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 디 임팩트 22권 6화
“억지라고 볼 수 도 있지만, 그럼 제게 남는 게 무엇입니까? 죽음을 각오하고 대공을 위해 싸웠습니다. 제 동료들도 희생을 감수했고 말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닌, 거의 반년 가까운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는 스스로 극복했으니 모른 체하신다고요? 그것은 셈이 맞지 않습니다. 위대한 존재인 바크 드라모스 님은 그것이 정녕 올바른 일 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도현의 긴말이 끝나자 검은 용은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태도를 보였다. 듣고 보니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무엇이냐?”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샤르비티를 죽이는 일에 큰 공을 세운 칼라치를 치료해 주십시오. 폭주를 치료해 주는 건 결국 사람의 목숨을 구해 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를 치료해 주시면, 저는 제가 받아야 할 치료를 받았다고 여기겠습니다.”
“만약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쩔 것이냐?”
“제게 취미가 있습니다. 이쪽 세상에서 벌어진 일을 그림으로 빠짐없이 그려서 책으로 남기는 것이죠.”
“별난 취미로군. 그래서?”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크 드라모스는 도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구에 돌아가면 바크 드라모스 님을 어떻게 그리게 될지 고민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어떤 분으로 제 그림 속에 남기를 원하십니까?”
“고작 그런 그림으로 나와 협상을 하려고? 아서라, 인간아, 나는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아.”
“제가 그린 그림은 책으로 만들어서 수백만 명이 읽을 수도 있습니다.”
“수백만 명이나 읽는다고?”
“그렇습니다.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흠…… 그 많은 녀석들이 네 그림을 본단 말이지.”
바크 드라모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동안 생각하다가 넌지시 말했다.
“붉은 성에서 내가 너희들을 구해 준 걸 잊지 않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바크 드라모스 님의 비늘을 이용해 위기를 무사히 넘겼지요.”
“그것도 꼭 그림에 넣도록 하거라. 알겠느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놈을 데려오너라.”
그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도현은 기뻐하며 영주 딘과 함게 갑판 아래 선실로 향했다
“옆에서 지켜볼 때 얼마나 긴장이 됐는지 아는가?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었지 잘못했으면 저 검은 용이 자넬 해치려 했을 수도 있다고.”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용이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그를 저대로 떠나게 할 수는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그림 이야기는 뭔가? 진짜 그런 게 있나?”
“네, 만약 검은 용이 제 말을 무시하고 떠났다면, 못된 용으로 그리려 했습니다.”
도현은 진심으로 그럴 생각이었다.
“자네도 독한 면이 있군.”
그들이 선실이 좌우로 배치된 복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던 리드만 사제가 서둘러 뛰어왔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영주 딘의 몸을 살폈다. 폭주를 일으키는 어두운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치료가 된 것이다.
“영주님!”
리드만 사제의 노안에 눈물이 글썽였고, 그 모습을 본 영주 딘의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동안 고생했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폭주에서 벗어난 영주님을 이렇게 보게 되다니, 꿈만 같습니다. 돌아가신 영주님의 부친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물론 그렇겠지.”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도현은 칼라치가 머물고 있는 선실에 들어가 그를 부축해 밖으로 나왔다.
“어디 가는 거죠?”
이디언이 따라 나오며 묻자 영주 딘이 그녀를 안심시키며 나섰다.
“당신은 우리와 여기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소. 결코 그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니니.”
* * *
“낮에 태양이 밝을 때 날 죽여 달라고 한 것 같은데, 벌써 죽이려 하는 건가?”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진 칼라치가 힘없는 몸짓으로 물었다.
그를 옆에서 부축해 갑판으로 올라온 도현은 선미로 가며 차분히 말했다.
“당신을 치료해 줄 사람에게 가는 거야.”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겠나? 율리비어스조차도 방법이 없다고 말했는데.”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도현은 용이라면 칼라치를 치료할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그들은 검은 용 앞에 함께 섰다.
“당신은 누구지?”
간신히 혼자의 힘으로 균형을 유지한 칼라치의 물음에 검은 용은 위엄 있는 얼굴로 답했다.
“입 다물고 앞으로 있을 고통을 견뎌라.”
