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디 임팩트 21권 18화
* * *
상인 포만드는 제단이 정면으로 보이는 좋은 자리에 수십 명의 상인들과 함께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돌로 된 거대한 제단을 만드는 데 상당한 기부를 한 자들로, 이번 전쟁에 각종 물품을 팔아서 큰돈을 벌고 있었다.
‘알믄 녀석이 죽으니까, 살 것 같군.’
포만드는 좌우로 고개를 돌려 주변 상인들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이놈들보다 내가 먼저 손을 써야 하는데…….’
알믄이 죽으면서 그의 대상단은 여러 조각으로 나뉘었는데, 그가 차지할 건더기들이 제법 알찼다.
문제는 경쟁자들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상인들 대부분이 베일 가문이 통치하는 광대한 영지에서 대대로 상인만 해 온 집안의 후손들이다.
알믄의 뒤를 이어 대상인이라는 칭호를 얻으려는 데 혈안이 된 자들이라서 그들과 경쟁하는 게 쉽지 않다.
‘이 빌어먹을 자식들도 한꺼번에 싹 뒈졌으면 좋겠군.’
뒷골목 노예 출신 상인이라는 은근한 따돌림은 알믄이 죽어도 여전했다.
그와는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상인들의 모습에 포만드는 불편한 마음이었다.
‘그나저나 분위기가 소름 끼칠 정도야.’
뒤에서 연신 들리는 병사들의 충성의 시는 듣기 거북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붉은 성의 대공도 끝나는 거겠지. 샤르비티가 살아 있는 한, 저 병사들은 붉은 성을 함락시킬 게 분명해. 로니올 저 녀석만 어떻게 잘해 주면 정말 좋겠는데…….’
포만드는 제단 앞에서 아버지가 오기를 기다리는 로니올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는 통이 넓은 흰색 의상에 황금 요대를 걸친 모습이었다.
‘로니올이 대공만 되면 나의 앞은 탄탄대로가 될 거야. 대상인은 물론 영주가 되어서 베일 가문의 한 기둥이 되는 거지. 또 아나, 내가 대공이 될지.’
흐뭇한 상상을 하던 그는 로니올의 곁에 서 있는 도현과 우연히 시선이 마주쳤다.
‘무슨 놈의 시선이 저리 차갑지. 오늘은 유독 더 차가운 것 같군.’
그는 얼른 시선을 돌려 샤르비티의 사촌들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너희들의 운명은 오늘로서 끝이다. 불안했으면 오면 안 되는 것이거늘.’
기념일을 앞두고 연달아 세 명의 사촌들이 반역죄로 죽자, 남은 열 명의 사촌들은 기념식을 참석하지 않고 자기들의 본거지로 돌아갈 것인지를 두고 내부적으로 갈등을 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한 명도 빠짐없이 기념식장에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보는 포만드는 앞으로 벌어질 참극에 그저 속으로 그들을 비웃을 뿐이다. 그는 샤르비티가 저들을 죽일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다행이야, 보게슨과 마리지스는 내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어.’
기념일 내내 불안했던 그는 그들이 죽은 지 여러 날이 흐르도록 자신의 일신에 아무런 문제도 벌어지지 않자, 밤잠을 편히 잘 수 있게 됐다.
‘한데 알믄은 정말 자살한 걸까?’
수상한 구석이 많은 그의 죽음을 생각하던 그는 샤르비티의 출현을 알리는 요란한 나팔 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왔군.’
로니올을 호위해 조용히 뒤에 서 있던 도현의 눈빛이 순간 강렬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수백의 친위대들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샤르비티가 광장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친위대장 유베린을 비롯해 친위대 소속의 마법사들과 지휘관급 강자들이 수두룩했다.
얼마 전에 부상을 입은 나부탄도 이제 몸이 회복됐는지 창을 들고 친위대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위풍당당하게 걷고 있었다.
‘이상하군, 그가 보이지 않는다.’
샤르비티와 함께 오리라고 예상됐던 철가면 휴반트가 보이지 않았다.
도현은 가까이 오는 저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봤다.
철가면 휴반트가 혹시 투구를 썼나 싶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저들 중 어느 누구도 휴반트와 비슷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이 중요한 의식에 그가 나타나지 않다니?’
