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6] 디 임팩트 22권 11화
“큰 공을 세웠으니, 상을 내려야겠지. 원하는 걸 말해 보게, 무엇이든 들어주겠네.”
대공은 도현이 임무에 성공했을 시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는 약조를 했었다. 지금 그때가 온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도현이 말문을 열었다.
“그럼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일행 중에 과거 영주였던 사람이 있습니다. 새로운 영지를 찾아 떠돌고 있는데, 그가 다스릴 적당한 땅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히 말하게. 자네가 다스릴 땅인가, 아니면 자네 친구가 다스릴 땅인가?”
“제 친구 딘입니다.”
대공은 말없이 도현을 응시했다.
대공이 들어주겠다는 소원을 그는 친구를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겠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확고해 보이는 도현의 눈빛에 대공은 더는 묻지 않고 수락을 했다.
“자네 뜻이 그렇다면 절차를 거쳐 딘에게 영지를 주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대공.”
“하지만 시간이 좀 필요할 거야. 전쟁은 끝났지만 정리할 게 많으니까.”
“물론입니다.”
도현은 기뻐하며 답했다.
‘이제 영주님도 영지가 생기게 됐어.’
칼라치가 알커서스의 땅을 도현에게 양도했지만, 그곳은 눈 내리는 척박한 땅이고 영지라 부를 수 없는 작은 크기에 사람도 몇 살지 않는 곳이었다.
영주 딘이 영주로서 큰 뜻을 가지고 통치할 만한 지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도현은 대공에게 영지를 요청했다.
‘설마 대공이 알커서스의 땅과 같은 곳을 주지는 않겠지?’
마음 한편에 살짝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그는 대공의 인품을 믿기로 했다.
“내 딸을 본 적이 있는가?”
“예?”
잠시 딴생각을 하던 도현은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는 대공의 등을 쳐다봤다.
“내 딸 말일세, 노드빌이 구해 온.”
“아, 예. 본 적이 있습니다, 베일성에서.”
“얘기는 해 봤나?”
“아닙니다. 근처에서 보기만 했을 뿐, 대화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도 저를 알지 못합니다.”
“아름답지 않던가? 캐서린을 닮아서 그 미모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할 정도지.”
대공은 딸의 외모를 극찬하며 도현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도현이 어깨가 붙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자 그가 속삭였다.
“내 딸과 결혼할 생각은 없는가?”
“예?”
뜻밖의 제안에 도현의 눈이 커졌다.
“내 딸과 결혼하면 죽은 샤르비티의 영지와 사촌들의 영지를 모두 자네에게 주겠네.”
대공은 가문의 번창을 위해 도현의 힘이 필요했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가문의 힘이 상당 부분 소진됐고, 이를 빠른 시간 안에 극복하기 위해서는 도현처럼 강한 사람이 그를 도와줘야 한다.
“어쩔 텐가? 수락할 텐가?”
대공의 눈이 어둠 속에서 강하게 빛을 내며 도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 딸과 결혼해 우리 베일 가문의 일원이 되게. 자넬 가족처럼 여기겠네. 결코 차별을 두지 않도록 하지.”
갈수록 강해지는 대공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한동안 마주 보던 도현은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너무 엄청난 제안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하지만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뿐더러 돌아다니며 겪는 모험이 좋습니다. 죄송합니다, 대공.”
“다시 생각해 보게.”
“……역시 안 될 일입니다.”
“음.”
대공은 굳은 표정으로 성벽의 돌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도현의 거부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강요할 수는 없었다.
“싫다면 어쩔 수 없지.”
* * *
“대공이 자네에게 그런 제안까지 했단 말인가?”
돈조르니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도현을 보며 껄껄 웃었다.
“웃으실 일이 아닙니다. 제가 거부하자 대공께서는 인사도 없이 성벽을 내려가셨습니다.”
“걱정 말게, 대공은 그 정도 일로 자네에게 원한을 품을 분이 아니시니까. 아마도 일부러 화난 척하고 성벽을 내려가셨을 거네. 오늘 밤 자네가 잠을 자며 마지막으로 심사숙고 해 보기를 바라는 의도된 행동이지.”