바크 드라모스의 손이 칼라치의 안면을 감싸자 칼라치의 눈, 코, 입, 귀에서 푸른 연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칼라치는 전신이 세포 단위로 분해되는 고통을 겪으며 괴로워했다.
“으아아아아!”
아기로 태어나 늙어서 죽기까지 감당해야 할 인간 세상의 육체적 고통이 일시에 몰아치는 듯했다. 그 어마어마한 고통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칼라치를 무너트렸다.
“으흐흐흐흑!”
그는 두 무릎을 꿇으며 흐느껴 울었고,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배가되었다.
“많이도 흡수했군.”
검은 용은 칼라치의 몸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고대 병사의 영혼들이 빠짐없이 보였다.
그것들은 칼라치의 몸에서 나오지 않으려 발버둥 쳤지만 검은 용의 손에서 나오는 그 강한 힘을 견디지 못해 결국 외부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크아아아아! 캬아아아아!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를 내는 푸른 연기들은 검은 용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 즉시 불꽃을 만들며 소멸되었다.
마지막 고대 병사의 영혼까지 소멸시킨 검은 용은 기절한 칼라치의 얼굴을 놔줬다.
툭.
허수아비처럼 쓰러진 칼라치의 얼굴은 혈색이 돌아오고 어딘지 편안해 보였다.
“이놈 몸속에 있는 마나는 치료와 함께 모두 사라졌다.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왔단 뜻이다.”
“목숨이라도 건졌으니, 그게 어디입니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도현은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제 떠나야겠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그건 네가 알 것 없다.”
톡 쏘듯이 말한 검은 용은 도현의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다봤다.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수명을 길게 만들어 줄 수 있지. 나와 함께 가겠느냐? 영생에 가깝도록 살게 해 주겠다. 단, 내 수족이 되어 곁에서 나를 보필해야 한다. 따르겠느냐?”
달콤한 유혹이었지만 도현은 거부했다.
“싫습니다. 가족과 친구가 없는데, 혼자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바보 같은 놈. 네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결국은 이슬처럼 거쳐 가는 시간이다. 영생의 즐거움을 알면 그런 말을 못 하지.”
“그래도 싫습니다.”
“흥!”
검은 용은 망토로 몸을 감싸며 도현을 옷깃 사이로 노려봤다.
“잘 있거라, 지구에서 온 인간아.”
쾰벨에서
“성문을 열어라! 움트 영지의 영주님이시다!”
“바센디아 영지의 영주 대리인 코엘도 경이시다! 길을 터라!”
“헤로이드 영지의 영주님이시다!”
대공과 대립하며 붉은 성 주변을 포위했던 사자동맹군 소속의 영주들이 새벽어둠을 뚫고 제7지휘부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아침이 됐을 무렵, 수십 개의 의자가 놓인 회의장은 영주들과 그 대리인들로 거의 채워졌다.
빈 의자는 연락을 받고도 올 수 없는 제2지휘부 소속의 영주들 것이었다.
“그쪽 사람들은 왜 아직 안 오는 거요?”
누군가 묻자 수염이 무성하게 난 거친 인상의 영주가 답했다.
“아직 그 소식을 못 들었군. 다 죽었소. 붉은 성의 대공이 직접 나와 들판에 진을 치고 있던 제2지휘부를 한 번에 싹 쓸어버렸단 말이오.”
“그게 사실이오?”
“허허, 그런 일이.”
제2지휘부는 붉은 성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베일 연합군과 대치하던 사자동맹군이다.
여기저기서 무거운 장탄식이 새어 나왔다.
“사자가 드디어 이빨을 드러냈소이다. 큰일 아니오. 이게 다 샤르비티가 죽어서 그렇소. 그런 자를 믿고 군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오다니.”
“약간의 이득을 보려다가 내 영지까지 빼앗기게 생겼군.”
몇몇 영주들이 근심에 찬 말을 내뱉자, 호전적인 성격의 영주들이 회의 탁자를 손으로 내려치며 반박했다.
“너무 그렇게 성급하게 단정 짓지 마시오! 아직 우리에겐 병력이 충분하오. 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미리부터 겁을 낸단 말이오.”
“어허! 겁을 내다니! 누가 겁을 내!”
“경이 하는 말이 지금 그렇잖소! 한번 뜻을 모아 검을 뽑았으면 흔들리지 말아야지.”
