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 디 임팩트 22권 12화
* * *
대공의 군막을 나온 도현과 일행은 한동안 과묵하게 침묵을 유지하다 거리가 좀 멀어지자 서로 반지를 확인하며 기뻐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사자 반지로군, 흐흐흐.”
“예쁘기도 예쁘네. 안 그래, 로나?”
리타가 반지를 옷에 문지르며 물었다. 로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 제 반지를 왜 가지고 가십니까?”
“일곱 신의 사제가 이런 반지가 왜 필요하겠나? 내가 보관하고 있겠네.”
“돌려주십시오, 영주님.”
도현은 동료들이 반지에 관심이 쏠려 있을 때 상으로 받은 검을 뽑아 봤다.
‘무게와 중심이 잘 잡혀 있다. 손에도 크게 어긋나지 않고 잘 맞아.’
그는 살짝 내공을 주입해 봤다. 그 순간 청광이 폭사되어 반지를 비교하며 기뻐하던 동료들의 눈을 자극했다.
“아이고, 깜짝이야! 뭐야, 그 빛은?”
짐브리오가 눈을 비비며 다가왔다.
“검을 잠깐 시험해 봤습니다. 과연 명검이라고 부르기 부족하지 않네요.”
도현은 손가락으로 검신을 가볍게 두드려 본 후, 검집에 넣은 뒤 허리에 찼다.
베일성에서 싸울 때 파괴된 세타이움 장검을 대체할 만한 좋은 검이었다.
비록 한 자루밖에 안 되는 게 아쉬웠지만, 당장은 만족할 만했다.
“좋아 죽는구나.”
율리비어스가 비웃듯 말하자 짐브리오가 턱을 올리며 되받았다.
“남이야 좋아 죽든 말든. 한데, 당신은 왜 오지 않은 거요?”
“사자 반지가 필요 없으니까.”
“쳇, 잘난 척하기는. 이 반지가 얼마나 유용한데.”
“내게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오직 마법만이 중요하지.”
율리비어스는 대공과 함께 베일성으로 같이 갈 생각이었다. 테르논의 석판이 베일성 모처에 숨겨져 있다고 하니,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또 보자꾸나.”
율리비어스는 태양 빛이 눈이 부셨는지 등 뒤의 모자를 앞으로 당겨쓰며 도현을 스쳐 지나갔다.
도현은 멀어지는 율리비어스의 등을 잠시 바라보다가 동료들과 짐을 챙겨 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돈조르니와 뜻밖의 사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대공의 부인 캐서린이었다.
도현과 동료들이 예를 취하자 캐서린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은 후, 도현에게 걸어갔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당신이 아이들을 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들었어요.”
“모든 건 노드빌 경의 힘입니다. 저와 여기 동료들은 그저 그를 위한 시간을 벌어 줬을 뿐입니다.”
“겸손할 필요 없어요, 다 들었으니까요.”
캐서린의 목소리는 도현에 대한 깊은 감사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끔찍해.’
붉은 성을 구하고 베일성에서는 반군의 수뇌부를 없앴다. 게다가 그녀의 자식들을 구하는 데 도움까지 줬다.
“당신이 이 전쟁을 구한 영웅입니다.”
영웅이라는 거창한 칭호에 도현은 낯이 뜨거워졌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날 찾아오세요. 난 늘 당신 편일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캐서린은 깊은 시선으로 도현을 바라보다가 마차에 올라 그 자리를 떠났다.
조용히 옆에서 지켜만 보던 돈조르니가 미소를 지었다.
“영웅이란 말에 얼굴이 소년처럼 붉어지는군. 냉정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부끄러움을 탈 줄도 알아.”
“대공 부인이 그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솔직히 당황했습니다.”
“익숙해지게, 앞으로 세상은 베일 가문에서 뛰어난 활약을 벌인 자네 이름을 기억할 테니까.”
“노력해 보죠.”
담담히 웃은 도현은 돈조르니에게 정중히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알게 돼서 영광이었습니다.”
“영광까지야. 나는 자네를 부려 먹은 사람일 뿐인데.”
미소를 지으며 도현의 어깨를 두드린 돈조르니는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잘들 가시게, 또 보자고. 아, 그리고 딘, 나중에 베일성으로 오게, 도현이 청한 대로 자네에게 영지가 내려질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영주 딘은 도현에게 그런 청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도현은 기어이 대공에게 영지를 받아 냈다.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폭주부터 영지까지, 도현은 딘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푼 것이다.
“돈조르니 경, 그럼 저희는 가 보겠습니다.”
“잘 가시게.”
여덟 필의 말은 먼지구름을 만들며 사아몬 요새를 떠나 남서쪽으로 계속 이동했다.
