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 디 임팩트 22권 1화
돌고래
존경하는 어머니, 아버지, 잘 지내고 계시죠? 편지라는 걸 난생처음 쓰는 거라서 어딘지 어색합니다. 전 지금 배에서 글을 써요. 배가 흔들려서 글씨가 이상하지만, 그래도 이 편지가 반가우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스승님과 함께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에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것은 저를 분명히 강하게 단련시켜 주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편지를 쓰던 에드는 배가 심하게 흔들리자 잠시 편지 쓰는 걸 중단하고 옆을 돌아봤다.
낡은 나무 침상에 누워 있는 그의 스승이 보였다.
배를 타고 베일성을 떠난 지 이틀이 다 되었지만, 그의 스승은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영주 딘은 폭주의 후유증이 스승을 일시적으로 깊은 잠에 빠트린 것 같다고 하며 크게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조금은 걱정이 됐다.
에드는 다시 고개를 숙여 편지를 써 갔다.
마을 재건은 잘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승님과 친분이 있는 그 용병들이 약속대로 잘해 주었겠죠? 토밀은 어때요? 여전히 밝고 활기찹니까? 리샤와 쿠린은요? 다들 보고 싶습니다. 이런 제 마음을 편지에 다 담지 못하지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건강하세요.
“아, 힘드네.”
태어나 처음으로 편지라는 걸 써 본 에드는 마치 큰 전투를 벌인 사람처럼 녹초가 되어 있었다.
“역시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야. 나는 검이 어울려.”
“영주가 되려면 글 한 줄로 상대방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거나 마음을 훔칠 줄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글 쓰는 재주를 포기해서는 안 되지.”
“영주님.”
선실에 들어온 영주 딘을 보며 에드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딘은 천천히 걸어와 등불이 밝히고 있는 탁자에 손을 뻗었다. 그곳엔 에드가 힘들여 쓴 편지가 놓여 있었다.
“봐도 될까?”
“별 내용 없는 글인데요.”
에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알아보기 힘든 글씨체로 쓴 자신의 편지를 읽는 딘을 힐끔거렸다.
‘영주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영주가 되려면 이라니. 내가 영주라도 된단 말인가? 말도 안 되지.’
에드는 조금 전 딘이 한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흠, 모처럼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인데 이렇게 짧게 쓰면 섭섭하시겠어. 조금 더 살을 붙이는 게 좋겠다. 예를 들면 훌륭한 영주 딘에 관한 설명이라든가 말이야.”
“예? 영주님에 관해서요?”
“하하하! 아니다, 아니야.”
가볍게 농담을 한 딘은 편지를 돌려줬다.
“잘 썼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쑥스러운 표정으로 편지를 접어 품에 넣는 에드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딘은 몸을 돌려 도현의 몸 상태를 살폈다.
신의 갑옷으로 무장한 샤르비티와 사납게 치고받고 싸웠지만 겉으로 보이는 특별한 외상은 없었다.
순수한 폭주의 힘이라기보다는 도현이 이미 높은 수준의 강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폭주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도현은 샤르비티를 좀 더 빠르고 간결하게 처리했을지도 모른다.
폭주는 명백히 도현의 앞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 것이다.
“스승님은 왜 제단에서 폭주를 하신 걸 까요.”
에드가 조심스럽게 묻자, 딘은 양 갈래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깨어나면 물어보도록 하자. 그렇게 강한 사람이 눈 깜짝할 사이에 폭주했다는 건 그만한 위협이 있었다는 뜻인데, 현재로선 짐작하기 어렵다.”
유베린 때문에 폭주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에겐 그 장소에서 최강자인 도현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폭주했다는 게 여전히 의아한 일이었다.
“폭주한 스승님은 정말 무서웠습니다. 눈앞에서 그 붉은 눈동자로 노려보시는데, 온 몸의 힘이 쫙 빠져 버렸으니까요.”
“스승을 구한 건 너다. 넌 충분히 용감했어.”
“아닙니다. 스승님을 구한 건, 제가 아닌 저 멀리 지구라는 곳에 계신 홍영이란 분입니다. 그분이야말로 스승님을 구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이 많다. 영주가 말을 하면 넌 그냥 ‘네’ 하면서 따르는 것이야.”
