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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530화 (530/575)

[530] 디 임팩트 22권 5화

“마치 당신은 붉은 성으로 가지 않을 것처럼 얘기하는군. 함께 돌아가야지.”

“난 갈 수 없어.”

칼라치는 상의를 걷어 맨가슴을 보여 줬다. 심장이 있는 부위가 징그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수십 마리의 지렁이들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도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난 대공을 믿은 게 아니라 널 믿고 왔다. 그러니 날 대신해 그 땅을 받아 줘.”

도현은 그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그 땅은 이디언의 것이 될 테니까.”

원하는 대답을 들은 칼라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술을 한 모금 더 했다.

“다 좋은데 한 가지가 아쉽군. 휴반트, 그 녀석에게 패한 게 말이야……. 죽기 전에 그 녀석을 내 손으로 직접 처리했으면 했는데.”

“당신은 충분히 훌륭하게 싸워 줬어.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번 일은 실패했을 거야.”

“푸훗, 그런가?”

쓴웃음을 흘린 칼라치는 벽에 머리를 기대며 탄식 같은 숨을 내뱉었다.

“살아오면서 내 뜻대로 되는 게 별로 없었어. 늘 마지막엔 나의 앞길을 누군가 막거나 방해를 했지.”

“그중 한 명은 아마도 나겠군.”

“그래, 맞아. 잘 아는군.”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칼라치는 기침을 몇 번 한 후 도현의 팔을 힘주어 붙잡았다.

“그러니 자네가 날 위해 반드시 해 줄 일이 있어. 내 심장을 도려내 밝은 태양 아래서 없애 버리게.”

“지금 나보고 당신을 죽여 달라고 하는 건가?”

뜻밖의 요구에 도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럴 순 없어.”

“이대로 가면 나는 곧 괴물로 변할 거다. 어떤 괴물로 변할지 모르겠지만, 이디언에게 그런 추한 모습으로 기억될 순 없어.”

목소리를 높이던 그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인간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괴물이 아니라.”

“…….”

“내 머릿속에서 환청이 들리고 있어. 그건 내 것이 아닌 고대 병사들의 소리야.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모든 게 편안해져. 심장의 고통이 사라진다고. 아침에는 이 단검으로 내 심장을 찔러 자살을 하려 했지만, 내 손이 말을 안 들었다. 내 목숨을 내가 끊을 수 없게 돼 버린 거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칼라치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목숨을 끊어 버릴 수 없는 상황까지 오게 됐다.

그렇다고 이디언이나 헬구스에게 죽여 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었다.

그들에겐 그것이 너무도 버거운 일이자 평생 아픈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날 끝장내 주게. 내 심장에 기생하는 고대 병사들이 반항해도 자네의 검이라면 확실히 숨통을 끊어 버릴 수 있을 테니까.”

칼라치는 죽음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도현은 선뜻 그의 부탁을 수락할 수가 없었다.

“난 친구를 죽이지 않아.”

도현의 나지막한 말에 칼라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고마운 말이지만, 지금 내겐 너의 검이 절실히 필요하다. 도와줘.”

도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선택의 압박감이 그를 감쌌다.

길게 침묵하던 도현은 결심했는지 무거운 눈빛으로 물었다.

“이디언과 상의는 해 봤나?”

“너만 허락하면 그녀에게 말을 할 거야. 마지막으로 너와 대결을 하고 싶다고 말이야. 그때, 자연스럽게 나를 죽여 주면 돼. 이디언도 널 탓하진 않을 거야. 그녀도 바보는 아니니까.”

“그럼 준비해, 낮에 올 테니까.”

도현은 이를 악물고 결국 승낙을 했다.

“고맙다. 남은 시간은 이디언과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얼굴에 가죽만 남은 앙상한 칼라치는 창백한 얼굴로 미소를 보였고, 도현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의 선실을 나섰다.

선실 사이 복도엔 이디언과 헬구스가 서 있었다.

그들은 문밖에서 대화를 엿들은 것 같았다.

“칼라치가 원하는 대로 해 줘요.”

이디언은 슬픔을 감춘 얼굴로 말했고, 도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자리를 떠나 술자리가 벌어진 방으로 향했다.

* * *

“스승님, 대단하십니다.”

술에 취해 잠든 에드는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도현은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다가 갑판으로 올라갔다.

새벽 강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갑판에서 잠을 쫓으며 배를 모는 선원들을 지나쳐 배의 후미로 간 그는 조금씩 밝아 오는 새벽하늘과 강을 구경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배로 이틀 정도 더 가야 하는 작은 항구도시로, 그곳에서 하선해 붉은 성으로 갈 예정이었다.