“바람이 몹시 시원하군, 하하하!”
어베인의 시원한 웃음소리에 전염이 됐는지 말을 탄 사람들도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
“대장, 브링틱에서 베일 가문까지, 정말 우리 모두가 무사한 게 다행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짐브리오의 외침에 어베인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지. 우린 정말 뛰어난 조합이야. 그 중심에 도현이 있기에 더 그렇지.”
“맞아요, 헤헤.”
리타는 웃으며 작은 체구로 말을 신나게 몰았다.
그날 밤 숲에 모닥불을 피운 그들은 야영 준비를 했다.
모두가 잘 준비가 끝나자, 도현이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구에 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차원 이동의 힘이 다한 거야?”
리타가 서둘러 묻자 도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휴우, 다행이네. 난 또.”
“다녀오게, 지구에 있는 친구들도 보고 싶겠지. 갚아야 할 복수의 대상도 있고.”
도현의 사정을 알고 있는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 다시 돌아오는 거야. 안 돌아오면 안 돼.”
리타는 혹시나 싶어서 몇 번이나 도현에게 확인을 받았고, 로나도 말은 안 했지만 눈빛으로 도현이 돌아오기를 바랐다.
“뭘 걱정을 해, 아직 차원 이동의 힘이 저 문신에 남아 있다잖아. 기다리면 되지.”
짐브리오는 헛기침을 하며 도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시 볼 수 있겠지?”
“걱정 마세요, 돌아올 테니까.”
도현은 걱정을 숨기고 있는 동료들의 눈빛에 마음 한쪽이 무거워졌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엔 진짜 이별을 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찌이이잉.
붉은색으로 빛나는 타원형의 게이트가 열렸지만 그것은 도현의 눈에만 보였다.
“다녀오겠습니다.”
“꼭 돌아와!”
리타가 손을 흔들었고,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게이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가로등
세상에 나쁜 놈들이 많고 많지만, 정말 쓰레기 같은 자식들은 없는 사람 등골을 빼먹는 놈들이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생명 줄 같은 돈을 차일피일 미루며 주지 않는 녀석들.
그놈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장철호는 꼭 확인하고 싶었다.
“이보게 철호, 이러지 말게.”
“홍 반장님, 반장님 밑으로 일곱 명이나 있습니다. 그들 모두 어려운 살림을 책임지는 가장입니다. 저야 결혼하지 않아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한 푼이 아쉬운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아, 일주일 뒤에 준다잖아.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나이 지긋한 홍 반장은 철거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장철호의 가슴을 손으로 밀며 사정을 했다.
“일주일 뒤에 준다는 말로 벌써 한 달 가까이 시간을 끌었습니다. 이대로 시간을 질질 끌다가 제풀에 지치기를 원하는 것 같은데, 천만에 말씀입니다.”
장철호는 야구 모자를 거꾸로 쓰며 3층에 간판을 건 철거 사무실 유리창을 올려다봤다.
“다 내 잘못이네, 일거리를 잘못 소개한 내 잘못이라고.”
장철호와 오랫동안 막노동판을 같이 다닌 홍 반장은 그를 비롯해 여러 명을 데리고 철거 사무실 쪽 일을 맡았다.
오래된 건물의 잔해를 치우는 일이었는데, 열흘 치 임금 중 닷새 임금을 아직 못 받고 있었다.
“반장님이 왜 잘못입니까, 주지 않는 저놈들 잘못이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좀 참게. 이쪽 일을 하다 보면 으레 이런 일은 한두 번씩 겪는 거야. 이럴 때마다 들고일어나면 소문이 나서 자네 계속 일하기 힘들어져.”
“그래도 제때 받아야 할 건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 자, 그러지 말고 나랑 가서 소주나 한잔하세.”
장철호와 홍 반장이 철거 사무실이 입주한 낡은 건물 입구에서 실랑이를 벌일 때, 고급 승용차 한 대가 건물 앞에 섰다.
차에서 내린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은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는 홍 반장에게 걸어와 삐딱하게 말했다.
“홍 반장이 여긴 웬일이오?”
“저, 그게 말입니다.”
홍 반장이 난처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자 철거 사무실을 운영하는 고성환은 담뱃재를 바닥에 털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밀린 임금은 준다고 하잖아. 그거 때문에 온 거야?”
“돈이 급한 사람이 많아서 말입니다.”
홍 반장은 앞으로 나서려는 장철호의 손목을 잡으며 굽실거렸다.
“지랄들 하네. 거 돈 몇 푼 안 되는 걸 가지고.”
“몇 푼 안 되는 그 돈을 왜 제때에 안 주는 겁니까?”
보다 못한 장철호가 나섰다.
“여덟 사람 닷새 치 임금, 4백만 원, 당장 주시오.”
