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545화 (545/575)

[545] 디 임팩트 22권 20화

깊은 시선으로 응시하는 도현의 눈빛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 호태식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별말씀을요.”

“교육 후에 회식을 할까 하는데, 시간이 되십니까?”

“아, 회식요? 저야 당연히 좋죠.”

호태식은 밝은 얼굴로 답했다.

잠시 뒤에는 이호선 피디와 김유진 작가가 나란히 5층 도장으로 들어왔다.

지난주에 회사 일 때문에 두 번 결석한 그들은 이번 주에는 다행히 시간을 맞춰 계속 나오고 있었다.

“어머, 관장님!”

도현을 발견한 김 작가는 놀란 얼굴로 한걸음에 달려왔다.

“언제 오셨어요?”

“어젯밤에 왔어요.”

“얼굴 살이 많이 빠지신 것 같아요. 산속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나 봐요.”

도현은 턱을 한번 매만지며 빙그레 웃었다.

“난 똑같아 보이는데……. 아무튼 두 분도 건강해 보여 아주 좋네요.”

“이게 다 호검술 때문입니다.”

혈색이 좋은 이호선 피디가 호검술을 치켜세웠다.

“끝나고 회식을 하려고 하는데, 참석하실 수 있습니까?”

“아, 오늘요?”

이호선 피디는 머리숱이 얼마 없는 윗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는 저녁 교육 후에 다시 밀린 업무를 보기 위해 방송국으로 가 봐야 했다.

“어려우시면 괜찮습니다. 갑자기 잡힌 회식이니까요.”

“이 피디님, 잠깐이라도 앉아 있다 가요. 관장님이 모처럼 회식 얘기를 하시는데.”

김 작가가 눈치를 주자 이 피디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참석하겠습니다.”

“일이 많은 것 같은데 일부러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도현은 이 피디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아닙니다, 관장님. 정말 괜찮습니다. 급한 업무는 아니기 때문에 조금 뒤로 밀어도 됩니다.”

“그러시다면.”

탈의실에서 도복으로 갈아입은 네 명의 관원들은 교육 시간이 되자 눈빛이 바뀌었다.

오늘은 조 사범 대신 관장이 그들을 가르친다.

“시작해 볼까요?”

도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들은 호검술 기본자세를 취하며 힘 있게 목검으로 허공을 베었다.

* * *

천 년의 역사를 가진 검선문은 그동안 문파의 위치를 여러 번 옮겼다.

천재지변, 관군과의 마찰, 적대 문파의 공격 등 그 이유도 실로 다양했다.

옥룡산의 등선궁은 검선문이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은 장소다.

수백 년은 흘렀으니, 천 년 역사의 검선문에 있어서 가장 오랜 기간 자리 잡은 장소인 셈이다.

그런 등선궁이 주춧돌 하나 남겨지지 않고 모조리 불타고 부서졌다.

시커먼 잿더미들이 수백 년 역사의 허망함을 보여 주었고, 일부는 계곡 아래의 물가에 처박혀 물의 흐름을 방해하기도 했다.

부엉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숲에서 나온 청선은 이 참담한 광경에 그저 기가 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허허.”

불타 망가진 등선궁의 잔해 더미를 뒤적이던 그는 검게 변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어찌해 이리도 독해졌소, 사부!”

누구의 짓인지는 보지 않아도 가슴으로 느껴졌다.

“당신이 거둔 열 명의 사형제들이 피땀을 흘리며 관리하고 성장했던 이곳인데, 돌 하나까지 부숴야 했소이까, 사부!”

잿더미 속에서 비통하게 목 놓아 울던 그는 잘린 자신의 손가락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미 단지를 통해 사부와의 정과 의리를 끊어 냈다. 이제 태선군은 검선문을 망가트린 천하에 죄인일 뿐이다.

전대 문주로부터 오원신공을 전수받은 그는 더 이상 사부의 악독한 행태를 좌시할 수 없었다.

“내 손으로 끝을 내 주겠소.”

폐허가 된 등선궁을 둘러보던 청선의 몸이 어느 순간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지하 협곡

“흠, 여기로군.”

택시에서 내린 퇴마사 모석청은 호검술 도장 간판이 걸려 있는 5층 건물 앞에서 마치 물건을 품평하듯 위아래로 건물을 훑어봤다.

‘생각보다는 초라하게 사는군.’

