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3] 디 임팩트 22권 18화
“삼촌, 한 10억 지원해 드릴까요? 아니면 한 백억?”
용주는 중동 거부처럼 거만하게 폼을 잡고 앉아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이 녀석이, 장난을 쳐도.”
“장난 아니에요, 삼촌. 저 이제 부자라고요. 제가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드릴게요.”
“됐고, 가서 커피나 한 잔 더 타 와.”
조 박사는 빈 커피 잔을 용주에게 밀었다.
“정말인데, 안 믿으시네. 도현아, 네가 좀 말씀드려라.”
“박사님,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도현은 마법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차곡차곡 쌓인 커다란 보물 상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그중 제일 위에 있는 상자 두 개를 꺼냈다.
쿵쿵.
거실 카펫이 납작하게 눌릴 정도로 묵직한 보물 상자는 뚜껑이 닫혀 있어 그 화려함을 숨기고 있다.
“그 상자는 뭔가?”
조 박사가 상자에 다가가며 물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시선은 상자가 아닌 도현의 마법 주머니에 고정돼 있었다.
‘전에도 봤지만 또 봐도 신비롭군. 마법으로 물건을 보관하다니.’
지구의 물건이 보관되지 않아 그 효용성이 많이 떨어지지만 이계 물건을 보관할 때는 아주 유용한 마법 물건이다.
도현은 조 박사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들린 마법 주머니에 고정되어 있자, 상자를 개봉하기에 앞서 각인이 안 된 새 마법 주머니를 꺼냈다.
애초에 그는 이것을 만들 때부터 조 박사 것까지 고려한 상태였다.
“받으십시오, 박사님. 제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마법 주머니입니다.”
“그걸 날 준다고?”
깜짝 놀란 조 박사는 기뻐하며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이 귀한 걸 내가 가져도 되나?”
“괜찮습니다, 박사님. 용주와 홍영, 철호 형도 하나씩 준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네.”
조 박사는 떨리는 손으로 마법 주머니를 건네받았다.
‘마법 아이템이 내 손에 들어오다니. 당장 지하 연구실로 내려가 연구해 보고 싶군.’
부드러운 감촉의 가죽 표면을 매만지던 그는 도현의 도움을 받아 각인에 성공한 후 들뜬 얼굴로 도현이 이계에서 가지고 온 술병을 이용해 그 사용법을 익혔다.
“이거 마치 내가 마법사가 된 기분이야.”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그의 모습에 용주와 도현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작게 웃었다.
“삼촌, 저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안 궁금하세요?”
“응? 아, 그렇지. 상자가 있었지.”
조 박사는 그제야 마법 주머니에서 눈을 떼며 도현이 꺼낸 두 개의 상자에 관심을 가졌다.
양쪽에 고리로 된 손잡이가 달린 청동 상자는 겉이 단조롭고 투박했다.
“죄송하지만 박사님이 직접 열어 보시겠습니까?”
도현이 손으로 상자를 가리키자 조 박사는 별생각 없이 무게감이 느껴지는 청동 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 순간 황금과 보석으로 이뤄진 갖가지 보물들이 반짝이며 조 박사의 눈을 강타했다.
그 눈부심에 잠시 고개를 돌린 그는 천천히 고개를 바로 하며 청동 상자 안에 물건을 확인했다.
커다란 상자 안이 온통 귀중한 보물들로 가득했다.
손잡이는 황금, 거울 테두리는 여러 종류의 보석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던 조 박사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도현을 쳐다봤다.
“이, 이게 다 뭔가?”
“검은 용의 보물 창고에서 가지고 온 물건들입니다. 그가 선물로 준 것들이죠. 이제는 박사님 겁니다.”
“이것들 다 말인가?”
“예, 두 상자 모두요. 필요한 데 사용하십시오.”
멍하니 보물 상자를 내려다보던 조 박사는 거울이 깨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과해. 여기 이 보석 몇 개만 있어도 당분간 내 연구비는 부족함이 없을 텐데. 이계에서 고생한 자네가 이 보물의 주인이어야지.”
조 박사는 성인이 아니다. 보물을 보는 순간 탐욕이 일어났지만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도현에게 보물을 돌려주려 했다.
물질적인 욕심이 있었다면 애초에 대기업 연구소의 수석 연구직을 버리고 10여 년 넘게 사재를 낭비하며 초고대 문명을 연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계의 위험을 무릅쓴 자네의 것이야.”
