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 디 임팩트 22권 7화
몇몇 영주들이 비난을 하자 로니올을 언급했던 영주는 불쾌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었다.
“왜들 다 그렇게 꽉 막혀있습니까? 없으면 적당히 만들면 될 게 아니오. 가짜 로니올이라도 말입니다. 어차피 전쟁이란 게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난 전쟁을 계속하는 데 반대요. 대공에게 화해를 청하고 물러납시다. 그의 체면을 적당히 세워 주는 선에서 우리가 보상을 약속한다면, 그도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해서 우리를 몰아붙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찬성이오.”
“나는 반대요.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물러나다니, 그것도 굴욕적으로. 끝까지 싸웁시다.”
“어허, 죽으려면 혼자 죽으시오. 난 사자동맹군에서 탈퇴하겠소.”
“나도 탈퇴하겠소.”
“이런 겁쟁이들 같으니!”
“뭐라? 겁쟁이라니! 말이 심하군!”
“당신이나 닥치시오! 화해를 하자는 당신들은 베일 가문의 영지와 상당히 거리를 두었지만, 나는 바로 인접한 땅이야. 지금은 지나가도 후에는 반드시 보복을 당하게 되어 있어!”
날카로운 인상의 영주는 목에 핏대를 올리며 외쳤고, 같은 처지인 여러 영주들이 한목소리로 화해가 아닌 전쟁을 주장했다.
회의를 주도하던 흰 눈썹의 영주는 난장판처럼 변한 회의장에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자동맹군의 이름으로 하나로 뭉쳐 싸워도 대공과 그를 지원하기 위해 온 20만의 베일 연합군을 겨우 상대할까 말까 한데, 이렇게 균열이 돼서는 답이 없었다.
‘샤르비티가 너무 시간을 끌었어. 그것이 결국 우리 모두를 망하게 한 거야. 빌어먹을 자식.’
눈썹을 위로 올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으로 회의용 탁자를 내리쳤다.
쩍 소리가 나며 그 긴 탁자가 앞에서부터 끝까지 두 조각이 났다.
쿠웅.
큰 소리와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회의장이 조용해지자 회의를 주도하던 영주는 검을 거두며 입장이 제각각인 영주들을 둘러봤다.
“기분이 언짢아도 회의 진행을 이 사람에게 맡겨 두셨으니 신속하게 처리하겠소. 대공과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영주들은 거수해 주시오.”
회의장에 참석한 사람들의 4분의 1이 손을 들었다.
“그럼 화해를 해야 한다는 사람 거수해 주시오.”
나머지 영주들이 모두 손을 들어 찬성을 표시했다. 그 수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전쟁을 주장했던 영주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보시다시피 다수가 화해를 원하니, 사자동맹군은 그 결정을 따르는 걸로 하겠소. 원치 않는 영주들은 지금 즉시 사자동맹군을 탈퇴해서 별도로 대공과 전쟁을 수행하시오. 자아, 나머지 분들은 화해 협상을 위한 협상단을 꾸려 봅시다.”
회의를 진행하는 흰 눈썹 영주의 단호한 결정에 전쟁을 주장했던 영주들 중 일부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만, 대다수는 그 자리를 유지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수백 명의 기병들이 흰 깃발을 들고 남진하고 있던 대공의 군사들에게 말을 몰아갔다.
사자동맹군이 화해를 요청했단 소식에 말 위에서 적진을 보던 대공이 고개를 돌려 숙부인 돈조르니 베일을 봤다.
“한 번 더 치면 화해가 아닌 항복문서를 가지고 올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숙부?”
“옳으신 말씀입니다.”
전날 직접 군사를 몰고 제2지휘부를 박살 낸 대공은 사자 문양이 찍힌 투구를 머리에 다시 쓰며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두 번 다시 외부 세력이 베일 가문의 내부 일에 참견하는 일이 없도록 선례를 만들어야만 했다.
‘철저하게 짓밟아 주지.’
대공이 손짓을 하자 언덕 아래에 포진해 있던 대공의 기마병 수만 기가 일시에 적진을 향해 돌진해 갔다.
* * *
멀리 항구도시 쾰벨이 보였다. 이곳은 바닷물과 강물이 교차하는 곳으로, 진짜 바다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갈매기가 보이고, 짠내 나는 생선들이 어선에 실려 항구로 향하고 있었다.
