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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535화 (535/575)

[535] 디 임팩트 22권 10화

“저도 알아요. 혹시나 해서 여쭤 봤어요.”

-그나저나 검은 용이 훌쩍 떠나 버렸으니, 이제 누가 날 소멸시켜 준단 말인가?

실망하는 그의 어조에 리타가 위로하듯 말했다.

“스승님, 제가 있잖아요. 제가 늙어서 죽을 때, 그때 소멸시켜 드릴게요. 같이 죽는 거예요, 헤헤.”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에게 락제프가 버럭 고함을 쳤다.

-왜 하필 그때냐! 난 지금도 힘들다.

“지금은 소멸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으니까요.”

-난 다 알고 있다! 넌 소멸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 안 그런 척할 뿐. 아니냐?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눈을 동그랗게 뜬 리타는 빵을 우물거리며 숲 아래 길에 시선을 두었다.

전쟁에 패해 베일 가문의 영지를 떠나는 사자동맹군의 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 * *

반쯤 불타 버린 언덕 위 사아몬 요새는 얼마 전까지 사자동맹군 제7지휘부가 자리한 요충지였다.

이틀 전 이곳을 탈환한 대공은 사자동맹군에 화해가 아닌 항복을 받아 냈다.

대공과 사자동맹군 측 영주들이 참여한 가운데 이뤄진 항복 의식은 빠르고 간결했고, 사자동맹군은 대공에게 막대한 배상을 약속하며 굴욕적인 철수를 하기에 이르렀다.

베일 가문의 전쟁이 막을 내린 것이다.

“전쟁은 이겼지만 우리 가문이 받은 피해를 복구하려면 족히 수십 년은 필요할 겁니다.”

무너진 사아몬 요새의 첨탑 위에서 주변을 내려다보는 대공의 얼굴은 승리의 기쁨이 보이지 않았다.

전쟁 중에 죽은 그의 부하들과 영지민들, 반군 측에 서서 그와 대립했던 그 수많은 자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그의 백성이자 신하들이었다.

“가문의 역사서에 내 이름은 가장 밑에 기록될 겁니다. 통치력이 부족해 가문을 위기에 빠트린 자로 말이죠.”

“과한 책임 의식입니다. 음모를 꾸미는 자들을 어찌 다 가려낼 수가 있겠습니까? 중요한 건 그 후의 대처지요. 대공께서는 훌륭히 이 전쟁을 수행하셨고, 이기셨습니다. 칭송받아 마땅한 업적입니다.”

대공의 숙부 돈조르니 베일은 조용한 어조로 대공을 칭찬했다.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뿐입니다, 숙부.”

대공은 무거운 눈빛으로 묵묵히 요새 주변에 가득한 군막을 응시했다.

“그만 내려가시지요. 베일 연합군의 영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몸을 돌린 대공은 첨탑을 내려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숙부, 그동안 이 못난 조카를 위해 고생하셨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숙부께서 백도현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아마 이 전쟁은 지금처럼 쉽게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

돈조르니는 부정하지 않았다.

샤르비티와 그 사촌들이 베일성에서 죽었다는 급보를 받고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전쟁의 흐름이 그때부터 그들에게 돌아섰다.

백도현은 위험한 임무를 완벽히 수행해 낸 것이다.

“곁에 두고 싶은데, 그를 붙잡아 둘 묘책이 없겠습니까?”

대공의 물음에 잠시 고민을 하던 돈조르니는 고개를 저었다.

“대공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는 떠날 겁니다. 억지로 붙들려 하지 마십시오. 제가 보기에 그는 제라이즈의 부탁을 받고 우리를 위해 싸워 준 것뿐입니다. 대공에 대한 충성심을 기대하긴 힘들 겁니다.”

“가슴에 꽂히는 냉정한 지적입니다.”

쓴웃음을 흘리던 대공은 마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그의 아내 캐서린을 발견했다.

잔뜩 상기된 얼굴의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만나 봤소?”

대공이 묻자 캐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이더군요.”

“아이들과 함께 있지, 여긴 무슨 일로 온 것이오?”

“할 말이 있어요. 단둘이 얘기 좀 해요.”