도현은 슬며시 뒤를 돌아봤다.
미리 제단에 배치돼 경비를 서고 있는 천여 명이 넘는 친위대들이 보였다.
휴반트는 저들 중에도 없었다.
‘내가 뭘 잘못 알고 있었던 걸까? 샤르비티의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혼란스러웠지만 그는 마음을 정리했다.
그가 없다면 한결 부담감 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샤르비티가 광장에 나타나자 병사들이 외치는 충성의 시는 더욱 커져 옆에서 말하는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됐다.
“어때, 로이, 대단하지?”
로니올은 뿌듯한 표정으로 어깨에 힘을 줬다.
“매년 기념식을 해 왔지만 오늘과 같은 열광적인 광경은 처음이야. 기념식은 귀찮지만, 이런 건 좋다니까.”
“제 눈에도 대단해 보입니다.”
광장을 가득 메운 병사들의 눈 속엔 집단적인 광기도 엿보였다.
‘무엇이 저들을 이렇게 만들고 있는 걸까?’
도현은 상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샤르비티의 뒷모습을 보며 눈빛이 깊어졌다.
심계가 깊고, 부하들을 휘어잡아 충성심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닌 남자.
대단한 자이긴 했다.
“어, 아버지가 저쪽으로 가시네.”
로니올은 고위 관리와 군 지휘관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 아니라 상인들에게 먼저 향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허둥대며 뛰어갔다.
도현도 따라갔지만, 샤르비티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제지당했다.
“그만, 당신은 거기에.”
샤르비티를 감싸는 친위대에 막힌 도현은 뒤로 물러났다. 로니올의 호위였지만 일정 범위 안으로 들어설 수는 없었다.
“로이, 그냥 거기 있어.”
로니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짓을 하고는 상인들의 인사를 받고 있는 아버지 곁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샤르비티는 상인 대표 몇 명에게 아부에 찬 인사를 받으며 막 뒤돌아서려고 했다.
“아버지, 제가 소개시켜 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샤르비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 아닙니다, 아버지.”
감히 아버지의 발걸음을 막아섰다는 부담감에 순간 주눅이 든 로니올은 당황했다.
아들을 무심히 지나쳐 가려던 샤르비티는 중요한 의식을 앞두고 아들을 홀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례적으로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줬다.
“그가 누구냐?”
아버지가 관심을 갖자 얼굴이 밝아진 로니올은 존재감 없이 서 있던 포만드를 불러냈다.
“포만드, 어서 오너라!”
“예!”
혹시나 싶어서 관심 깊게 쳐다보고 있던 포만드는 기뻐하며 달려와 그대로 샤르비티 앞에 엎드렸다.
“미천한 상인 포만드, 대공을 뵈옵니다!”
대공으로 아직 즉위도 안 한 샤르비티에게 대공이라며 아부를 하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포만드의 지나친 굽실거림에 주변 상인들은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샤르비티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모습에 그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베일 가문에 대공은 오직 한 명이다. 붉은 성에 그가 아직 살아 있는데, 어찌 내가 대공이라 불리겠느냐?”
샤르비티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던 포만드가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성을 버리고 도망간 자가 어찌 대공이겠습니까! 그는 껍데기 같은 자입니다.”
“말이 지나치구나. 그래도 그는 베일가의 큰사람이다. 존중을 보여라.”
가볍게 포만드를 훈계한 샤르비티는 포만드를 일으켜 세웠다.
“울고 있는 것이냐?”
“저는 노예 검투사 출신의 상인입니다. 제가 감히 이 자리에 있다는 게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만…….”
포만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커다란 눈물을 뚝뚝 흘려 댔다.
“난 노력하는 자를 좋아한다. 앞으로 널 기억하겠다.”
“감사합니다, 대공!”
기쁜 얼굴의 포만드는 자신을 무시했던 상인들에게 보란 듯이 미소를 보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저놈을 멀리해라. 득이 될 게 없는 놈이다.”
웃으면서 자신의 귀에 말하는 아버지의 차가운 목소리에 로니올은 솜털이 곤두설 뻔했다.
“하지만 그는 제게…….”
“멍청한 녀석, 사람 보는 눈이 그리 없다니.”