‘아마 지금쯤 붉은 성에선 베일성의 소식을 듣고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겠지.’

붉은 성을 중심으로 수십만 병력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나는 거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샤르비티를 지지했던 사자동맹군은 그 동력이 사라졌다는 거다.

도현은 종이를 꺼내 그 위에 밝아 오는 새벽하늘과 강을 스케치했다.

펜을 움직일 때마다 종이 속 세상은 그 생명력을 얻어 갔다.

힘 있게 펜을 움직일 때는 그림 속 세상이 거칠게 요동쳤고, 부드럽게 선을 그을 때는 나른함이 느껴질 정도로 그림이 평화롭게 보였다.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리던 도현은 문득 하늘에서 강한 기운이 느껴지자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봤다.

흑발을 길게 기른 중년인이 거만한 눈빛으로 허공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름 아닌 바크 드라모스였다.

검은 용은 스르륵 내려와 도현의 옆에 섰다.

“뭐 하고 있느냐?”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바크 드라모스가 손을 뻗자 도현의 손에 있던 종이가 그에게 넘어갔다.

잠시 그림을 본 바크 드라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도 꽤 그리는군. 하지만 너무 심심해.”

바크 드라모스의 손이 그림을 한번 훑고 지나가자 그림 속에 도현이 그리지 않았던 돌고래 떼가 나타났다.

“이 강에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천만에.”

바크 드라모스가 손짓을 한 순간, 바다에서나 볼 수 있는 수십 마리의 돌고래 떼가 새벽 강을 헤치며 등장했다.

배 뒤편에 출몰한 돌고래들은 물살을 헤치며 배 앞으로 갔고, 갑판에 있던 선원들은 그 돌고래에 모두 시선이 빼앗겼다. 그래서 배 후미에 도현 옆에 서 있는 검은 용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됐다.

“보았느냐? 존재하지?”

도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검은 용이 어떤 마법으로 돌고래를 이 강에 풀어 놨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된다는 게 중요했다.

“안 보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네가 못 보았을 뿐. 눈을 크게 떠 보아라. 이 우주는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재밌는 곳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그림을 돌려준 바크 드라모스는 강바람에 긴 흑발을 휘날리며 말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내가 온 이유만 말하겠다.”

시간이 없다는 그의 말에 도현은 의문을 가졌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나는 이쪽 세계를 떠난다.”

“예? 떠난다고요?”

“그렇다. 원래는 진즉에 떠났어야 하는데, 브링틱에서 네놈이 망쳐 놓은 내 일 때문에 어쩌다 이곳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검은 용은 갑판의 난간에 손을 올리며 계속 말했다.

“베일 가문의 전쟁도 사실 내가 개입할 문제가 전혀 아니었다. 브링틱을 거친 뒤 그대로 난 이쪽 세계를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널 만나고 내 거처에서 약간에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돈조르니 녀석이 에디보르의 목걸이를 들고 날 찾아온 것이야.”

잠시 말을 끊은 바크 드라모스는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빛으로 도현을 돌아봤다.

“결국 네가 베일 가문의 전쟁에 참여한 것은 나 때문이 아닌 바로 너 때문인 것이니,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라.”

“이해합니다.”

“이해하긴 뭘 이해해! 당연한 결과라니까!”

“맞습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도현은 굳이 이미 벌어진 일을 가지고 누구 탓이니 하는 걸로 다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고귀한 용이다. 저 위에 사는 것들하고는 달리 약속을 지키는 존재지.”

바크 드라모스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도현은 그 손가락이 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대로 떠날까 하다가 그래도 네 녀석이 나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힘쓴 것을 고려해, 이렇게 찾아왔다.”

“폭주를 해결해 주겠다는 그 약속 말입니까?”

“그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계약은 계약이니까. 하지만 넌 스스로 폭주를 극복했으니, 남은 한 녀석만 치료해 주겠다. 가서 그놈을 불러와.”

그러나 도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넌 지금 내 소중한 시간을 빼앗고 있다.”

“아, 죄송합니다. 그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생각에서 퍼뜩 깨어난 도현은 신법을 발휘해 그 자리에서 증발하듯 사라졌다.

“영주님, 일어나십시오.”

“뭔가?”

“검은 용이 폭주를 치료해 주기 위해 왔습니다.”

“뭐야?”

술이 덜 깬 영주 딘은 서둘러 옷을 찾아 입다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옆에서 자고 있던 리드만 사제의 몸 위로 쓰러졌다.

“영주님, 어디 가십니까?”

잠에 취한 목소리로 리드만 사제가 묻자, 영주 딘은 물로 얼굴을 적시며 답했다.

