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 디 임팩트 21권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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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와 리드만 사제는 10여 명 정도가 탈 수 있는 폭이 좁은 작은 배의 노를 저어 수로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들의 목적지는 광장 근처에 있는 수로의 한 지점으로, 일행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장소였다.
“사제님, 괜찮으세요?”
앞에서 노를 젓는 에드가 뒤에서 노를 젓는 리드만을 쳐다봤다.
멀리 있던 선착장에서부터 노를 저어 오느라 리드만 사제의 얼굴에 땀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는 힘든 기색 없이 답했다.
“몸을 움직이면 땀이 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
“숨소리가 거칠어지셨는데요?”
짓궂은 에드의 농담에 리드만 사제는 허허 웃으며 양손의 노를 힘주어 저었다.
배는 막힘없이 수로를 따라 북상했다.
“배들이 거의 다니지 않네요.”
사전에 이 수로를 조사했을 때는, 오가는 배들이 적지 않게 수로에 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몇 척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도시 광장에서 벌어지는 기념식 때문인 것 같았다.
수로에 배를 띄우는 건 대부분 도시 상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새로운 권력자인 샤르비티에게 잘 보이기 위해 휘하 상단 사람들을 광장에 몽땅 집합시켜 기념식이 더욱 성대하게 마무리되도록 돕고 있었다.
넓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수로를 따라 배를 몰던 에드는 귓가에 들리기 시작하는 어마어마한 함성 소리에 심장이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아직 광장과는 상당히 먼 수로였는데도 불구하고 광장 방향에서 몰려오는 함성 소리는 천지를 집어삼킬 만큼 대단했다.
“샤르비티의 군사들이 10만 명이나 모인다더니, 대단한 것 같습니다.”
에드가 느끼기에 저 함성 소리는 일반 군중이 아닌 병사들의 사기충천한 목소리였다.
북을 치듯 일정한 리듬에 맞춰서 들리는 저 함성 소리는 어떤 적이든 분쇄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깃들어 있어서, 듣는 사람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얼마 후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엔 노드빌 경의 부하 몇이 일반인으로 위장해 노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들 역시 탈출로는 수로였다.
도현과 노드빌은 서로 임무가 달라 각각 개별적으로 탈출하기로 되어 있었다.
사전에 안면을 텄던 에드는 노드빌의 부하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보내고는 그들을 지나쳐 배를 조금 더 위쪽에 댔다.
수로를 가로지르는 다리 근처였다.
“사제님, 광장이 어떤지 잠시만 보고 오겠습니다.”
“계속 그곳에 있으려는 건 아니겠지?”
리드만 사제가 소매로 땀을 훔치며 묻자, 에드는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그렇게 하고 싶지만, 제가 맡은 임무가 있잖아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배에서 내린 에드는 다리를 건너오는 인파 틈에 끼어 광장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광장에서 배를 댄 곳까지 오는 길은 모두 세 곳이야. 마차가 다니는 대로와 골목길 두 곳.’
광장으로 구경 가는 도시 주민들 틈에 끼어서 걷던 에드는 큰길에서 벗어나 작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늘이 진 골목길엔 중무장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에드는 괜히 위축된 표정을 만들며 고개를 숙이고 그들 앞을 통과했다.
모퉁이를 돌아 골목길이 끝나는 곳에 도착하자, 그곳에도 일단의 병사들이 오가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광장 주변에서부터 경계가 삼엄한데.’
광장으로 가는 골목길은 물론 대로엔 창검을 든 병사들이 쫙 깔려 있었다.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지나쳐 드디어 광장 서쪽에 도착한 에드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전율이 일었다.
은빛 갑옷을 입은 10만의 병사들이 광장에 도열한 채, 샤르비티에게 바치는 충성의 시를 반복해서 외우며 광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함성 소리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어.’
개미 떼처럼 많은 병사들이 목이 터져라 충성의 시를 외치는 모습은 광신도와 같았고, 그들의 기세는 광장 좌우에서 구경하는 군중을 압도해 그들의 얼굴을 새파랗게 질리게 만들었다.