아들을 지나친 샤르비티는 제단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고위 관리와 군 지휘관 들을 향해 걸어갔다.
도현은 한쪽에서 고개를 숙이며 묵묵히 서 있었다.
“젠장, 포만드가 어때서. 자기 사람인가, 내 사람이지.”
투덜거리며 도현에게 다가온 로니올은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가 내게 잘해 줬다면 포만드보다 나은 녀석들이 몰려들었을 거 아니야. 인정을 안 해 주니까, 내가 이 모양 이 꼴이지.”
“…….”
“로이,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마차가 한 대 들어오고 있습니다.”
도현의 말에 로니올은 뒤로 고개를 돌렸다.
기병들에 둘러싸인 마차가 제단 앞 광장에 마련된 단두대를 향하고 있었다.
저 단두대는 대공의 자식들을 처형하기 위해 아침에 설치된 것이다.
히히히힝!
기병들은 마차가 단두대 앞에 도착하자 말 머리를 돌려 광장을 벗어났고, 복면을 한 자들이 마차 안에서 젊은 남녀들을 끌어냈다.
수갑과 족쇄가 채워진 2남 1녀는 대공의 자식들로 심한 고초를 당했는지 머리가 산발이 되고 옷은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대공의 딸은 그 미모가 우월하여 주위 일대를 환하게 밝혔다.
그 아름다움에 잠시 취한 로니올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봤나, 로이, 저 여자를 단두대로 보내야 하다니.”
도현은 대공 부인을 어딘지 닮은 대공의 딸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공의 두 아들은 로니올과 비슷한 또래들로, 광장을 가득 뒤덮은 샤르비티의 병사들을 보며 분노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두려움이 없군.’
이때 광장에 모인 군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단두대 앞에 대공의 자식들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앞으로 벌어질 끔찍한 일이 그들에게 전달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중들의 술렁임은 광장에 도열한 10만 병사의 광기에 금방 사그라졌고, 오히려 일부는 지체 높은 대공의 자식들이 단두대에서 죽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묘한 쾌감에 들떠 짐승 같은 고함 소리를 내기도 했다.
“와아! 죽여라!”
“저들을 죽여라!”
흥분에 찬 군중의 목소리와 광기에 찬 병사들의 충성의 시가 합해지며 광장 분위기는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샤르비티는 사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 모습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기념식이 될 것 같군.”
“공개된 자리에서 대공의 자식들을 죽이는 것은 이웃 영주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행동입니다. 차라리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조용히 처리하시지요.”
“손가락질?”
샤르비티의 표정이 싸늘해지자, 말을 꺼낸 사촌은 그의 시선을 슬며시 피하면서도 끝까지 자기 할 말을 다 했다.
“저들의 죽음을 이용해 붉은 성의 대공을 자극하자는 것은 제가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하던 바입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저런 모욕적인 방법으로 죽여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껏 베일 가문의 혈육 중 저런 식으로 공개 처형된 예는 없습니다. 수백 년을 이어 온 우리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재고해 주십시오.”
“가문의 명예라. 경의 말대로라면 난 대공의 자리를 넘봐서도 안 되었겠지. 수백 년간 이어 온 장자 계승의 전통을 깬 내가 가문의 죄인 중에 죄인이 아니던가?”
“그런 뜻이 아니오라…….”
“그런 뜻이 아니면 무엇인가? 혹, 세 명의 사촌들을 반역죄로 다스린 것이 못내 불만스러워 참고 참다가 내게 쓴소리라도 한마디 내뱉고 싶었던 것인가?”
샤르비티의 감정 없는 눈빛에 놀란 사촌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뒤에 그가 데리고 온 수십 명의 호위 무사들이 존재했지만, 10만 정병과 수천에 달하는 친위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미미한 힘이었다.
“오, 오해이십니다.”
괜한 말을 꺼냈다 싶은 사촌은 주위에 서 있는 다른 사촌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그들은 모두 외면했다.
기념일을 앞두고 세 명이나 반역죄로 죽여 버린 샤르비티의 단호함에 모두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검을 다오.”
샤르비티가 손을 내밀자 그의 검을 들고 있던 친위대 지휘관급 장수가 공손히 검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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