캐서린은 폐허처럼 변한 사아몬 요새의 건물 안을 가리켰다.

“영주들이 기다리고 있소. 나중에 얘기합시다.”

그가 사아몬 요새 밖에 설치된 거대한 군막으로 가려 하자, 캐서린이 재빨리 그의 옆을 함께 걸으며 말했다.

“잠깐이면 돼요.”

“시간이 없소, 미안하오.”

“시간이 없다면, 시간을 만들어요!”

뾰족하게 말하는 그녀를 대공은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자중하시오, 부인. 여기가 어디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오?”

“다시 말할까요? 시간이 없으면 시간을 만들어요, 지금 당장.”

물러서지 않는 그녀를 대공은 말없이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숙부, 먼저 가셔야겠습니다.”

“예, 그리하지요.”

대공은 만찬장으로 가는 발걸음을 돌려 불탄 흔적이 역력한 사아몬 요새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핏자국도 보였다.

“모두 물러가라.”

“예!”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친위대들을 물린 그는 캐서린과 마주 섰다.

“밖에서 이러는 건 결코 좋지 않소, 부인.”

“나도 그래요. 병사들 앞에서 목소리나 높이는 여자 취급을 받기는 싫으니까요.”

“대체 왜 이렇게 변했소? 그 상냥하고 차분했던 당신은 어디로 간 거요?”

대공은 안타까운 어조로 물었다.

“나를 변하게 한 건 당신이에요! 바로 이 베일 가문! 온통 가문의 명예와 역사만 따지는 이 고리타분함! 자식의 목숨마저 모른 체하는 그 냉정함!”

“그 이야기라면 그만합시다. 당신에게 충분히 비난을 받았소.”

두통이 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공은 이마에 손을 댔다.

“자, 얘기해 보시오. 무슨 일이오?”

“노드빌 경을 풀어 주세요. 공이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감옥에 가둬 두다니, 이 무슨 경우 없는 짓입니까?”

베일성에서 대공의 자식들을 무사히 구해 온 노드빌은 사아몬 요새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 소식에 분노한 캐서린이 달려온 것이다.

“대공의 명은 지엄한 것이오.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한 이치. 누구 한 사람 예외를 두면, 차후 대공의 권위는 힘을 잃게 마련이오.”

“그는 당신 자식들을 구해 왔습니다!”

“결과가 좋다고 해서 그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오.”

대공은 반쯤 부서진 의자에 무거운 표정으로 앉으며 답했다.

캐서린은 떨리는 음성으로 호소했다.

“제발 부탁이에요. 당신도 살아 돌아온 아이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을 거 아니에요. 그 기쁨을 선사한 노드빌을 이대로 참수한다면 당신은 평생 후회 속에 살 거예요.”

“대공의 자리는 본래 그런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이 넓은 영지를 어떻게 말 한마디로 움직일 수가 있겠소?”

“대공, 정말 이러실 겁니까? 좋습니다, 노드빌 경을 죽이시려면 저까지 처벌하세요. 제가 대공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그를 보낸 당사자니까요.”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며 불꽃을 만들었다.

대공은 부서진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캐서린 앞에 섰다.

“정말 그럴 각오가 되어 있소? 당신을 벌하게 되면 나는 당신만으로 끝내지 않을 것이오. 당신 오라비의 영지로 쳐들어가 그를 영주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거요. 그와 당신의 우애가 얼마나 깊은지 내가 아니, 어떻게 당신을 벌하고 후환인 그를 남겨 두겠소.”

가슴을 차갑게 하는 그의 날카로운 말에 캐서린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정말 나와 맞설 것이오?”

캐서린은 그럴 거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집안을 생각하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신중하시오, 부인. 만약 백도현이 베일성에서 노드빌을 돕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함정에 빠져 아이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을 것이오. 부인이 아이들을 구했다는 착각은 하지 마시오.”

“…….”

대공은 몸을 떨고 있는 캐서린의 두 어깨를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내 말을 이해했으면, 그만 돌아가시오.”

“노드빌 경은요?”

힘없는 얼굴로 캐서린이 물었고, 대공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뗐다.

“그는 벌써 풀려났소. 감옥에 있다는 이야기는 내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숙부가 퍼트린 것일 뿐.”