헛기침을 하며 뒷짐을 진 그에게 에드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영주님.”
딘이 선실을 나가자 에드는 자리에 앉아 편지를 수정했다. 딘의 말대로 편지를 조금 더 길게 써 내려갔다. 그 내용 중에는 딘을 소개하는 글도 있었다.
그가 막 편지를 마무리할 때쯤, 문을 열며 짐브리오가 들어왔다.
“야, 밥 먹어라. 리타가 생선 요리를 아주 맛있게 했어.”
“네, 아저씨.”
이들은 도현이 누워 있는 선실을 교대로 지키고 있었다. 별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많이 먹어. 갑판에 올라가서 바람도 좀 쐬고. 아주 선실에서 썩은 냄새가 나. 이놈들이 어찌나 배 관리를 안 했는지 말이야.”
“선장 앞에서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당연히 안 하지, 흐흐. 어서 가 봐.”
“네.”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는 건너편 선실로 향했다.
에드가 나가자 짐브리오는 딱딱한 나무 침상에 죽은 듯 누워 있는 도현에게 시선을 두었다.
“대체 이 녀석은 왜 안 깨어나는 거야, 걱정되게.”
그는 침상에 다가가 도현을 위에서 내려다봤다.
“너 괜찮은 거지?”
* * *
도현은 샘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만져 보았다. 팽팽했던 피부는 주름이 졌고, 눈가엔 세월의 깊이가 더해져 있다.
‘이건 환상이다. 난 늙지 않았어. 조금 전까지 싸우다 정신을 잃었을 뿐이야.’
샤르비티를 죽이고 휴반트와 싸우던 것도 모두 기억이 났다.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를 죽이려던 그 순간까지.
샘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노려보던 도현은 허리를 펴고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울창한 원시림의 어둠과 음습함이 그를 맞이하고 있다. 환상이라고 치부하기엔 피부에 느껴지는 생생함이 당혹스럽다.
‘대체 이곳은 어디지?’
환상이나 꿈속이라고 무시하면 좋겠지만 날이 저물고 추위가 몰려오자 도현은 생존 본능에 따라 추위를 피하기 위해 몸에 걸칠만 한 것을 찾아다녔다.
놀랍게도 그는 벌거숭이였고, 폭주의 후유증을 앓는 사람처럼 내상이 심했다.
내공을 끌어 올리려다 목에서 피를 토한 도현은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육체적인 능력만으로 커다란 곰을 한 마리 사냥해 그 가죽을 벗겼다.
‘타투도 사라졌어.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게 좋을까?’
현실일 리 없다고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렸지만 곰의 피를 밟고 서 있는 그의 육신은 이것이 현실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도리어 그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설마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 온 걸까?’
사라진 타투와 연계해 깊은 고민을 하던 도현은 곰 가죽이 몸에서 흘러내리지 않게 나무 넝쿨로 단단히 고정했다.
‘일단 이곳을 조사해 보자.’
어설프지만 짐승의 가죽으로 신발까지 만든 도현은 어둠 속에서 원시림을 돌아다녔다.
도중에 늑대와 표범 같은 야수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도현은 지팡이처럼 들고 다니는 길쭉한 몽둥이로 그들을 쫓아 버렸고 끝까지 덤비는 녀석들에겐 최후를 선사했다.
퍼억!
두개골이 조각난 커다란 회색 늑대가 저만치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내상 때문에 내공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도현의 검술은 여전히 유효했고, 그 검술을 뒷받침해 줄 근력도 그에게는 넘쳐 났다.
평소에 기본적인 것에 충실했던 도현은 순수한 육체적 힘만으로도 이미 범인의 경지를 뛰어넘은 상태였다.
‘이쯤에서 주변을 다시 확인해 보자.’
수십 미터 높이의 나무를 타고 올라간 도현은 나무 꼭대기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원시림을 높은 산들이 감싸고 있다. 이 산을 넘어가면 바깥세상이 나올 거야.’
밝은 달빛이 쏟아지는 원시림에서 방향을 잡아 가며 밤새워 걷던 도현은 날이 샐 무렵 원시림을 감싼 산자락에 도착했고, 한동안 휴식을 취한 뒤 등반을 시작했다.
