격에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갑옷을 가지고 있어. 그 갑옷은 마법도 검도, 화살도, 불도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무적의 갑옷이라더군.”
“환상처럼 들리는 갑옷이로군.”
칼라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세상에 그런 갑옷이 존재할 수 있나?”
“가능해, 신의 파편이 있다면.”
“신의 파편?”
“리드만 사제님 말씀에 의하면 고대부터 신의 파편은 불가사의하고 신성한 것으로 취급을 받았어. 신을 모시는 사제들에게 그것은 성물이었지. 그런데 그 성물은 인간들이 만들 수 없는 특별한 물건들의 재료가 될 수도 있어.”
도현의 계속되는 이야기에 무덤덤하던 칼라치의 표정도 서서히 바뀌었다.
“샤르비티의 갑옷이 그럼 신의 파편으로 만들어졌다는 건가?”
“그래, 벨라가 그 증인이야.”
도현은 벨라가 그에게 해 준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샤르비티는 오래전 자신의 영지를 벗어나 은밀히 여행을 떠났어. 그를 수행하던 자는 기사 몇과 벨라뿐이었지. 어느 날 그들은 폭풍이 치는 날씨 속에 깊은 산을 넘다가 우연히 고대 사원을 발견했어. 그 사원은 악령들이 들끓었지만 기사들의 희생 덕분에 샤르비티와 벨라는 무사히 사원의 중심부까지 진입할 수 있었지. 그곳에서 샤르비티는 여러 보물들을 얻었어. 그것들 중에는 악령에 의해 보호되던 신의 파편이 있었지. 그것도 두 개나.”
“그중 한 개는 붉은 성에서 네가 파괴한 것이고, 다른 하나가 갑옷을 제작하는 데 들어갔다는 것이군.”
칼라치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신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갑옷은 겉보기엔 평범한 상의처럼 보여서 평상시에 속옷처럼 안에 받쳐 입고 다녀도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더군. 하지만 착용자를 위협하는 공격을 스스로 방어하는 특별함이 숨어 있어. 샤르비티는 그 갑옷에 신의 갑옷이라는 명칭을 붙였고, 그 갑옷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지.”
“흥미로운 이야기군. 더구나 벨라가 그런 비밀을 말해 주다니. 하지만 어떤 갑옷도 내 방패를 막을 순 없다.”
칼라치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도현은 홀쭉하게 들어간 칼라치의 얼굴을 보며 차분히 말했다.
“붉은 성에서 경험한 신의 파편의 힘은 씨드를 얻은 나로서도 한동안 어쩌지 못할 만큼 대단했어. 당신이 전력을 다해도 신의 파편이 들어간 갑옷의 힘을 파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아니, 어쩌면 샤르비티의 갑옷을 뚫고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어.”
“날 무시하는 건가?”
칼라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무시해서가 아니야. 내가 경험한 일을 냉정히 말해 주는 거지.”
“그럼 어쩌자는 건가?”
“계획을 변경해야겠어. 내가 샤르비티와 사촌들 쪽을 맞지.”
“그럼 난? 휴반트를 맡아야 하나?”
“힘들겠지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율리비어스가 옆에서 당신을 도울 거야.”
“하하하!”
갑자기 칼라치가 집 안이 떠나가라 시원하게 웃어 댔다.
“그거 마음에 드는 얘기로군. 그놈과 싸우지 못해 원통했는데, 결국 이렇게 돼 버렸어.”
웃고 있는 칼라치를 보는 도현의 마음은 무거웠다.
“휴반트는 정말 강한 자다. 이건 객관적인 내 평가야. 당신이 잠시 실수라도 하는 순간, 그의 검은 냉정히 다가와 당신의 목숨을 취할 거야. 절대 방심하면 안 돼.”
“걱정할 필요 없다. 난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니까.”
도현은 칼라치가 걱정돼 여러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그의 자존심만 더 자극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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