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 디 임팩트 22권 24화
“내가 몇 살로 보이지?”
갈색 선글라스를 착용한 태선군은 흰 이를 드러내며 호텔 프론트 직원에게 물었다.
* * *
도현은 벽곡촌 근방 산을 가까운 곳에서부터 훑기 시작했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깊은 산은 무공을 수련하는 자에게는 최적의 장소 중 하나다. 마을을 공격한 괴인이 이런 곳에서 산다고 해서 이상할 이유는 없었다.
쉬이이익.
바람 소리를 내며 매의 눈으로 산을 조사하던 그는 산을 넘고 넘어 어느덧 운무 가득한 높은 산까지 도달했다.
‘너무 먼 곳까지 왔나?’
운무에 휩싸인 산을 올려다보던 도현은 이쯤에서 마을로 돌아갈까 망설였다.
‘아니야. 온 김에 저 산까지만 조사하고 돌아가자.’
마음을 정한 그는 산 중턱부터 운무에 휩싸인 산속으로 들어갔다.
급경사를 이루는 산은 등반 장비가 없이는 오르기 난감할 정도였지만, 도현에게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해가 기울며 운무는 핏빛으로 물들었다.
기이한 장관을 연출하는 산을 빠른 속도로 조사한 도현은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독특한 지형이군.”
산 정상부는 화산 분화구처럼 밑으로 깊고 거대한 구멍이 존재했는데, 그 아래 분지는 상당한 규모였다.
위에서 내려다보던 도현은 분지를 조사하기 위해 수직으로 깎인 수십 미터 높이의 절벽을 미끄러지듯 타고 내려갔다.
산 정상부에 숨겨진 분지에는 키 높이까지 자란 수목과 허리 높이의 풀이 우거져 있었고 한쪽엔 물도 흘렀다.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은 충분한 것 같은데…….’
분지를 조사하던 도현은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분지가 이렇게 넓었나?’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는 여전히 분지를 다 조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볼 땐 이 정도로 넓은 곳이 아니었다.
‘괴이하군.’
그는 신경을 쓰며 다시 분지를 조사하다가 마침내 왜 자신이 아직 분지를 다 조사하지 못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같은 곳을 돌고 있다.’
바닥엔 조금 전 그가 던져 놓았던 이계의 금화가 달빛을 받으며 반짝이고 있었다.
분명히 금화가 놓인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는데 놀랍게도 그 끝엔 그가 던져 놓은 금화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곳에 뭔가가 있다.’
도현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는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을 만든 후,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그 상태에서 정신을 집중하자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왜곡된 기의 흐름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붉은 빛으로 빛나며 바닥에서 맹렬이 회오리치고 있었는데, 두 나무와 한 개의 묵직한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기운들이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저것 때문에 내가 헤매고 있었던 거야. 대체 왜 이런 게 여기에 설치된 거지?’
일종의 진법이라는 걸 눈치챈 도현은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벽곡촌에 재앙을 몰고 온 그 괴인의 짓인지 의심이 되기도 했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진법을 뚫고 들어가 보면 안에 뭔가 해답이 기다리고 있겠지.’
도현은 왜곡된 기의 흐름을 밟지 않도록 신경 쓰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마치 지뢰를 피하듯 신중을 기해 움직인 도현은 등에 땀이 축축한 상태로 마침내 왜곡된 기의 흐름이 막아서던 분지의 가장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내공 소모는 없었지만 막대한 심력이 소모돼서 몸이 무거울 정도였다.
‘정말 대단한 진법이야.’
힘으로 뚫고 들어오려 했다면 오히려 큰 화를 당할 수도 있었다.
“이 동굴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던 건가?”
도현은 분지 안쪽에 존재하는 지하 동굴로 다가갔다.
입구엔 거대한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군자의 덕으로 악인들을 가두다.
검선문 이연백
‘이연백이라고?’
도현은 비석에 새겨진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검선문 이연백이라면 송나라 시대 때 인물로 검선으로 추앙받던 검선문의 제7대 문주다.