돈조르니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은근히 물었다.
“그런다고 해서 자네 마음이 바뀔 건 아니지 않는가?”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그럴 줄 알았네. 아무튼 이게 다 대공이 자넬 가까이 두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이해하게.”
“저도 그렇게 느끼고는 있습니다.”
“하아, 전쟁이 끝나고 나니 피로가 쏟아지는군. 이 나이에 너무 열정적으로 움직였어.”
돈조르니는 조금은 지친 기색으로 의자에 등을 기대며 군막 천장을 올려다봤다.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전쟁이 훑고 지나가며 남긴 상처가 적지 않아, 적어도 1년은 대공을 곁에서 도와야 할 입장이었다.
쉬는 건 그 이후였다.
“샤르비티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은 없었나?”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폭주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도현은 조금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라……. 샤르비티의 아버지는 나와 친형제네. 둘째 형님이었지. 무척 똑똑하고 용맹한 사람이었어. 왜 자기는 대공이 될 수 없냐고 어린 나를 붙들고 하소연할 때도 있었지. 그때부터 난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었네. 내가 어린 나이에 가문을 뛰쳐나가 세상을 떠돈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었네. 큰형과 둘째 형이 다투면 어느 편에 서야 할지 혼란스러웠거든.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안심을 했는데, 수십 년이 지나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둘째 형을 생각하는 회한이었을까, 돈조르니는 붉어진 눈가를 손가락으로 찍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미안하네. 긴장이 풀렸는지 쓸데없는 감정이 솟구치는 군.”
“아닙니다.”
가족 간의 싸움이 제일 깊은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도현은 묵묵히 술잔에 술을 따라 입에 털어 넣었다.
“내일 이곳을 떠나면 어디로 가는 건가?”
돈조르니는 대적할 자가 없을 만큼 강자인 도현의 다음 행보가 궁금했다.
도현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이오나디 사막에 가려고 합니다.”
“흠, 그곳이라면 사막 중에서도 아주 환경이 안 좋기로 유명한 곳인데.”
“가 보셨습니까?”
돈조르니는 옛날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젊었을 때 한번 가 본 적이 있네. 물 구하기도 힘들고, 유목민들은 사납기 그지없네. 게다가 몬스터와 맹독의 사막 뱀들이 여행자들을 빈번히 습격하는 아주 고약한 곳이지. 모래폭풍은 말할 것도 없고. 한데 그곳엔 왜 가려 하는가?”
“철가면 휴반트와 그곳에서 승부를 보기로 했습니다.”
“휴반트와?”
“네.”
도현은 짤막하게 베일성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랬었군. 사막에서의 결투라, 아주 볼만하겠어.”
돈조르니는 도현이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동료들도 같이 가나?”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에이저 경은 다른 곳에 있습니까? 내일 떠나기 전에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데요.”
“날 찾는 건가?”
은색 활을 등에 멘 늙은 궁수 에이저가 군막을 젖히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도현과 가볍게 포옹을 하며 반갑게 말했다.
“난 자네가 임무를 성공시킬 줄 알았네.”
“감사합니다.”
“여기 오기 전에 자네 동료가 모여 있는 군막에서 술을 한잔하고 오는 길이네. 내일 곧장 떠난다고?”
“예, 그렇게 됐습니다.”
“어허, 이렇게 섭섭한 말이 어디 있나? 붉은 성에서 리타가 해 준 음식을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에이저는 흰 턱수염을 훑어 내리며 마땅찮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지 말고 며칠만 더 머물다 가게.”
도현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떠나야 할 때는 과감히 떠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대공에게 미련을 주어 더 난감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냉정한 친구 같으니라고. 그럼 벌주를 열 잔만 마시게. 그럼 놓아주지.”
“그게 나을 것 같습니다.”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돈조르니의 군막에서 에이저와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 * *
날이 화창했다. 움직이기 좋은 날이다.
하늘에 높이 뜬 태양을 올려다보던 도현은 친위대가 안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자, 동료들과 함께 대공의 군막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좌우로 대공의 신하들이 도열해 있었고, 제일 안쪽엔 대공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대공을 뵈옵니다.”
