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519화 (519/575)

[519] 디 임팩트 21권 19화

스르릉.

붉은 빛깔의 검신을 자랑하는 명검 아비엘쥬가 뽑히자 서늘한 기운이 사방에 뻗쳤다.

“이 검은 돌아가신 내 부친이 사용하시던 것이다. 이 검에 난 맹세를 했다. 알조베티를 몰아내고 내가 대공이 되겠다고. 그런데 경은 알량한 가문의 명예를 언급하며 이 자리에서 날 가르치려 하는군. 그것도 감히, 돌아가신 내 부친을 추모하는 기념식장에서 말이야!”

샤르비티가 직접 검을 든 모습을 사촌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검을 뽑아 들었으니, 사촌들이 받는 압박감은 상당했다.

“저 소리가 들리는가? 내 병사들이 내게 바치는 충성의 목소리 말이야.”

휘이이잉.

샤르비티가 부친의 검인 명검 아비엘쥬를 슬쩍 휘두르자 붉은 검광이 공개 처형을 반대하는 사촌의 목을 소리 없이 갈랐다.

머리를 잃은 몸이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영주님!”

죽은 영주의 호위 무사들이 앞다투어 검을 뽑으며 샤르비티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샤르비티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친위대에 의해 눈 깜짝할 사이에 도륙을 당하고 말았다.

샤르비티를 근접에서 지키는 친위대들은 친위대 중에서도 정예들로 그 한 명 한 명이 뛰어난 강자로 손색이 없었다.

“어, 어찌 이런 일을…….”

설마 진짜 죽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주변의 사촌들은 경악을 하며 일제히 그들이 데리고 온 부하들 틈으로 몸을 숨겼다.

그들도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이다.

사촌들은 개개인이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천 명 가까운 병력을 이끌고 베일성에 왔지만 광장엔 수십 명씩밖에 데리고 오지 못했다.

다 합해 봐야 불과 수백여 명.

절대적인 열세였다.

“왜들 숨어 있는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든 샤르비티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

“이 무슨 짓입니까! 사소한 일로 한 형제와 같은 사촌을 죽이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소!”

부하들 틈에 숨어 있던 사촌 중 한 명이 분함을 담아 외쳤다.

“사소한 일이라. 너희들도 목이 달아나야 제정신을 차리겠군. 반역자들을 모두 주살하라.”

샤르비티는 냉정히 말하며 뒤돌아섰다.

원래 계획은 제단의 의식이 모두 끝나고 저들을 죽이려 했는데, 입바른 말을 하는 사촌 한 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금 손을 쓰게 된 것이다.

폭풍같이 밀어 쳐 오는 강력한 친위대의 힘에 사촌들과 그 수하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차례로 싸늘한 시신이 되어 갔다.

“죽여라! 적의 눈과 혀를 뽑아라!”

광장에 도열한 병사들은 친위대가 제단 앞에서 수백 명을 죽이는 모습을 보며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

“아버지가 숙부들을 다 죽여 버리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로니올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놀라다가 나중에는 크게 기뻐했다.

저들 중에는 그의 이복동생을 지지하는 세력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잘됐어. 아버지의 뒤를 이을 자는 결국 나밖에 없는 거야.”

도현은 로니올의 들뜬 음성을 귓등으로 흘려보내며 시신으로 변한 샤르비티의 사촌들을 깊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과감하군. 남의 시선 따윈 안중에도 없어. 그만한 자신감이 있다는 거겠지.’

수많은 군중이 광장 동쪽과 서쪽에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샤르비티는 망설임 없이 그를 지지해 오던 사촌들을 숙청해 버렸다.

웃으면서 광장에 들어와 사촌들의 목숨을 취하는 잔인성을 보여 준 것이다.

저들을 죽인 이유가 있겠지만 도현에겐 중요치 않았다.

‘남은 건 당신뿐이로군, 샤르비티.’