“받으십시오. 박사님께 어떤 식으로든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물은 아직 충분하고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 말고 더 있다고?”
“네.”
도현은 마법 주머니에 보관 중인 보물 상자들을 전부 꺼냈다. 조 박사 몫을 제외하고도 열다섯 개나 되는 많은 양의 보물 상자가 남았다.
“삼촌, 저도 있어요.”
용주도 도현에게 받은 보물 상자를 꺼냈다.
“제가 조금 전에 부자라고 한 말의 의미를 이제 아시겠죠, 삼촌?”
용주는 보물 상자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삼촌, 이제 아셨으니까 받으세요. 도현이가 그래야 마음 편하죠.”
집 안 가득 쌓인 보물 상자의 기세에 눌려 한동안 말문이 막혔던 조 박사는 보물 상자 사이에 서 있는 도현에게 다가갔다.
“자네 뜻이 그렇다면 고맙게 잘 받겠네. 저 정도면 평생 초고대 문명을 연구해도 돈이 부족하지 않겠어. 재단을 세워 후원을 해도 되고.”
환한 조 박사의 얼굴을 보며 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이른 시일 안에 실력 있는 탐사 팀을 꾸려서 오웬 브라운의 책에 기록된 유적지를 조사해 보겠네. 재정은 충분하고 넘치니까 동시에 여러 곳에 탐사 팀을 보내야겠어.”
“천천히 하십시오. 감기 먼저 털어 내는 게 중요한 것 같으니까요.”
도현의 농담에 조 박사는 웃음을 흘렸다.
“보물을 보니 감기는 저절로 나은 것 같은데? 하하하!”
* * *
하늘이 흐렸다. 라디오에서는 밤부터 다시 눈이 시작될 거라는 일기예보가 흘러나왔다.
조 박사를 만나고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도현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차창 밖을 응시 중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용주는 그런 도현을 힐끔 쳐다봤다.
“적응하기 어렵지, 어제까지 이계에 있다 와서.”
“괜찮아,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
“그쪽 사람들과 정이 깊어질수록, 나 같아도 조금은 정체성에 혼란이 올 것 같긴 하다.”
담배에 불을 붙인 용주는 차창을 조금 내려 공기를 환기시켰다.
겨울 찬 바람이 달리는 차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아직도 기억이 선하다, 작년에 이계에서 금화를 구해 온 너의 모습이. 그때 참 좋았지. 우리에겐 그게 한 줄기 희망이었잖아. 돈도 벌고, 태선군을 상대할 수 있는 힘도 기르고.”
용주의 말이 도현을 과거 속으로 이끌었다.
‘몇 년은 지난 것 같다. 아니, 내게 시간은 실제로 그렇게 흘러갔지.’
이계에서 보낸 시간이 수년이다. 주마등처럼 이계에서의 사건들이 도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태선군을 상대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지나온, 결코 쉽지만은 않은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을 밟지 않았다면 태선군에 대한 복수는 공허한 꿈으로 남았을 것이다.
“근데 도현아, 태선군은 언제쯤 나타날까?”
“글쎄.”
제자들에게 세 가지 영초를 구해 놓으라고 지시를 내린 그가 어느 시점에 등장할지 예단하기는 어려운 상황.
중국에 있는 주성하와 오늘 낮에 통화했지만 별다른 특이 사항을 전달받지 못했다.
용주는 담배 연기를 코로 뿜어내며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요즘 드는 생각이 그래. 태선군은 지금 궁지에 몰린 상황이잖아. 자기보다 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가 나타나서 자기를 막 죽이려고 하니까. 그렇다면 그는 그 고수인 널 상대할 만한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까?”
“날 상대할 만한 방법?”
“그래. 검선문의 역사가 천 년이 넘는다잖아. 온갖 무공이 존재했을 거 아냐.”
용주는 차 속도를 줄이며 도현을 쳐다봤다.
“난 그게 걱정스럽다.”
도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용주의 말이 그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맞아, 그는 지난번 싸움 이후로 패배자의 처지가 됐지.’
악에 받친 노고수가 얼마나 절치부심하며 칼을 갈고 있을지 모른다.
도현의 강함이 태선군을 자극하는 촉매제가 됐을 건 분명하다.