‘냄새부터 다르군.’
바닷물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냄새가 갑판 위에 서 있는 도현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베일성에서 출발한 배는 여러 날 거쳐 드디어 목적지인 쾰벨에 도착한 것이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나?”
도현의 물음에 옆에 서 있던 칼라치는 사내답게 웃으며 대꾸했다.
“자네가 날 구해 준 덕분에 그곳은 더 이상 필요 없어졌어. 이디언과 난 남부 대륙으로 갈 테니까, 자네가 그 땅을 갖게. 춥고 척박한 땅이라 크게 도움이 될 곳은 아니지만 말이야.”
“이디언에게 주고 싶어 했잖아.”
“그녀가 원하지 않아.”
칼라치는 말을 하면서도 한 손으로 무거운 철판 방패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검은 용에게 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졌지만, 대신 그는 힘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의 엘바와 모든 마나를 다 잃었다.
그에게 남은 건 순수한 육체적 힘이었고, 그마저도 지금은 많이 약해져 있었다. 예전의 체력과 근력을 되찾기 위해선 꾸준히 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칼라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고 환했다. 모든 걸 포기한 상태에서 새 생명을 얻었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삶은 그에게 더 이상 치열한 전장이 아니다. 남은 시간은 증오도 원망도 없는 온전한 그의 것이다.
“정 뜻이 그렇다면, 그 땅은 내가 갖도록 하지.”
도현은 대답을 하면서도 과연 자신이 그 땅을 방문할 기회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미래는 알 수 없으니까.’
도현은 타투의 차원 이동 에너지를 지구에서 다시 충전시킬 수 있기를 바라며 칼라치를 돌아봤다.
“남부 대륙은 가 본 적 있나?”
“물론이지. 내 고향은 북부 대륙이 아닌 남부 대륙이야. 그쪽 지리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
“그곳에서 뭘 할 건가?”
“정해 놓은 건 없네. 그저 이디언과 재밌게 여행을 할 거야. 같이 있는 게 소중하니까.”
그의 말속엔 이디언에 대한 깊은 사랑이 배어 있다.
‘같이 있는 게 소중하다……. 그러고 보니 난 홍영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군. 그것도 자주 말이야.’
아버지 복수를 위해 이계에서 수련을 하며 긴 시간을 보내왔다. 지구에서도 검을 수련하느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이 모든 게 다 타당했지만 홍영에게 왠지 미안했다.
“얼굴에 그리움이 묻어나는군. 누굴 생각하는 거지?”
칼라치의 물음에 도현은 갑판 난간에 팔을 얹으며 답했다.
“좋은 사람.”
“좋은 사람이라, 여자가 분명하군. 안 그런가?”
도현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배는 조금씩 더 항구에 가까워졌다.
“네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목숨을 구해 줘서 고맙다.”
칼라치는 지나가는 말투로 고맙다는 말을 툭 내뱉었고, 도현은 못 들은 척하며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날 치료해 준 그 사람이 누군지, 정말 얘기 안 해 줄 건가?”
“그는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이 거론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신비로운 사람이군.”
칼라치는 근엄한 눈빛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던 신비인의 투명한 눈동자를 떠올렸다.
이제껏 만나 본 사람들과는 어딘지 달라 보이는 특별한 사람 같았다.
“하선을 준비하시오!”
갑판장의 외침에 도현과 그 일행은 상선에서 내려 작은 배로 옮겨 탈 준비를 했다.
해적질한 물건을 대륙을 돌아다니며 파는 상선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선장은 항구에 배를 대지 않고 사람들만 하선시키려 했다.
“선장, 선실 청소 좀 하시오. 냄새가 너무 났어.”
내릴 때가 되자 짐브리오는 마치 여객선을 타고 내리는 손님처럼 뒤늦게 투덜거렸다.
“그만하면 깨끗한 편인데?”
선장 말에 갑판에 있던 선원들이 낄낄댔다.
“아무튼 잘 가시오. 또 우리 배가 필요하면 연락하시오, 언제든 제공할 용의가 있으니까.”
“됐소, 선실 청소해 놓기 전에는 다신 볼일 없을 거요. 그동안 수고했소.”
