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 디 임팩트 22권 4화
“자, 가자고. 진짜 축배를 들어야 할 시간이야, 하하하!”
일행은 도현의 귀환을 축하하며 갑판 밑에 있는 그들의 선실로 향했다.
“왜 안 가십니까, 영주님?”
뒤에 남은 영주 딘을 보며 리드만 사제가 물었다.
영주 딘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콧수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야.”
“뭐가 말입니까?”
“폭주의 후유증이 안 보여. 게다가 전보다 더 기운이 왕성해 보이는 건 왜일까?”
“좋은 일이 있었던 거겠지요.”
리드만 사제는 넉넉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에게 좋은 일이 있었던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어. 한데, 그게 무엇이냐는 거지.”
“짐작은 되지만 영주님이 속상하실까 봐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별 이상한 소리를 다 하는군.”
딘은 갑판 아래로 내려가며 리드만 사제를 쳐다봤다.
“내가 속상할 일이 뭐가 있겠나? 나는 도현을 친형제처럼 사랑하는데 말이야. 난 그를 위해 내 목숨도 포기할 수 있네. 우린 그런 사이라고.”
갑판 아래로 내려온 영주 딘은 선실로 향하며 말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말해 보게, 자네가 생각하는 바를.”
“브링틱에서 달의 여신상을 품에 안고 잔 이후로, 제 눈에는 영주님과 도현의 몸속에서 꿈틀대는 어두운 기운이 보였습니다. 폭주를 일으키는 나쁜 기운이지요.”
“아, 그랬었나? 대단하군. 역시 내가 달의 여신상을 자네 품 안에 넣어 두길 잘했지. 그 덕택에 자넨 10년은 더 젊어지지 않았나?”
“네, 그랬지요.”
리드만 사제는 통로에 있는 짐들을 피해 가며 대꾸했다.
“그래서 그다음은?”
“도현의 몸에서 더는 어두운 기운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의 말에 앞서 걷던 영주 딘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을 돌려 리드만 사제를 쳐다봤다.
“그 말뜻은…… 설마?”
“예, 그 설마가 맞습니다. 도현은 더는 폭주의 기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폭주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확실한가?”
“일곱 신이 주신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영주 딘의 입가에 미소가 서서히 번져 갔다.
“믿어지지 않는군,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가서 진짜 축하를 해 줘야겠어, 폭주의 짐을 털어 버리다니.”
“조금 전에 속상하실 거라는 말은 실은 장난이었습니다. 영주님을 놀라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에요.”
“이 사람아, 그걸 내가 모르겠는가? 하하하!”
화통하게 웃은 영주는 리드만에게 귓속말로 조용히 속삭였다.
“그런데 말일세, 도현이 폭주를 해결했다고 해서 검은 용이 나를 모른 체하진 않겠지?”
“음, 그러진 않겠지요. 도현은 검은 용과 계약을 맺을 때 두 사람 다 폭주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조건을 내걸었으니까요.”
“다행이군, 허험.”
옷깃을 올린 영주 딘은 뚜벅뚜벅 걸어가 일행이 꽉 차 있는 선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도현, 축하하네! 폭주에서 해방된 것을 말이야!”
* * *
‘흥!’
이디언은 떠들썩한 선실을 노려보다 율리비어스의 방으로 향했다.
“저예요.”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와.”
율리비어스가 사용하는 작은 선실에 들어간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그의 앞에 섰다.
“무슨 일이지?”
“부탁할 게 있어요.”
“칼라치에 관한 일인가?”
“그래요.”
“여러 번 말했을 텐데, 나도 그를 도울 수 없다고.”
눈가를 찌푸린 율리비어스는 침대에 누우며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칼라치를 살려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게요. 어차피 당신도 그럴 능력이 없다고 했으니까요.”
“겁을 상실했구나, 감히 내 앞에서 내 능력을 거론하다니.”
율리비어스가 손가락으로 마법진을 그리자 선실 천장에서 거미줄 같은 흰 줄이 내려와 이디언의 목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공중으로 떠오른 이디언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급히 마법 주문을 외웠다.
그 순간 천장에서 내려온 흰 줄이 불꽃을 만들며 사라졌다.
쿠웅.
“하아, 하아.”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는 그녀에게 율리비어스는 차갑게 말했다.
“날뛰지 말고 얌전히 있거라. 너에게는 칼라치가 중요할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내게 원하는 게 있으면 존경을 보여, 애송이 마법사.”
칼라치의 생사 때문에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던 이디언은 율리비어스의 경고에 정신을 차리며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 말이 거슬렸다면 용서하세요. 당신을 비꼬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니었어요.”
“너 따위에게 평가받을 내가 아니다.”
율리비어스는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 말을 했다.
“맞아요, 제게 당신을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은 없죠. 제가 찾아온 이유는 칼라치를 지금 상태로 유지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예요.”
“웃기는군. 칼라치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그걸 막을 수는 없어.”
“얼리면 되잖아요. 강력한 마법으로 그의 피와 심장을 얼리면 먼 훗날 다시 부활할 수 있잖아요.”
“그런다 해서 지금과 달라질 게 있겠느냐?”
“지금은 저이를 치료할 수 없지만…… 미래에는 다를 수 있잖아요.”
율리비어스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걸터앉았다.