청선을 고통스럽게 했던 오원신공의 창안자이자 역대 검선문 문주 중 최고의 고수로 평가받는 검객.
료쿄에게 들었던 이연백에 대한 평가를 떠올리며 놀란 표정으로 비석을 응시하던 도현은 저도 모르게 다가가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손가락으로 만져 봤다.
“진짜 이연백이 이 글을 남긴 건가?”
왠지 검선으로 추앙받던 이연백의 숨결이 바람처럼 휘갈긴 비석 글씨체에서 묻어나는 것 같았다.
잠시 감상에 빠졌던 도현은 마음을 가다듬고 비석에 글을 다시 한 번 읽어 봤다.
“군자의 덕으로 악인들을 가두다. 죽이지 않고 회개를 시키기 위해 가두었다는 뜻인가?”
도현은 검선문과 관련된 유적을 발견한 것 같아서 그 기분이 실로 묘했다.
‘태선군은 이곳을 알고 있었을까?’
우연치고는 너무도 공교로운 발견에 도현은 한동안 더 비석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굴에 갇힌 악인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겠지.’
가볍게 심호흡을 한 도현은 어두운 동굴에 발을 디뎠다. 여기까지 와서 동굴을 살펴보지 않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둠 속에도 사물을 볼 수 있는 그에게 동굴의 짙은 어둠은 문제가 아니었다.
후드드득.
천장에 붙어 있던 박쥐들이 날아다니고, 바닥엔 손바닥만 한 지네가 기어다녔다.
한동안 동굴을 살피며 걷던 도현의 발걸음이 어느 순간 멈췄다. 커다란 구멍이 뚫린 막다른 길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도현은 폭 5미터 정도에 수직으로 뚫린 구멍을 들여다봤다.
“이곳에 사람들을 가둬 둔 건가?”
잠시 생각하던 도현은 구멍을 향해 훌쩍 몸을 던졌다.
도현의 몸이 허공에 떠서 천천히 바닥을 향해 하강했다.
50여 미터쯤 내려왔을까, 마침내 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현은 새로이 나타난 경사진 동굴을 따라 계속 밑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이 동굴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탄광의 갱도처럼 밑으로 계속 이어지는군. 대체 얼마나 깊은 거지?’
동굴은 무저갱처럼 자꾸만 땅속으로 이어졌다.
끝없이 들어가던 도현은 슬슬 걱정이 됐다.
‘이거 잘못 들어온 거 아닐까?’
호기심에 들어왔다가 이대로 동굴 속에 갇힐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벌써 지하로 1킬로미터는 내려온 것 같았다.
‘저건?’
도현이 고민을 할 무렵, 동굴 한편에서 유골이 나타났다. 벽에 등을 기댄 그 유골의 손목과 발목엔 굵은 쇠사슬이 걸려 있었다.
이연백이 가둔 악인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유골이 기댄 동굴 벽엔 날카로운 돌로 긁어 남긴 저주 섞인 글이 있었다.
추악한 이연백. 단전을 파괴하고 이곳에 가두다니, 지옥에서 널 기다리겠다.
“단전이 파괴되고 손발이 자유롭지 못하다면 수직 동굴을 올라가는 건 거의 불가능했겠지.”
아마도 이연백에 의해 갇힌 사람들은 굶어서 죽거나 답답함 속에 미쳐서 날뛰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 같았다.
유골은 계속해서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어김없이 이연백과 검선문을 저주하는 글을 남겼다.
“대단하군. 대체 몇 명이나 이곳에 가둬 둔 거야?”
그 수를 세다 포기한 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현재까지 파악한 수만 해도 어림잡아 백 명은 넘었다.
도현은 동굴을 계속 들어갔다.
앞서 죽은 자들은 저주하는 글을 남겼지만 뒤에 등장하는 자들 중에는 간혹가다가 진심으로 회개하며 그들이 살아온 인생사를 담담히 적어 고백하는 장문의 글을 적어 놓기도 했다.