목표가 하나로 좁혀지자 도현의 마음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피비린내가 나는 수백의 시신을 그대로 방치한 채 샤르비티는 장자인 로니올을 데리고 계단을 밟아 10층 높이의 제단 정상을 향해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광장 바닥에서 제단 정상부까지 연결된 계단은 수백 개로, 그 길은 수많은 친위대가 지키고 있었다.

“더 이상은 못 간다. 여기서 기다려.”

원형 경기장 지하 감옥을 지키던 친위대 지휘관 나부탄이 창을 들고 도현의 앞을 막아섰다.

도현은 제단의 중간 위치에 해당하는 5층 정도 높이에서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로니올 님은 자신과 가까운 곳에 내가 있기를 바라오.”

“명령이다. 올라가면 죽여 버리겠다.”

차가운 그의 음성에 도현은 별수 없이 제단 5층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여기서 정상부까지는 대략 20미터 정도 되려나?’

일반인에게는 시간이 걸릴 만한 거리였지만 도현에게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문제는 그 중간에 얼마나 많은 적들과 상대하며 샤르비티에게 접근할 수 있는가였다.

“사랑하는 나의 병사들이여!”

스피커를 연결해 놓은 듯한 웅혼한 샤르비티의 목소리가 정상부에서 흘러나와 광장 전체로 퍼져 가기 시작했다.

‘정말 많군.’

제단 중간 높이에서 광장을 내려다보니 새삼 10만 명이라는 병사들의 수가 체감이 됐다.

‘율리비어스, 당신 마법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면, 이 제단은 몰려드는 저들로 인해 평지처럼 변해 버릴 거야.’

도현은 샤르비티의 힘이 넘치는 연설을 들으며 조용히 염소의 배를 가르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

그 시점이 바로 율리비어스가 물의 마법을 펼치는 순간이자, 그가 샤르비티를 공격하는 순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단에서

해가 기울며 광장에 제단의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다.

곧 노을이 지고 어둠이 찾아오려 하건만, 샤르비티의 연설은 몇 시간째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긴 연설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치게 하고 집중력을 잃게 하지만, 오히려 샤르비티의 연설은 길어질수록 병사들의 마음을 훔치고 있었다.

영혼이 빨려 들게 하는 힘 있는 웅변과 가식 없어 보이는 그의 말투는 병사들이 누굴 위해 싸워야 하는지 명확히 인식시켜 주고 있었다.

“나를 보라! 나는 힘 하나들이지 않고 편안히 앉아서 대공의 자리를 계승한 알조베티 베일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너희처럼 검 한 자루를 들고 전선에서 피를 흘리며 싸웠다! 너희와 같은 군막을 사용하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이 아파하며 동지애를 느꼈다! 수염도 없는 열다섯 나이에 말이다!”

광장을 내려다보는 샤르비티의 두 눈은 청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누가 감히 내 앞에서 권력만을 노리는 자라고 평하겠는가! 나야말로 수백 년간 나태하게 지내온 베일 가문의 썩어 빠진 자들을 도려내고 새 시대를 열 적임자가 아닌가!”

“샤르비티 님, 만세!”

“와아아아!”

병사들의 환호가 이어지자 샤르비티는 잠시 말을 멈추고 광장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부친의 소원은 오직 하나였다! 능력 있는 자가 베일 가문을 올바로 다스리는 것! 과연 누가 베일 가문의 대공이 되어야 하겠는가! 힘없이 붉은 성으로 도망친 알조베티인가 아니면 여기 너희들 앞에 서 있는 나인가!”

병사들은 발을 구르며 샤르비티를 연호했다.

“샤르비티! 샤르비티! 샤르비티!”

구경하던 군중 일부도 병사들처럼 발을 구르며 샤르비티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나는 오늘 감개무량하다. 대공의 성에서, 바로 너희들과 함께 내 부친을 추모할 수 있는 이 소중한 시간을 가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추모만으로는 안 된다. 아직 우리에겐 남은 과업이 있다! 붉은 성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알조베티와 그 일당을 죽이는 것이다!”