까마득한 높이의 거대한 산은 황량함이 묻어나는 척박한 공간이었다. 나무도 풀도 짐승도 없었다.
그저 매서운 찬 바람만이 도현의 등반을 방해할 뿐이다.
묵묵히 급경사를 이루는 절벽을 맨손으로 기어오르던 도현은 숨을 돌리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얼마나 높이 올라왔는지 아래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가죽 주머니에 담은 물로 입을 적시던 도현은 얼굴에 와 닿는 차가운 감촉에 흠칫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뜻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순식간에 함박눈으로 변했고, 그것은 다시 바람을 타며 눈보라를 만들었다.
‘서두르자.’
눈보라가 갈수록 심해질 조짐이었다.
눈보라를 뚫으며 등반하는 도현은 흡사 이곳이 히말라야의 어느 산봉우리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산은 오르기 험준했고, 추위도 심했다.
‘정말 이곳이 다른 세상이라면 어쩌지?’
도현은 콧등을 할퀴고 가는 칼바람을 맞으며 제발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꿈이기를 바랐다.
그 순간, 갑자기 절벽에서 손을 놓으면 꿈에서 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야릇한 유혹이 덮쳐왔다.
키 크는 꿈이라며 아버지가 웃으며 말하실 것만 같았다.
절벽을 오르는 도현의 손힘이 저도 모르게 느슨해졌고, 때맞춰 산이 진동하며 그를 절벽에서 떨어트리려 했다.
쿠쿠쿵!
밑으로 주르륵 떨어져 내려가던 도현은 황급히 손에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암석에 손가락이 갈기갈기 찢겼고, 도현은 그 고통을 참으며 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수십 미터를 내려간 도현의 몸이 어느 순간 크게 반동을 하며 멈췄다.
붉게 변한 손을 보며 도현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정신 차려라, 백도현!’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린 도현은 이를 악물고 다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모든 건 이유가 있을 거야, 내가 처한 이 상황도.’
마음을 정리한 도현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고, 얼마 후 산 정상에 무사히 도착하게 됐다.
산 정상은 밑에서 보는 것과 달리 의외로 평평했는데, 그 한가운데 눈보라를 맞으며 서 있는 작은 고성이 존재했다.
‘이런 곳에 성이 있다니, 누가 사는 걸까?’
도현은 서둘러 성을 향해 걸어갔다.
성안에 사람들을 통해 그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눈보라를 헤치며 성문 앞에 도착한 도현은 성벽 위를 올려다봤다. 경비를 서는 병사는 없었고 찢어진 깃발만 눈보라 속에 외롭게 휘날렸다.
“안에 누구 없습니까!”
성문을 두드리며 여러 번 외쳤지만 성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버려진 성인가?’
성문 앞에서 잠시 고민하던 도현은 성벽의 틈을 이용해 성벽을 기어 올라갔다.
성벽 위에서 내부를 확인한 도현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담한 궁전처럼 지어진 석조 건물이 있었고 그 안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빈 성은 아니었군.’
도현은 성벽을 미끄러지듯 내려와 불빛이 보이는 석조 건물로 향했다.
뽀드득뽀드득.
성을 지키는 병사 대신, 성 내부에 쌓인 눈만이 도현을 반겨 주고 있었다.
하얀 입김을 만들며 불빛이 새어 나오는 석조 건물 앞에 도착한 도현은 문을 두드리며 안에서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문을 열어 줄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누구든 만나야 해.’
이곳이 어딘지 실마리라도 얻기 위해서는 정보를 제공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결국 도현은 유령의 성처럼 고요한 건물 안으로 직접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심해 같은 적막감이 도현의 두 어깨를 내리눌렀다.
“누구 없습니까!"
도현은 먼지가 짙게 쌓인 홀을 천천히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겁내지 마십시오!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 들어왔을 뿐입니다!”
도현은 관리가 안 된 성 내외의 모습을 보며 이곳에 거주자가 소수일 거라고 예측했고, 자신을 피하는 이유가 경계심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상대방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하며 더 깊숙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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