“이건 또 뭐야?”
고 사장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바지에 손을 넣었다. 건들거리는 폼이 영락없는 건달이었다.
“홍 반장, 얘 뭐야? 뭔데 나서?”
“죄송합니다, 고 사장님. 사정이 급해서 그렇습니다.”
“준다고 하잖아. 다른 사람들은 잘도 기다리는데, 왜 당신은 그렇게 보채고 그래.”
“형님, 무슨 일입니까?”
3층 창문이 열리며 짧은 스포츠머리의 젊은 남성 몇이 고개를 내밀었다.
“응, 아니야, 아무것도.”
“저희들 내려갈까요?”
“됐어, 이 자식들아. 창문 닫아.”
“예, 형님.”
사무실 식구들이 창문을 닫고 들어가자 고 사장은 홍 반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홍 반장, 내가 돈을 안 주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조금 늦는다는 건데, 그걸 못 참고 이러기야?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었어? 상황 파악을 좀 하자고, 응?”
담배 연기를 홍 반장에게 길게 내뿜은 그는 옆에서 인상을 쓰고 있는 장철호의 뺨을 손바닥으로 귀엽다는 듯이 살짝 쳤다.
“자식, 인상 한번 고약하네.”
고 사장은 이들을 비웃으며 유유히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홍 반장님. 저 양아치 같은 새끼가 철거 사무실 사장입니까?”
“후우, 그렇다네.”
가볍게 한숨을 내쉰 홍 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느꼈겠지만 저 인간은 반건달이야, 예전에 그런 쪽 일을 했다는군. 그러니 이번엔 그냥 참게.”
장철호는 3층 철거 사무실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누구든 일을 시켰으면 돈을 줘야 한다.
하다못해 도현이 넘어간 이계에서도 용병과 의뢰인의 관계가 확실하다고 하지 않았나.
‘이계인보다 못한 쓰레기 같은 것들. 내 돈을 떼먹으려고?’
동생인 도현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받지 않으며 홀로 묵묵히 자리를 잡아 가던 전직 격투기 선수이자 외공을 익히고 있는 장철호는 몸속 피가 뜨거워졌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척하며 홍 반장을 안심시킨 뒤, 철거 사무실에 홀로 찾아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시커먼 옷을 입은 젊은 사내 몇과 고 사장이 둘러앉아서 포커를 치고 있었다.
“밀린 임금, 4백만 원 가지고 와.”
“뭐라는 거야, 저 미친 새끼는?”
사내들이 카드를 탁자에 던지며 우르르 일어났다.
“야야, 가만히들 있어.”
고 사장은 소파에 등을 깊숙이 기대며 장철호를 쏘아봤다.
“너 아까 그 새끼잖아, 홍 반장 똘마니.”
“똘마니가 아니고, 일하는 사람이다. 성실하게 일한 노동의 대가를 받으러 왔다. 내 돈 내놔.”
그의 대답에 고 사장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에 놔둔 야구방망이를 집어 들었다.
“내 아들이 고교 야구 선수거든. 내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몰라도 아주 홈런을 잘 쳐.”
야구방망이를 바닥에 질질 끌고 다가온 그는 장철호의 턱 밑에 야구방망이를 가져다 댔다.
“야, 이 새꺄, 공 대신 네 대갈통을 날려 줄까? 마음에 안 들면 법 절차를 밟아, 이 새꺄. 남의 사무실 와서 눈에 힘주지 말고.”
“이런 식으로 얼마나 돈을 떼먹었냐?”
“뭐?”
장철호는 턱 밑에 야구방망이를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가 손에 힘을 주자 단단한 야구방망이가 쪼그라들더니 퍽 소리가 나며 부서졌다.
엄청난 손아귀 힘에 놀란 고 사장과 패거리의 안색이 딱딱하게 변해 갔다.
“막노동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는 사람들 돈, 그거 아주 귀한 거야. 우습게 보지 말고, 얼른 가지고 와.”
“이 건방진 새끼가 손 힘 좀 세다고 유세를 떠는 거야 뭐야!”
고 사장은 부서진 야구방망이로 장철호의 어깨를 냅다 내리쳤다.
쌀쌀한 겨울 날씨에 입은 장철호의 점퍼에 먼지가 올라왔다. 그러나 장철호는 끄덕도 안 했다.
오히려 야구방망이를 휘두른 고 사장이 야구방망이를 바닥에 떨어트리며 손바닥을 감싸 쥐었다.
‘뭐야, 이거, 마치 돌을 때린 것 같잖아.’
야구방망이에서 전해져 오는 묵직한 반탄력에 손바닥이 화끈해진 고 사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짓을 했다.
“야, 저 새끼 조져.”
“예!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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