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4] 디 임팩트 22권 9화
대저택을 연상시키는 큰 여관은 파산한 귀족의 집을 손본 것으로, 그 위치가 매우 좋아 독방을 쓰는 도현에게 아름다운 도시의 전경을 선사했다.
‘밤에 더 아름답다.’
어둠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쾰벨의 영주는 색깔을 넣은 유리병에 불을 피워 도시 전체를 형형색색의 빛의 도시로 만들었다.
주민들은 그 빛이 지겨웠겠지만 도현처럼 외지에서 방문하는 여행자들에겐 더없이 아름다운 광경이다.
‘시작했으니, 끝은 내야겠지.’
검은 용은 떠났지만 도현은 그와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킬 생각이었다.
스르릉.
그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본래 사용하던 세타이움 장검 두 자루는 베일성에서 싸울 때 파괴됐고, 이 검은 오후에 이 도시에서 구입한 것이다.
그가 애용하는 외날검 스타일이긴 하지만, 그 전 검이 워낙 훌륭해서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평범한 검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무서운 살상 병기가 된다.
‘내가 도착했을 때 전쟁이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났으면 좋겠군.’
그는 사자동맹군에 이 검을 사용할 일이 없었으면 했다. 베일성에서도 피는 충분히 봤다.
철컥.
검을 넣은 그는 창문을 닫고 뒤돌아섰다.
부드러운 솜이 채워진 푹신한 침대가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과거 귀족의 집이었다는 여관답게 방에 장식품이며 침대가 아주 고급스럽고 기품이 넘쳤다.
숙박료가 비싸고, 여관 주인의 콧대가 높을 만했다.
똑똑.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검을 풀어 탁자에 올려놓던 도현은 천천히 걸어가 방문을 열어 문을 두드린 사람을 확인했다.
“아직 안 자고 있었군요.”
이디언이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야경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들어오시겠습니까?”
도현은 늦은 시간에 자신의 방을 방문한 이디언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녀는 칼라치가 치료된 후에도 도현에게 별반 고맙다는 얘기를 하지 않을 만큼 여전히 거리를 두었다.
도현도 딱히 그녀와 할 얘기가 없었기에 먼저 다가서지 않았고, 그런 만큼 둘의 만남은 서먹했다.
이디언은 도현의 넓은 방을 가볍게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방이 여관치고는 훌륭하죠?”
“네, 아주 좋군요. 술 더 하시겠습니까?”
도현은 유리병으로 된 술병의 마개를 열며 물었다.
“조금만요. 아까 많이 마셔서 머리가 좀 어지러워요.”
“그럼 마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도현이 술병을 내려놓으려 하자 그녀는 한 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술을 마시지 않고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깰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당신도 그렇습니까?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도현이 웃으며 말하자, 그녀도 그때서야 긴장을 다소 푸는 모습이었다.
둘은 술잔을 들고 창가로 걸어갔다. 넓은 창문을 통해 바깥 도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나요, 사막에서 날 노려보던 당신의 차가운 눈빛이. 케일 경이 막아도 악착같이 따라와 결국 내 어깨에 검상을 남기고 사라졌었죠.”
그녀는 도현을 처음 만난 사막에서의 사건을 언급했다.
도현은 별말 없이 그녀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 그때는 용병으로서 의뢰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적이었던 그녀를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참 웃긴 것 같아요. 그랬던 당신과 이렇게 술을 나눠 마시다니…….”
말끝을 흐린 그녀는 술을 한 모금 한 후, 도현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옆에서 화산이 터져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것 같은 안정되고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
이디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힘주어 말했다.
“칼라치를 구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브링틱에서 날 구해 준 것도 고맙고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
“별말씀을.”
“그만 가 볼게요. 술 잘 마셨어요.”
빈 술잔을 도현의 손에 남긴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 얼굴은 왠지 모를 창피함에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칼라치와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뒤에서 들리는 도현의 담담한 말에 이디언은 걸음을 늦추며 뒤를 돌아봤다.
창가에 서 있는 도현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 * *
아침 햇살이 언덕 위에 세워진 저택을 비췄다.