‘이번에 난 혼돈의 마나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면서 더 강해졌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깨달음이 태선군에게도 없으란 보장은 없다.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노고수니까.’
검은 용의 인정을 받을 만큼 강해진 도현은 어느 순간부터 태선군을 눈 밑으로 보며 상황을 인식해 왔다.
도현은 슬며시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자만심을 내려놓았다.
“용주야, 고맙다. 네 말이 송곳처럼 내 가슴에 와 닿았어. 한 번 이겼다고 해서 그게 끝이 아닌데,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을게.”
용주는 도현의 말에 도리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네 마음 상태를 지적하려는 게 아니라, 태선군이 오원신공을 알아내기 위해 제자인 청선까지 속이고 죽이려 한 것을 보면 보통 음흉한 자가 아니잖아. 혹시나 해서 걱정이 돼서 한 말이지.”
“알아, 네 말뜻. 그러니까 고맙다고 하는 거야.”
“그래? 그럼 뭐, 된 거네.”
웃으며 담배를 끈 용주는 무거운 태선군 얘기 대신 밝은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아참, 도현아, 우리 도장에 수상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
“수상한 기운이라니?”
“김유진 작가하고 호태식 씨 사이에 뭔가 알 수 없는 야릇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고.”
“야릇한 기운이라면…… 둘이 사귄다는 거야?”
“연애 도사인 내가 보기엔 거기까지는 아닌 것 같고, 막 서로 의중을 간 보는 그런 단계?”
도장의 관원이라 봐야 몇 안 된다.
눈치 빠른 용주의 눈은 정확히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읽어내고 있었다.
“어설프게 둘 사이에 끼어들지 마.”
도현의 충고에 용주는 환기를 시키기 위해 열어 놓은 창문을 닫으며 대꾸했다.
“당연하지. 난 그들에게 엄격한 조 사범으로 통하는 사람인데.”
“농담 아니고 진짜야. 그들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사귀든 아니든 그들 일이니까.”
“알았다니까 그러네. 자식, 참 사람 말 못 믿어.”
대답과 달리 용주의 눈가엔 장난스러움이 가득했고, 도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야, 관원들이 너 많이 보고 싶어 했어. 오늘 회식 어떠냐? 폭주를 해결한 기념으로 비싼 소고기로 쫙!”
흥에 넘친 용주의 제안에 도현은 피식 웃으며 기분 좋게 응했다.
“그러자.”
* * *
벼랑 끝에 위태롭게 자리 잡은 커다란 바위 위에서 료쿄는 가슴이 답답한 얼굴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도현이 인정할 만큼 빼어난 검술을 지닌 그녀는 검으로 바람의 움직임을 통제할 만큼 그 검세가 변화무쌍하고 깊이가 남달랐다.
‘이 정도로는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
무너지듯 바위 위에 주저앉은 그녀는 들고 있던 검을 바위에 꽂았다.
놀랍게도 그녀의 검은 불꽃을 만들며 바위를 파고들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시간만 낭비하고 있어야 하지? 차라리 일본으로 돌아가 사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을 찾아 10년이고, 20년이고 검을 수련할까? 그편이 백도현의 검을 상대하는, 더 빠른 길일 수도 있어.’
도현에게 검으로 패한 그녀는 언제고 검으로 당당히 설욕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담기량의 은거지를 찾아다니느라 허송세월을 보낸 게 거의 1년이고, 지금은 사부의 지시로 엉뚱하게 영초를 찾아다니고 있다.
‘검객이 검은 수련하지 않고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청선 대신 대사형이 된 고진영이 수시로 전화해 닦달하는 목소리도 듣기 싫었다.
“구사저, 거기서 뭐 하십니까?”
신법을 발휘해 가벼운 몸놀림으로 산 아래에서 올라온 주성하가 묻자, 숨을 고르던 료쿄는 바위에 꽂힌 검을 회수하며 간결하게 답했다.
“검 수련.”
바위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그녀는 주성하를 스쳐 산 중턱에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움막집 비슷한 곳으로 향했다.
“구사저, 제가 없는 사이에 약초꾼은 오지 않았었죠?”
“그래, 넌?”
“산 아래 마을은 다 찾아봤는데 없었습니다. 이 빌어먹을 약초꾼 녀석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주성하는 찬 바람이 묻어나는 료쿄의 눈치를 살피며 괜히 약초꾼을 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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