도현과 일행은 세로로 두 줄로 서서 대공에게 예를 취했다.
“고개를 들라.”
대공은 여덟 명의 얼굴을 한 명씩 둘러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많은 적군 속에서 샤르비티를 죽인 그대들의 용맹은 이 전쟁을 기록할 때 가장 중요한 위치에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이를 치하하지 않을 수 없다. 가지고 오라.”
베일 가문의 상징인 사자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금반지 여덟 개가 등장했다.
모방할 수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제작된 금반지는 인장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사자 반지는 베일 가문에 지대한 공을 세운 자에게만 수여되는 것으로, 그 착용자는 베일 가문의 영지에서 크게 존중받을 것이다.”
근엄한 분위기 속에서 대공은 직접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자 반지를 나눠 줬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대공.”
도현은 사자 반지를 살펴봤다. 어제 돈조르니 경에게 듣기는 했지만 실물로 보니 신기했다.
‘끝에 내 이름이 있어.’
전문 세공사들이 정성들여 밤새워 제작한 게 틀림없었다. 이 반지가 있으면 베일 가문의 영지 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고, 귀족의 신분으로 대접받는다.
대공 직할 영지뿐만 아니라 대공의 지휘를 받는 영지의 영주들까지 이 사자 반지를 존중해 주기 때문에 그 가치는 매우 컸다.
그러나 이런 물질적인 의미보다는 베일 가문이 인정한 용사라는 상징성이 더 부여된 물건이다.
‘칼라치도 왔으면 이 반지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군.’
사자 반지를 착용한 도현은 뒤를 돌아봤다.
대공에게 반지를 받은 짐브리오의 입이 좌우로 길게 늘어나 있었다. 그 옆에 로나도 사자 반지가 마음에 드는지 손가락에 끼운 채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고 있었다.
“에드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대공!”
기합이 잔뜩 든 에드는 뻣뻣한 자세로 대꾸했다.
“언제든 내게 와도 좋다. 널 귀하게 대우하겠다.”
대공은 넌지시 에드를 유혹했다.
에드는 도현의 제자였고, 에드를 붙잡으면 도현도 베일 가문과 인연을 끊을 수 없으리라는 게 대공의 속셈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드는 그저 좋아서 크게 답했다.
“감사합니다, 대공!”
“좋아.”
에드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준 그는 마지막 여덟 번째 반지의 주인공인 리타 앞에 섰다.
“흑마법사 리타, 수고했다.”
“헤헤, 감사합니다, 대공.”
“친위대에 마법사 자리가 비었는데, 들어올 생각은 없는가?”
“나중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리타는 면전에서 거절하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고맙다는 표정만 지었다.
“그래, 잘 생각해 보게.”
리타의 손에 마지막 사자 반지를 넘겨준 대공은 앞으로 돌아와 손짓을 했다.
“검을 가지고 오너라.”
붉은 천으로 위가 덮인 길쭉한 상자를 친위대원 중 한 명이 들고 왔다.
대공은 천을 걷어 그 안에 있는 고풍스러운 검을 들었다.
“이 명검은 수백 년 전 나의 선조가 사용했던 검이다. 그 날카로움은 바위도 자르고, 단단함은 어느 검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지.”
그가 검을 뽑자 서늘한 예기가 도현의 눈앞까지 도달했다. 실로 범상치 않아 보이는 명검이었다.
‘외날 검이다.’
한쪽만 날이 선 칼로, 도현이 사용하는 검의 형태였다.
대공이 검을 다시 검집에 넣자 예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오래전 선조가 사용했던 검을 그대에게 주는 게 이토록 기쁠 줄은 몰랐다. 백도현, 앞으로 나오라.”
도현은 몇 걸음 걸어 의자 앞에 서 있는 대공에게 다가갔다.
“잘 사용하게.”
“영광입니다, 대공.”
도현은 두 손으로 공손히 검을 받쳐 들고 뒷걸음질 쳐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공은 한동안 도현을 응시하다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베일성에서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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