귀족의 집이었다가 여관으로 변모한 그 집 앞에 아홉 필의 말이 푸드덕거렸다.
튼튼한 말 등에는 말안장이 채워져 있었고, 그 앞엔 말의 주인이 될 도현과 그 일행이 서 있었다.
호화로운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은 그들은 붉은 성을 향해 떠나기에 앞서 칼라치와 이디언, 헬구스와 작별 인사를 하려 했다.
“이 책은 돌려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에드는 방패술이 적힌 책자를 꺼내 칼라치에게 내밀었다.
“왜, 내 방패술이 가치가 없어서?”
“아니, 그게 아니라……. 구역장님은 살아나셨잖아요. 그러니 이 책을 가지고 가셔야죠.”
거구의 칼라치는 머리를 숙여 에드의 정수리에 그의 이마를 붙이며 으르렁거렸다.
“가지고 가, 네게 주는 거니까. 익히든 버리든 마음대로 하고.”
“……알겠습니다.”
에드는 책자를 다시 챙겼다. 검 하나만을 보고 달려가도 시간이 부족하지만, 칼라치의 반협박 섞인 눈빛을 차마 거부할 수는 없었다.
에드와 떨어진 칼라치는 도현에게 시선을 두었다.
“이제 헤어져야겠군. 널 잊지 않겠다.”
“나 역시.”
“인연이 되면 언젠가 또 만나게 되겠지.”
“그래, 그러길 바라지.”
칼라치와 가볍게 작별 포옹을 한 도현은 가까이 온 이디언과 헬구스를 차례로 응시했다.
이디언의 입가에 늘 차 있던 서늘한 미소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고, 헬구스는 안 그런 척했지만 내심 남부 대륙에 가는 게 어딘지 껄끄러워 보였다.
그럴 만한 게 그는 남부 대륙의 한 왕국에서 도망쳐 나온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부 대륙으로 그가 돌아가는 이유가 있었다.
“나도 사랑을 찾아가야겠어. 다크캐슬까지 날 찾아왔던 여자가 그곳에 있거든.”
“꼭 만나기를 바랍니다.”
도현은 헬구스와도 가볍게 포옹을 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저기 말일세, 보석 하나만 더 줄 수 없나? 칼라치와 이디언은 빈털터리야, 나밖에 돈이 없다고.”
포옹을 풀지 않고 그는 귓속말로 도현에게 사정을 했다.
“아침에 나오면서 당신 가방에 작은 선물을 넣어 뒀습니다.”
“오, 그랬나? 역시 자넨 마음이 넓어.”
헬구스는 도현의 등을 크게 두드리며 헛기침을 했다.
“쓸데없이 구걸하고 다니지 마세요.”
이디언이 째려보자 헬구스는 펄쩍 뛰었다.
“구걸이라니? 당장 남부 대륙까지 갈 경비도 없으면서 말이야, 오히려 내게 고마워해야지.”
“경비는 내가 알아서 마련할 수 있어요.”
“그놈의 자존심은. 왕족인 나도 이렇게 사는데 말이야. 안 그런가, 딘?”
영주 딘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친구 사이에 그 정도 도움도 못 받으면 말이 안 되지.”
이디언은 그들의 대화를 무시하며 도현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지만, 전날 밤에 나눈 대화가 있어서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뭣들 하는 거냐? 대체 언제 출발할 거야?”
말에 타고 있던 율리비어스가 무심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그의 재촉에 사람들은 차례로 말에 올랐다.
“또 봅시다. 건강들 하시오.”
어베인이 먼저 출발하자 그 뒤를 이어 율리비어스, 로나, 짐브리오, 영주 딘, 리드만 사제, 리타, 에드가 줄줄이 말을 출발시켰다.
동료들이 출발하자 뒤에 남은 도현은 말 위에서 칼라치와 이디언, 헬구스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은 뒤, 말 머리를 돌렸다.
“이럇!”
도현을 끝으로 모든 말이 떠나자, 여관 앞은 조용해졌다.
한동안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세 사람은 여관으로 들어가 짐을 챙겨 나왔다.
“칼라치, 도현에게 왜 복수를 부탁하지 않았나? 듣기론 태양의 마을을 찾아가 휴반트와 싸울 거라고 하던데.”