도시 주민 태반은 샤르비티가 영지에서 데리고 온 직속 정예군의 진면목을 이 자리에서 처음 목격했는데, 그들의 맹목적인 충성심에 오금이 저려 왔다.
“우리는! 샤르비티 베일 님을 위해 결코 죽지 않는 병사가 되어! 적들의 눈과 혀를 뽑아! 훈장처럼 매달고 다니겠다!”
과격한 충성의 시가 절정에 달하며 광장에 모인 병사들의 사기는 광장을 넘어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생각보다 충성심이 더 대단해 보여. 저런 자들이 죽기 살기로 달려들면 정말 위험해지겠어.’
긴장된 표정의 에드는 광장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광장을 굽어볼 정도로 높고 거대한 제단엔 검은 복장을 한 샤르비티의 친위대들이 층층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10층 규모의 제단 꼭대기에 올라가기 위해선 층층이 지키고 있는 저 친위대들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그 수는 언뜻 보아도 수백을 넘어 천여 명도 더 되어 보였다.
‘아직 샤르비티는 오지 않았어.’
에드는 좀 더 가까이서 제단을 보기 위해 광장 서쪽에 모여 있는 수많은 인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스승님은 제단에 도착해 있을까?’
앞으로 갈수록 미리 와 있던 사람들이 에드를 사나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앞에서 구경하려면 일찍 오든가, 왜 비집고 들어오는 거야?”
“죄송해요. 앞에 일행이 있어서요, 헤헤.”
실없는 모습으로 위장해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던 그의 손목을 누군가 덥석 붙잡았다.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후드로 얼굴을 가린 짐브리오가 눈을 부라리며 작게 물었다. 살짝 당황한 에드는 그의 눈치를 봤다.
“아직 시간이 남은 것 같아서, 잠깐 구경 왔습니다. 이쪽 상황이 어떤지 대충이라도 알아야 저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배에서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핑계는. 따라와.”
짐브리오는 제단이 제법 가깝게 보이는 장소로 에드를 데리고 갔다.
그곳엔 어베인과 로나, 영주 딘이 일반 군중과 뒤섞여 있었다.
짐브리오가 에드를 데리고 오자,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주변에 워낙 사람이 밀집되어 있어서 말을 아낀 것이다.
‘저기 스승님이다’
에드는 제단 앞에 늘어서 있는 고위 관리들과 군 지휘관들 틈에서 도현을 발견했다.
도현은 로니올의 호위 무사로서 그를 호위하며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다.
한쪽엔 샤르비티의 사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뭔가 찜찜한 표정으로 수백에 달하는 부하들과 함께 서 있었다.
그들 모두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샤르비티를 제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구경 다 했지? 이제 그만 가.”
짐브리오는 에드의 한쪽 귀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아, 아, 아파요, 아저씨.”
“율리비어스가 물의 마법진을 발동하면 그쪽 수로에도 물이 넘칠 것 같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우릴 기다려라. 알겠냐?”
“알고 있습니다. 아저씨도 조심하세요, 다치지 않게.”
“여기서 어떻게 안 다치고 도현을 돕겠냐? 안 죽는 게 최선이다.”
짐브리오의 비장한 대답에 에드도 장난스러운 눈빛을 버렸다.
“기다릴게요.”
스승이 있는 쪽을 한번 쳐다본 에드는 자리를 벗어나다 칼라치와 마주쳤다.
‘머리카락을 다 잘랐어.’
눈에 띄는 적발을 싹둑 자른 칼라치는 어두운 기운을 풍기며 큰 키로 그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짧게 말하고 지나치려는 그의 팔을 칼라치가 붙들었다.
“에드, 이것 받아라.”
칼라치는 에드의 손에 둘둘만 작은 책자를 쥐여 줬다.
“이게 뭡니까?”
“광장을 벗어나면 펴 봐.”
칼라치는 그 말을 남기고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뒤를 마법사 이디언과 뚱뚱한 헬구스가 뒤따르고 있었다.