“정말인가요?”

깜짝 놀란 캐서린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대공을 올려다봤다.

“난 당신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있소. 당신이 다치는 걸 원하지 않소.”

“알조베티!”

그녀는 대공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깊게 끌어안았다.

“그만 나갑시다. 영주들을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오.”

밖으로 나온 대공은 만찬장으로 향하다 말을 타고 멀리서부터 언덕 방향으로 올라오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했다.

‘그가 왔군.’

대공은 선두에서 말을 몰고 오는 도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무표정한 얼굴에 한 줄기 미소를 그렸다.

낮에 율리비어스가 도착해 도현이 곧 올 거라고 했는데, 그의 말대로였다.

잠시 후, 말에서 내린 도현과 일행은 대공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올렸다.

“어서들 오라.”

크게 반긴 대공은 영주들이 모여 있는 만찬장으로 도현을 직접 데리고 들어갔다.

“베일성에서 샤르비티를 단죄한 백도현이오. 다들 인사들을 나누시오.”

자리에 모여 있던 수십 명의 영주들은 도현과 말 한마디라도 더 섞으려 노력했다.

대공이 도현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친밀해 가까운 친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조금만 늦게 올 걸 그랬나?’

도현은 화려한 갑옷 차림의 영주들에 둘러싸여 있는 게 여간 어색하지 않아서 만찬장을 서둘러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대공이 버티고 있어서 도망 나올 수도 없었다.

“나도 영주인데, 난 안 불러 주나?”

영주 딘이 만찬장을 기웃거릴 때 돈조르니가 다가와 나머지 일행을 커다란 군막으로 안내했다.

“수고들 했네. 아쉽겠지만 여기서 쉬고들 있게.”

안에는 먼저 도착한 율리비어스가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또 만났네요?”

리타가 반가운 척하자 율리비어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반쯤 틀어서 술잔을 비웠다.

“알은척하지 말거라, 피곤하니까.”

* * *

밤이 깊어질 무렵 만찬장을 나온 도현은 대공을 따라 언덕 위에 그림처럼 서 있는 사아몬 요새로 갔다.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요새는 본래의 웅장함은 사라지고 달빛 속에 기괴함이 엿보였다.

불탄 성문을 통과하며 대공은 도현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영주들과 함께 있는 자리가 불편했나?”

“아닙니다. 불편하다기보다는 그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도현의 대답에 대공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성문을 통과한 대공은 허리를 굽혀 요새의 흙을 한 줌 쥐었다.

“이 흙이 베일 가문에 것이 된 것은 대략 3백 년 전이네. 당시만 해도 이 사아몬 요새는 우리 가문과 적대적인 가문의 소유였지. 이 땅을 탐낸 우리 선조들은 수년의 전쟁 끝에 간신히 이 요새와 인근 땅을 얻을 수 있었네.”

베일 가문의 역사를 담담히 읊은 대공은 흙을 바람에 뿌리며 도현을 응시했다.

“그 뒤로도 여러 이유로 이 요새는 자주 파괴가 됐네. 지금은 멸망한 왕국의 기사단에 의해서 파괴가 되기도 하고, 역시 멸망한 대영주의 군사들이 쳐들어와 성벽을 부수고 그 돌을 언덕 아래로 굴려 버리기도 했지. 하지만 이 요새는 우리 가문의 품으로 언제나 다시 돌아왔네. 지금처럼 말이야.”

“전쟁에서 승리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듣기 위해 한 말이 아니네. 이 요새의 역사를 그저 말해 주고 싶었을 뿐이야.”

대공은 담담히 웃으며 부서진 성벽의 계단을 밟았다.

“내일 떠나겠다고?”

“예.”

전쟁이 끝난 이상 이곳에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 타투의 차원 이동 에너지도 그리 길게 남은 상황은 아니었다.

“오자마자 떠나려 하다니, 이대로 나와 함께 베일성까지 같이 가는 건 어떤가? 자넬 위해 해 주고 싶은 게 많은데 말이야.”

“감사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쉽게 됐군.”

대공은 성벽에 올라 불이 켜진 수많은 군막들을 응시했다. 술을 마시며 즐기는 병사들의 흥겨운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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