스므차 성주와 칼라치의 관계를 배 안에서 알게 된 헬구스는 길을 걸으며 물었다.
“스므차 성주는 더 이상 나를 옭아매는 존재가 아니야. 그는 과거의 잔재일 뿐이지. 따라서 스므차를 죽인 휴반트의 행동은 내게 더 이상 의미가 없네. 도현과 휴반트의 싸움은 이제 그들의 문제일 뿐.”
“두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아요?”
이디언이 묻자 칼라치는 멀리 항구에 떠 있는 배를 응시하며 답했다.
“폭주를 극복한 도현의 검은 더욱 날카로워졌을 거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자 반지
수많은 병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응당 휘날려야 할 부대 깃발 대신 흰색 깃발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 깃발을 따라 이동하는 병사들의 얼굴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덜컹거리는 마차에는 부상병들도 보였다.
갑옷도 병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병사들은 영락없는 패잔병의 모습이다.
“소문이 맞나 봐요. 사자동맹군이 항복을 하고 철수하고 있다는 게.”
머리카락이 제법 길게 자란 금발의 로나가 경사진 숲에서 아랫길을 따라 통과하는 대규모 병력 이동을 보며 말했다.
“잘됐군. 곧 테르논의 석판을 볼 수 있겠어.”
율리비어스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수백 년 전 베일 가문이 테르논 지역에서 발견해 보관해 오던 고대의 석판을 연구하면 새로운 마법 지식을 얻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해석하지 못한 석판이라던데 가능하겠어요?”
숲 아래 길을 내려다보던 리타가 고개를 돌려 묻자, 율리비어스는 코웃음을 치며 말에 올라탔다.
“테르논의 석판은 내 이름을 따 율리비어스의 석판으로 그 이름이 바뀔 것이다. 후세에 그 석판을 해석한 유일한 마법사가 되겠지.”
“자신만만하군요. 나중에 저도 그 내용을 알려 주세요.”
“이 녀석들을 버리고 날 따라오면 내가 알려 주도록 하지. 날 스승으로 모시겠느냐?”
그의 요구에 리타는 고개를 저었다.
“사양할게요.”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곧장 싫다고 하는 그녀의 행동에 자존심이 상한 율리비어스는 그녀를 잠시 노려보다가 옆에 서 있는 도현에게 말했다.
“전쟁이 끝났으니 굳이 너희들과 같이 다닐 이유도 없겠지.”
“어차피 대공에게 가는 길이 아닙니까? 사아몬 요새에 대공이 있다고 하니 같이 가시죠.”
“필요 없다. 그동안 너희들과 함께하느라 아주 피곤했어. 난 지금부터 혼자 가겠다.”
율리비어스가 훌쩍 떠나자 짐브리오는 어이없다는 듯 한 마디 했다.
“진짜 피곤한 게 누구였는데. 하여간 락제프보다 더 피곤한 인간은 아마도 저 인간밖에 없을 거야.”
-네 녀석은 왜 또 날 자극하는 거냐?
리타의 주머니 속에서 락제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요즘 들어 자수정 밖으로 목소리를 내는 일이 드물었다. 율리비어스가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수정 속에 고대 마법사의 영혼이 갇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율리비어스의 성격상 락제프를 한시도 그냥 두지 않고 괴롭히며 뭔가를 알아내려 했을 것이다.
그 점을 미리 짐작한 락제프는 그동안 없는 존재처럼 리타의 호주머니 속에서 얌전히 지내왔다.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랬소. 심심할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 주는 척은.
락제프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스승님, 테르논의 석판에 대해 뭐 알고 있는 건 없으세요?”
리타가 자수정을 꺼내 바위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 주변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딱딱한 빵으로 점심을 대신하려 했다.
-모른다. 내가 비록 고대 사람이지만 고대에 벌어진 수많은 일을 어찌 다 알겠느냐? 그리고 너희들은 편하게 고대라고 말하지만, 고대라는 시대는 수천 년을 뛰어넘는 긴 시간이다. 검은 용이 넘어오기 전부터 이 세상은 존재했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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