“당신이 뭔데 감히 내게 이래라저래라 훈계질이야!”
“할 만하니까 하지!”
“뭐야? 이놈이!”
“이놈이라니! 영주라도 다 같은 영주인 줄 아나! 코딱지만 한 영지를 가지고 있는 자가 말이야.”
언성이 높아진 둘은 급기야 검을 뽑으려 했고, 여기저기서 싸우려는 그들을 만류했다.
“자, 그만들 하시오. 우리끼리 싸워서 득 될 게 무엇이오?”
“아랫사람들 보기 민망하지도 않소. 영주의 권위를 스스로 땅에 처박지 마시오.”
나름 명성 있는 영주 몇이 나서서 한마디씩 하자, 말싸움을 벌였던 영주들이 헛기침을 하며 제자리에 앉았다.
“회의를 시작합시다.”
어수선한 회의장 분위기는 회의 진행을 맡은, 눈썹이 흰 영주의 조용한 말에 곧 정리됐다.
“다들 알다시피 샤르비티와 그 사촌들이 모두 죽어 버리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소. 이는 우리 모두 예상치 못한 일로, 이 전쟁에 참여할 명분이 사라진 셈이오. 명분이 사라진 이상 우리는 샤르비티를 돕는 동맹군이 아닌, 영지의 침략군으로 전락했소이다. 이는 심히 큰 차이로, 영지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예상되오. 따라서 이제는 빠른 판단을 내려야 하오. 붉은 성의 대공이 본격적으로 전장에 나서고 있으니 말이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각자 의견을 내놓았다.
“명분도 실리도 없는 전쟁, 계속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사자동맹군은 이쯤에서 해체하고 각자 영지로 돌아갑시다.”
“맞소, 나도 동감하오. 샤르비티와 그의 정예군이 없는 이상 우리들만으로는 기세를 탄 대공의 군대와 맞서 이길 수 없소. 제2지휘부가 전멸된 것만 보더라도 지금의 흐름을 알 수 있지 않소이까?”
사자동맹군을 해체하고 철수하자는 영주들의 의견이 이어지는 가운데 반대 측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정말 순진들 하시오. 우리가 돌아간다고 하면 저들이 그냥 순순히 보내 줄 거라고 생각하시오? 아마 돌아가는 길에 다 잡아먹힐 거요. 더 나아가 우리 영지도 대공이 하나씩 삼키겠지.”
“싸웁시다!”
날카로운 인상의 영주가 목소리를 높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에겐 아직 유능한 장수와 병력들이 많소. 한데 왜 우리 힘을 스스로 무시하고 저들에게 머리를 숙이려 하는 거요? 그깟 명분이야 우리가 찾아내면 그만 아니오?”
“명분을 어떻게 만들자는 겁니까?”
“샤르비티와 사촌들은 죽었지만, 그 후손들이 있지 않겠소? 그들을 허수아비로 세우고, 이참에 베일 가문의 전 영지를 차지합시다.”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누가 우리의 허수아비가 되겠소? 샤르비티가 광장에서 사촌들을 숙청하는 바람에 사촌들의 후손과 가족들은 우리를 불신할 것이오.”
“샤르비티의 자식들이 남았잖습니까?”
“베일성에서 날아온 소식에 의하면 샤르비티가 죽은 그다음 날, 누군가에 의해 샤르비티의 첩과 자식 들이 모두 살해당했다더군.”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영주가 수염을 훑으며 답하자 그 소식을 몰랐던 영주들이 놀라워했다.
“샤르비티를 죽인 암살자들이 벌인 짓인가?”
“그걸 어떻게 알겠소만, 아무튼 명분으로 삼을 자가 없소이다.”
“잠깐, 모두가 죽은 건 아니지. 샤르비티의 아들 중 한 명의 생사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소.”
조용히 앉아 있던 한 영주가 나섰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헛기침을 한번 하며 말을 이었다.
“로니올이라고 샤르비티의 장자인데, 베일성에서 참극이 벌어지던 날 실종됐다고 합니다. 샤르비티의 적통을 이은 자이니, 명분으로도 허수아비로도 그만인 자지요.”
“실종된 자를 어디서 찾는다는 겁니까? 혹시 그자의 소재를 알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기대감을 품고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소재도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무책임하군. 아예 말을 꺼내지 말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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