도현이 가진 능력에 비춰 볼 때 모석청으로서는 조금 이해가 안 됐다.

그가 파악한 도현은 검술의 고수이자 퇴마 능력이 극도로 뛰어난 귀인이다.

그 정도 인물이 서울 변두리의 낡은 건물에서 도장을 운영한다는 게 그로서는 납득이 안 됐다.

‘돈 욕심이 정말 없는 사람인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그의 어깨를 누군가 톡톡 건드렸다.

“아저씨, 검 배우러 오셨어요?”

휴대폰 대리점에 다녀오던 용주는 건물 앞에서 도장 간판을 계속 쳐다보는 그를 발견하고 친근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 한국말 몰라. 난 중국에서 왔어.”

모석청이 떠듬대며 어설프게 말했다.

“한국말 못한다면서 잘하시네. 그러니까 제 말은요, 저기 검 배우러 왔냐고요, 검."

용주가 검을 휘두르는 흉내를 내자 모석청은 빤히 용주를 쳐다봤다.

‘뭐지, 이 녀석은? 호검술 도장과 관련이 있는 녀석인가?’

모석청이 말없이 쳐다만 보고 있자 용주는 자신이 착각했나 싶었다.

“죄송합니다.”

그를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모석청이 한마디 했다.

“백도현.”

용주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자 모석청은 몸동작을 섞어 가며 중국 말로 빠르게 떠들어 댔다.

‘뭐라는 거야? 통 알아들을 수가 없네.’

중국 말이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도현을 찾아온 것 같긴 했다. 그렇지 않다면 도현의 이름을 콕 집어서 말할 리가 없었다.

‘홍영에게 중국 말 좀 배워 둘걸.’

그녀는 지금 지하 도장에서 도현에게 검을 배우고 있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이름.”

용주는 기억에서 가물거리는 중국어 회화를 떠올리며 어렵게 물었다.

“모석청.”

“천천히.”

“모. 석. 청.”

“아, 모석청. 모석청……?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곰곰이 생각하던 용주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의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났다.

‘퇴마사 모석청?’

대명이라는 상해 거대 조직 보스의 아들을 치료해 줄 때 도현은 한 퇴마사와 인연을 쌓았다. 그가 바로 퇴마사 모석청이었고, 그가 발견한 석실에서 도현은 대력금강수를 얻기까지 했다.

이야기로만 듣던 모석청을 실제로 마주한 용주는 괜히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이렇게 생겼군. 어쩐지 약간 사기꾼 기질이 얼굴에서 흐른다 했더니……. 그래도 도현에게 대력금강수라는 기연을 연결시켜 준 사람이니 환영해 줘야지.’

용주는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모석청이군요. 자,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모석청은 용주의 뒤를 따라가며 고개를 갸웃했다.

‘날 아는 눈치인데? 백도현이 말했나?’

용주는 도현이 있는 지하 도장이 아닌 관원들에게 개방된 5층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용주는 5층 도장 내부를 구경하는 모석청을 사범실 창문을 통해 바라보며 지하 관장실로 전화를 걸었다.

“도현아, 모석청이라는 중국 사람이 널 찾아왔어.”

-모석청?

“그래, 퇴마사 모석청 맞지?”

-맞아.

“어떻게 할까? 기다리라고 할까?”

-아니야. 홍영 씨하고 하던 수련이 끝났어.

“그럼 데리고 간다.”

-그래.

전화를 끊은 용주는 모석청에게 걸어갔다. 그는 도장 벽에 걸려 있는 역대 관장 사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 백남식 관장과 현재의 관장인 백도현.

“두 사람 다 기상이 넘치는군.”

혼잣말로 중얼거린 모석청은 아담한 도장의 분위기에 새삼 놀랐다.

‘한가로운 생활이 좋은 건가? 그 좋은 능력을 이런 데서 썩히고 있다니, 쯧쯧.’

혀를 차던 그는 용주의 안내를 받아 지하에 있는 또 다른 도장에 발을 디뎠다.

안에는 도현과 꽃보다 아름다운 미모의 젊은 여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일한 종류의 도복을 입은 걸 보니 여자도 도장의 일원 같았다.

홍영의 미모에 잠시 감탄한 모석청은 도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시 보니 반갑네, 백 관장.”

“어서 오십시오, 모 선생님.”

도현은 담담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실례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군.”