‘이게 뭐지?’
에드는 책자를 빨리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광장을 벗어났다.
“이건 방패술 아냐?”
뜻밖에도 작은 책자엔 방패를 이용한 전투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큰 방패와 작은 방패, 두 개의 방패로 전투하는 법, 검과 함께 사용하는 방패술 등 실전에서 터득한 칼라치만의 방패술이었다.
“이걸 왜 내게…….”
에드는 몸을 돌려 광장을 응시했다.
한때 다크캐슬에서 방패왕이라 불리던 칼라치에게 매료돼 그의 방패술을 배우고 싶어 했던 에드였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도현을 스승으로 모신 이후, 검에 푹 빠져서 살고 있는 그다.
‘설마 내가 익히라고 준 건가? 아냐, 혹시 그가 잘못되면 다른 사람에게 그의 방패술을 전수해 달라는 뜻일지도 몰라.’
정확한 진위는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미 그는 수많은 인파들 속으로 사라져 찾을 수가 없었다.
‘뭔가 크게 결의를 다진 것 같았어.’
적발을 자른 대머리 칼라치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사실 조금 전엔 죽음조차 초월한 듯한 강한 그의 인상에 에드는 숨이 막혀 왔었다.
‘살아서 꼭 내 배에 오십시오. 이 책자를 준 의도를, 난 바보라서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약간 감상에 젖은 눈빛으로 광장을 응시하던 에드는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작은 기운에 흠칫하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가 있던 자리에 한 줄기 물이 떨어졌다.
고개를 든 에드는 높은 건물 창가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리타를 발견했다.
그녀가 위에서 물을 쏟은 게 틀림없었다.
올라오라는 손짓을 본 에드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옆으로 난 건물의 입구를 통해 꼭대기 층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리타가 열어 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에드는 바닥은 물론 벽과 천장까지 그려진 복잡하고 화려한 수십 개의 마법진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것들은 윙윙 소리를 내며 제각각 설치된 자리에서 회전을 하며 빛을 내고 있었다.
율리비어스가 만들었다는 마법진에 대해 막상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마법진을 관리하던 리타가 땅콩을 먹으며 물었다.
“광장 구경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에요. 그런데 생각보다 적들의 위용이 대단해요.”
“나도 조금은 놀랐어.”
리타는 창문을 통해 광장의 모습을 내려다봤다.
은빛 갑옷을 입은 10만 병사들이 광신도들처럼 계속 충성의 시를 외치고 있었다.
“대체 샤르비티가 뭐라고 저러는 건지. 자기들 목숨이나 챙기지.”
냉소적으로 말을 한 그녀는 손에 든 땅콩을 내밀었다.
“먹을래? 오다가 산 건데, 맛있어.”
에드는 땅콩을 받아 한입에 털어 넣었다.
“하나씩 먹어야 더 맛있는데, 바보. 그런데 아까 뭘 읽고 있었던 거야?”
“아, 그거요.”
에드는 칼라치가 준 책자 얘기를 했다.
가만히 얘기를 들은 그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칼라치가 널 좋게 봤나 보다, 그런 걸 맡길 정도면.”
“그는 오늘 괜찮을까요?”
“글쎄, 그걸 어떻게 알겠어. 지켜봐야지.”
그녀는 벽에 그려진 마법진 한 곳에 마나를 주입했다. 회전하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이와 똑같은 마법진의 방을 멀리 광장 맞은편에서 율리비어스가 관리하고 있었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수십 개의 마법진들을 넋을 놓고 구경하던 에드는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그만 가 볼게요. 배에서 꼭 봐요.”
“호호호, 당연하지. 걱정 말라고.”
그녀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귀엽게 깔깔거리다가 에드가 문을 닫고 사라지자 웃음이 점점 옅어져 갔다.
그녀는 창가에서 광장을 보며 말했다.
“스승님, 우리 잘되겠죠?”
그녀의 걱정 섞인 질문에 자수정 속 락제프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잘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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