“용이 왔다는군, 날 치료해 주기 위해.”

“예? 그게 정말입니까?”

리드만 사제는 문 앞에 서 있는 도현을 응시했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갑판 후미에서 영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되겠나, 용을 보고 싶은데.”

“자넨 그냥 여기 있게, 용이 찾는 건 나니까. 괜히 용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고.”

영주 딘은 따라오려는 리드만 사제를 떼어 놓고 도현과 급히 갑판 위로 올라왔다.

갑판에 선원들은 강에 나타난 돌고래 떼의 역동적인 이동을 구경하느라 전부 앞을 보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배 후미로 가던 딘은 등을 보이고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서 있는 뒷모습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저 사람인가?”

“네.”

“겉모습은 영락없는 인간이군. 드디어 전설의 검은 용을 실물로 보게 되다니, 후대에 기록을 남겨야겠어.”

가까워질수록 영주 딘은 심장이 뛰었다. 고대부터 존재하던 절대 존재를 눈앞에서 보게 되면 누구라도 흥분을 할 것이다.

등을 보이고 서 있던 바크 드라모스는 도현과 딘이 도착하자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의 감정 없어 보이는 투명한 시선을 받은 딘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영주 딘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가까이 오너라.”

바크 드라모스는 길게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는 용의 불을 만들어 순식간에 딘의 육신 속에 숨어 있던 마기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그 고통이 대단히 심해 딘은 몸을 떨며 바닥에 쓰러져 상체를 활처럼 꺾었다.

‘화산처럼 뜨거운 기운이 영주님의 몸을 감싸고 있다.’

용의 불은 눈으로 보이는 게 아니었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도현은 그 기운이 느껴졌다.

잠시 후, 용의 불은 사라졌고 딘은 땀이 범벅이 된 얼굴로 일어섰다.

경고 없이 시작된 용의 불은 두 번 다시 맛보기 싫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지금 네 몸속에 있는 마기는 모두 없앴다. 하지만 혼돈의 마나를 다시 흡수하게 되면, 마기가 다시 네 몸에 자리 잡을 것이다.”

검은 용은 한쪽에 서 있는 도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 녀석처럼 그 마기를 감당할 자신이 있으면 모를까, 더는 혼돈의 마나를 강해지기 위한 수단으로 수련하지 마라.”

“그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크 드라모스 님.”

영주 딘은 마침내 폭주의 족쇄에서 해방됐다는 기쁨에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영지전에서 패하고 도망가던 길에 우연히 얻은 고대 혼돈의 마나 수련법을 익힌 뒤, 그는 도현보다 훨씬 많은 폭주를 했다.

작은 산속 마을을 통째로 없애 버린 적도 있을 만큼, 그는 폭주 상태에서 광기의 살육자가 되었다.

그 괴로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하던 차에, 리드만 사제가 나타나 그를 옆에서 보필하며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리드만이 보고 싶군.’

영주 딘은 복받치는 감정을 참으며 도현을 응시했다.

“고맙네, 이게 다 자네 힘이야.”

“아닙니다. 다 같이 힘쓴 결과입니다.”

도현은 영주 딘이 폭주에서 해방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나는 그만 가 보겠다.”

검은 용은 고풍스러운 회색빛 망토로 몸을 감싸며 공간 이동을 하려 했다.

그 순간, 도현이 다급히 검은 용의 긴 망토 끝자락을 발끝으로 내리눌렀다.

“아니, 이 녀석이 감히 내 망토를! 죽고 싶은 게냐!”

“용서하십시오, 바크 드라모스 님. 급한 마음에 제 발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화가 난 그에게 도현은 머리를 숙이며 정중히 사과했다.

차가운 눈빛으로 도현을 노려보던 검은 용은 망토를 한 차례 펄럭이며 물었다.

“왜 날 붙잡은 거지?”

“외람되지만 한 사람을 더 치료해 주십시오.”

“한 사람 더?”

“네.”

도현은 용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칼라치 이야기를 꺼냈다.

“인간의 힘으로는 치료할 수 없지만, 바크 드라모스 님은 가능하실 것 같아서 감히 이렇게 부탁을 드립니다.”

“너와 난 계약으로 맺어진 사이다.”

검은 용은 무심한 눈동자로 도현의 얼굴을 노려봤다.

“폭주를 치료해 준다는 약속을 지켰으니, 더 이상 내게 요구하지 마라. 알겠느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치료해 주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치료해 주고 싶어도 네 녀석이 스스로 폭주를 극복했다. 마기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됐어. 한데, 무슨 치료를 말하는 거냐?”

검은 용이 황당하다는 듯 도현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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