그는 점잖게 말을 하며 헛기침을 한 번 했다. 퇴마사로서 사람들에게 신비로움과 무게감을 선사하는 그였기에 분위기를 잡는 행동은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도현은 그와 동행을 한 경험이 있기에 그의 허실과 밑천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옆에 아리따운 분과 날 여기까지 안내한 이분은 누구신가?”

“제 친구이자 도장의 사범들입니다.”

“아, 그렇군. 어쩐지 눈빛이 범상치 않더군.”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홍영과 용주를 돌아봤다.

“안녕하세요, 홍영이라고 해요.”

“조용주라고 합니다.”

홍영과 용주가 자신을 소개하자 모석청은 염소수염처럼 자란 턱수염을 손으로 훑어 내리며 자신을 거창하게 소개했다.

“중생을 악귀로부터 보호하는 퇴마사 모석청이오.”

“백 관장에게 들었어요. 상해에서 만나 무한까지 함께 갔었다고요?”

홍영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중국 말로 대응하자 모석청은 살짝 놀랐다.

“중국 말을 참 잘하시는군.”

“그곳에서 자랐으니까요.”

“아, 그러셨소.”

“말씀들 나누세요. 저희는 이만.”

홍영과 용주는 도현을 찾아온 그를 위해 자리를 피해 줬다.

“저들도 백 관장처럼 고수인가?”

닫히는 문을 보며 모석청이 슬쩍 캐물었다.

“검을 사랑하는 친구들이죠. 자, 이쪽으로 오시죠.”

관장실로 그를 안내한 도현은 의자를 권했다. 몇 사람 앉으면 꽉 찰 만큼 좁은 관장실의 모습에 모석청은 안타깝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마음만 먹으면 큰돈을 벌 수 있을 텐데, 왜 이렇게 답답하게 사시나?”

“돈이라면 충분히 있습니다.”

“혹시 지난번 대명 측으로부터 받은 돈을 말하는 거라면, 그건 새 발의 피네. 내게 일을 맡겨 주면 진짜 부자가 될 수 있게 노력해 보겠네. 어떠신가?”

“못 들은 걸로 하죠.”

차를 타던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지난번에도 이런 종류의 얘기를 그에게 들었다. 그는 오늘도 잊지 않고 또 같은 말을 했다.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라 백 관장의 퇴마 능력은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을 위해 쓰여야 할 것 같아서 입 아프게 얘기하는 것이네. 오해하지는 말게.”

“그 얘기를 하러 중국에서 여기까지 온 겁니까?”

도현이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건 아니고, 한국에 관광차 왔다가 자네 생각이 나서 왔네.”

“관광요?”

“어제는 경복궁도 가 보고 젊은 사람들이 모이는 술집 주변도 돌아다녀 봤지. 즐겁더군.”

“그랬군요.”

도현은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는 모석청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모석청이 수십 년 전 산에서 발견한 석실 속 검법은 군데군데 파손돼 온전하지 않았지만, 도현은 아쉬운 대로 남아 있는 검법을 수습해 그중 일부를 모석청에게 전수해 줬다.

그러나 그 일부도 모석청에게는 너무 수준이 높고 어려워 제 것으로 만드는 데 꽤 시간이 소요될 걸로 판단했었다.

“갑자기 찾아오셨기에 석실의 검법을 벌써 다 익혔나 해서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었군요.”

“부끄럽지만 석 달가량 산에 처박혀 수련하다가 답답해서 나왔네.”

그는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쉬운 검법이 아닙니다. 평생을 수련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꾸준히 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모석청은 관장실 벽에 걸린 사진 액자를 가리켰다.

“위에 있는 도장에도 저 액자가 걸려 있던데, 누구신가? 눈매가 자네와 닮은 걸 보니 부친인 것 같기도 하고.”

“맞습니다, 제 선친입니다. 이 도장을 세우신 분이죠.”

“아, 돌아가셨군.”

모석청은 한때 중이었다. 눈을 감은 그는 불경을 외우며 백남식의 극락왕생을 빌어 줬다.

잠시 후 눈을 뜬 그는 차를 한 모금 한 후,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도현을 응시했다.

“사실 내가 오늘 찾아온 건 마음이 매우 심란하고 번뇌가 괴롭혀서네. 그것을 이겨 보려고 일부러 한국에 관광까지 왔는데, 역시 안 되더군. 그때 내 발걸음이 저절로 이쪽으로 향했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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