“와아아아!”

“사자와 같은 용감한 기상을 가진 나의 병사들이여! 나를 따라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

“샤르비티! 샤르비티! 샤르비티!”

“목숨을 바쳐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

“샤르비티! 샤르비티! 샤르비티!”

광장에 모인 병사들의 사기는 이미 하늘에 닿아 있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샤르비티는 가슴 벅찬 뿌듯함을 느꼈다.

질 좋은 은빛 갑옷을 입은 용맹스러운 저 병사들을 만들기 위해 수십 년을 준비해 왔다.

“제물을 준비해라.”

연설을 마친 샤르비티가 수하들에게 명하자 다리가 묶인 살아 있는 염소 한 마리가 곧바로 준비됐다.

염소를 죽여 광장에 모인 병사들을 축복하면 6일간 지속된 기념일이 마침내 끝이 난다.

“염소를 들어라.”

“예, 아버지.”

로니올은 몸부림치는 염소를 양손으로 들어 머리 위로 올렸다.

두려움에 쌓인 염소가 오줌을 싸서 그의 얼굴에 흘러내렸지만 로니올은 의식 중이라 염소를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꾹 참고 광장에 도열한 병사들이 잘 볼 수 있게 제단 끝으로 이동했다.

바람도 셌고, 자칫하면 낭떠러지 같은 밑으로 떨어져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위치였다.

제단에서 병사들을 굽어보던 샤르비티는 의식용으로 마련한 뾰족한 돌 조각을 이용해 염소의 배를 망설임 없이 베었다.

물컹거리는 핏덩이들이 후드득 소리를 내며 밑으로 쏟아졌다.

염소의 배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샤르비티는 내장을 꺼낸 다음 그것을 수십 미터 제단 아래로 던지며 외쳤다.

“염소의 죽음이 너희들을 한 번은 구해 줄 것이다!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축복하겠다!”

그가 병사들을 축복하는 순간, 천둥 치는 소리가 나며 광장 좌우에서 푸른 빛의 기둥이 날아왔다.

콰콰쾅.

광장 상공에서 충돌한 두 개의 빛기둥은 수백 가닥으로 다시 나뉘며 제단을 포위하듯 연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쿠웅! 쿠웅! 쿠웅! 쿠웅!

푸른 빛기둥이 땅에 떨어질 때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거대한 물줄기들이 수십 미터씩 치솟아 올랐다.

마치 지하에 있는 호수의 물이 한꺼번에 터져 지상으로 분출하는 것과 같은 장대하면서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물이 밀려온다! 피해라!”

삽시간에 불어난 거대한 물이 광장 사방으로 폭풍처럼 밀어닥쳤다.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빽빽이 자리 잡고 있던 광장의 병사들은 피할 틈도 없이 거센 물살을 견디지 못하고 태반이 떠내려갔고, 광장 주변에서 구경을 하던 군중들은 두려운 얼굴로 광장을 넘어 도시 전체로 퍼지는 물을 피해 있는 힘껏 도망을 쳤다.

“누가 감히!”

이 모든 모습을 제단 정상에서 내려다보던 샤르비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성대한 기념식으로 한껏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놨는데, 마법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인해 모든 게 엉망이 되고 있었다.

“심상치 않습니다. 일단 자리를 피하시지요.”

친위대장 유베린의 조언에도 샤르비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기다리겠다. 어느 놈들이 이따위 수작을 부렸는지 기다리다 보면 나타나겠지.”

샤르비티는 부친의 검인 명검 아비엘쥬를 뽑아 들고 밑을 응시했다.

친위대들을 허수아비처럼 베어 내며 빠르게 위로 올라오고 있는 자가 있었다.

“아니, 저자는!”

로니올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놀랍게도 친위대 소속의 마법사들과 지휘관급 장수들을 거침없이 베며 올라오는 자는 그가 그토록 아끼던 악마 사냥꾼 로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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