선장과 가볍게 악수를 한 짐브리오는 일행이 탄 작은 배에 마지막으로 올랐다.
얼마 후 작은 배는 잔잔하게 출렁이는 파도를 헤치며 항구 선착장에 도착했고, 일행은 하나둘 그 위로 올라갔다.
“아이고, 살겠다. 역시 육지가 좋아.”
흔들리는 배에서 오랜만에 내린 짐브리오는 크게 기지개를 폈다.
“맞아요, 땅이 좋아요. 배에선 수련할 공간도 마땅치 않죠.”
에드가 머리 위를 왔다 갔다 하는 갈매기를 보며 말했다.
“으! 갈매기 똥이다!”
리타가 머리를 손으로 가리며 도망쳤고, 사람들은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 얼굴엔 여유가 엿보였다.
영주 딘과 도현의 폭주가 해결됐고, 은연중 신경 쓰이던 칼라치까지 치료가 됐다. 분위기가 밝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후드로 얼굴을 가린 율리비어스는 차가운 눈빛으로 도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낀 도현은 선착장을 벗어나며 그에게 조용히 물었다.
“왜 그렇게 노려보십니까?”
“몰라서 묻느냐? 내게 끝까지 칼라치를 치료한 사람이 누군지 밝히지 않다니.”
“그것이 중요합니까?”
“중요하다.”
율리비어스가 먼지를 잔뜩 만들며 옆으로 지나간 마차의 바퀴를 마법으로 부숴 버리며 답했다.
“으아아악!”
술에 취한 채 마차를 몰던 마부가 마차에서 떨어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도현은 뒤를 잠시 돌아보다가 입을 뗐다.
“마음에 안 들면 제게 화풀이를 하십시오.”
“그럴 수 있었으면 벌써 그렇게 했다.”
율리비어스는 자존심 상했지만 도현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걸 인정했다.
도현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10년은 마법진을 설치하고 그를 그 마법진의 함정에 빠트려야 했다. 그러지 않고는 도현을 잡을 수 없었다.
“칼라치를 치료한 사람에게 왜 그렇게 집착하십니까?”
“고대 병사의 저주받은 영혼을 없애려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마법 경지에 올라야 한다. 그래서 난 칼라치를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확신했다. 그런 위대한 마법 경지에 오른 자는 내가 아는 한 고대에도 없었고, 지금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한데, 내가 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그 녀석이 말끔히 치료되어 있더군.”
율리비어스는 발걸음을 늦추며 도현의 표정을 살폈다.
“상황이 이런데 너 같으면 관심을 갖지 않겠느냐?”
“관심이 가겠군요.”
“당연한 말! 나는 그와 만나고 싶다.”
“음…… 그게 말입니다…….”
언덕 위에 즐비하게 늘어선 항구도시 쾰벨의 건물 사이를 걸으며 도현은 뒷말을 흐렸다.
기다리다 지친 율리비어스가 재촉하는 눈빛으로 도현에게 말했다.
“그저 잠시라도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야. 그와 나는 분명 마법과 관련해 통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존재할 것이다. 그 위대한 만남을 너는 막아서는 안 돼. 그것은 죄악이다.”
“도움을 주고 싶지만 불가능합니다. 그는 영원히 떠났으니까요.”
“어디로?”
“모르겠습니다. 그는 세상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연락할 방법도 없으니, 아쉬움을 접으십시오.”
도현의 말이 도끼질처럼 다가와 율리비어스의 기대감을 산산조각 냈다. 그 충격에 율리비어스는 비틀거렸다.
“거짓말은 아니겠지?”
“믿든 안 믿든 당신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당신은 믿는 게 좋을 겁니다.”
몇 발 앞서서 걸어가는 일행의 등을 보며 도현은 차분히 답했다.
“너는 왜 진작 그런 위대한 마법사가 있다는 걸 내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랬다면 칼라치를 치료할 때 내가 옆에 있었을 텐데.”
억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율리비어스는 길게 한숨을 쉬며 도현을 원망했다.
“그는 바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배에 나타난 것도 그의 의지인 것이지, 제가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저 또한 그가 칼라치를 구해 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만 그에 대한 미련은 거두십시오. 찾으려 해도 결코 찾을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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