“넌 미래를 낙관하는구나. 우리가 고대라고 말하는 과거의 시대와 지금을 비교해 보거라, 무엇이 달라졌는지. 마법은 오히려 뒤처지고, 제작 기술은 퇴보하거나 사라진 게 많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넌 칼라치를 미래에 부활시키려고 하는 것이냐.”
“가능성요!”
이디언은 목소리를 높이며 벌떡 일어났다.
“지금은 희망도 없지만, 그때가 되면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잖아요. 그 희망을 저는 보는 거예요.”
“꿈을 꾸고 있군.”
“꿈이라도 좋아요. 저렇게 고통받으며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칼라치를 위해서 전 뭐라도 해야만 해요.”
“미안한 말이지만 그 녀석 심장에 침투한 고대 병사들의 검은 영혼은 그의 피와 심장이 꽁꽁 얼어붙는다 해서 그 활동을 멈추진 않을 것이다. 너는 헛된 망상을 하는 것이고, 미래에 깨어날 그 녀석은 완전한 괴물이 되어 오히려 불행해 지겠지.”
그의 말에 이디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혹시나 싶어 찾아왔는데, 비관적인 말만 듣게 됐다.
그녀는 힘없이 몸을 돌렸다.
“충고 하나 하겠다.”
율리비어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이디언의 등 뒤로 다가갔다.
“아름다운 마지막도 있는 법이야. 잘 생각해 봐.”
“충고 고맙군요.”
율리비어스의 방을 나온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선실 사이의 복도를 걷다가 술자리에서 나오는 헬구스와 마주쳤다.
헬구스는 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술이 단번에 깨 버렸다.
“험, 그게 말이야, 술을 안 마시려 했는데, 짐브리오가 자꾸 권해서 말이지. 어쩔 수 없었다고. 그리고 나를 보낸 건 칼라치였어.”
주저리주저리 변명처럼 말을 늘어놓는 그를 스쳐가며 이디언이 말했다.
“누가 뭐라고 하던가요?”
“그렇지? 칼라치가 아프지만, 즐길 땐 또 즐겨야 하지. 인생이 그런 거 아니겠어?”
“너무 앞서가지 말아요.”
“험, 미안해.”
“술자리에선 무슨 말이 오갔어요?”
갑판으로 나온 그녀가 어두운 강물을 보며 물었다.
“베일성에서 싸웠던 이야기도 좀 나왔고, 철가면 이야기도 좀 하고, 뭐 그랬지. 아, 그리고 도현이 폭주를 스스로 극복했다는군. 대단한 친구야.”
“그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행운이 따르나 봐요.”
“리드만 사제가 그러더군. 일곱 신을 믿으면 그런 행운이 잘 온다고. 당신도 이참에 일곱 신을 믿어 보는 게 어때? 기도라도 하면 칼라치에게 행운이 올 수도 있잖아.”
“헛소리하지 말아요. 난 그딴 신 믿지 않아요.”
손을 힘 있게 움켜쥔 그녀는 갑판 난간에 기대며 소리를 쳤다.
“빌어먹을 자식들! 다 죽어 버려!”
“헤엑!”
살기 짙은 그녀의 목소리에 움찔한 헬구스는 뒤로 한 발 물렀다.
“진정해, 이디언. 내가 왕궁 도서관에서 읽은 고대서에 보면 인간은 환생을 한다더군. 지옥이나 천국, 그 어느 쪽도 적합하지 않으면 말이야.”
“환생을 해도 칼라치와 내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꼭 그럴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너무 우울해하지 말라고.”
말없이 강을 내려다보던 이디언은 몸을 돌려 헬구스를 봤다. 왕족인 그는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자신의 삶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당신을 구박하고 화를 내도 당신은 그저 받아 주는 군요.”
“마음을 비우면 그렇게 돼. 사실 다크캐슬에서 구역장을 할 때까지만 해도 어떡하든 왕실로 돌아가 나를 내몰고 죽이려 한 적통인 형제들을 깡그리 다 죽이고 싶었다고. 한데, 다 부질없어.”
담담한 눈빛으로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지금이 중요하지.”
* * *
선실 벽에 기대 심장에서 전달되는 고통을 참고 있던 칼라치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도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들어가도 되나?”
“어차피 들어올 생각 아니었나?”
도현은 피식 웃으며 문을 닫고 그의 옆에 앉았다.
“술자리가 아직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긴 왜 온 거지?”
“당신이 안 와서.”
도현의 대답에 칼라치는 별 우스운 얘기를 다 듣겠다는 듯 소리 내어 웃다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는 그의 모습에 도현은 잠시 말이 없다가 조용히 술병을 내밀었다.
“선장이 비싼 돈을 받고 우리에게 판 술이야. 향이 괜찮아.”
“고맙군.”
칼라치는 가슴의 극통을 술로 견디려는 듯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술병의 술을 반쯤 비운 그는 길게 숨을 토하며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말했다.
“샤르비티가 죽었으니, 전쟁의 승기는 대공에게 향하겠지?”
“그럴 거야. 더구나 샤르비티가 반군들의 한 축인 그의 사촌들을 광장에서 보란 듯이 숙청하는 바람에, 반군들의 구심점이 산산조각 났거든. 샤르비티는 미처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겠지.”
“붉은 성으로 돌아가면 대공이 내게 한 약속을 지키도록 자네가 책임져 주게.”
대공 부인의 가문이 다스리는 영지 중에 이디언의 고향이 있다. 눈이 오는 척박한 땅.
그곳을 받기로 하고 칼라치는 자신의 마지막 불꽃을 베일성에서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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