‘이연백의 시대에는 문파 간에 큰 전쟁도 자주 있었구나.’
검선문에 대항하다 잡혀 들어온 자들도 꽤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한 문파의 문주거나 장로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남긴 글은 죽으면서도 자존심과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다.
도현은 수백 명이나 되는 자들이 죽어 가며 남긴 개개인의 기록들을 읽으며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 시대 이들의 가치관과 그들만의 역사를 알아 가는 재미가 있었다.
‘더는 없는 건가?’
백여 미터 정도 더 들어가도 유골이 나오지 않자 도현은 그만 동굴을 빠져 나가려다가 저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청광을 발견했다.
‘뭐지?’
신법을 발휘한 도현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곳에 도착했다.
청광은 놀랍게도 유골에서 나는 빛이었다.
반듯한 자세로 벽에 기댄 유골은 체구도 매우 장대해서 살아생전엔 2미터가 훌쩍 넘었을 것 같았다.
‘누구였기에 죽어서도 이런 신비한 현상을 보이는 거지?’
유골에서 빛이 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이 사람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나?’
호기심이 생긴 도현은 유골 주변의 동굴 벽을 살펴봤다. 다행히 그곳에 이 사람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었다.
이 글을 보는 자는 이연백의 명을 거역할 만큼 간 큰 검선문의 제자이거나 아니면 검선문의 통제가 사라진 먼 훗날의 인간이겠지. 누가 됐든 상관없다. 내가 남긴 패천공을 익혀라. 대성을 이루면 젊음을 되찾고 하늘 아래 널 당할 자가 없을 것이다. 석년에 내가 대성을 이뤘다면 어찌 이연백 따위에게 패했겠는가. 대성을 이루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로다.
홍도조
자신을 소개하는 글은 그렇게 끝이 났다.
“대단한 자부심이다.”
도현은 패천공이 어떤 무공인지 궁금해졌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던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홍도조의 패천공이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굴 벽이 누군가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도현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쌓여 있는 벽의 잔해를 뒤적였다. 패천공의 구결로 보이는 몇몇 글자들이 부서진 돌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패천공이 어떤 무공인지 알 수 없었다.
“최근에 파괴된 흔적이다, 그것도 검에 의해.”
도현은 손을 뻗어 벽에 남겨진 검의 흔적을 따라가 봤다.
일필휘지. 단숨에 글을 써 내려가듯, 이자는 검을 한 번 휘둘러 사람 키만 한 높이의 넓은 면적의 동굴 벽면을 깨끗이 밀어 버렸다.
검술이 이미 신기에 달할 정도로 높은 고수다.
“누구 짓일까?”
동굴 밖은 진법이 설치되어 있어서 일반인은 이곳에 절대 들어올 수 없다.
이곳을 알 만한 자 중에 최근에 다녀갔고, 이 정도로 뛰어날 수 있는 검객은 단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태선군.”
얼마 전까지 도현은 괴인이 태선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크게 하지 않고 있었다. 연관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벽곡촌 주변에서 검선문의 유적을 발견한 순간, 연관성은 증폭됐고, 패천공을 훼손한 자가 그일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제는 괴인이 태선군일 수도 있다는 직감이 발동했다.
“태선군이 사용한 패도적인 무공이 어쩌면 이 패천공일지도 몰라.”
도현은 청광으로 빛나는 홍도조의 유골을 보며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 * *
빈집에서 잠을 자던 모석청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날이 샜고, 옆에는 도현이 앉아 있었다.
“자네였군. 언제 왔나?”
기다리다 잠이 들었던 모석청은 길게 하품을 하며 물었다.
“조금 전에 왔습니다.”
“고생 많았네. 난 자네가 오지 않아서 걱정을 하다 깜빡 잠이 들었네.”
“코를 골며 잘 자던데요.”
“험, 그랬나?”
모석청은 머리를 긁적였다.
“뭐, 알아낸 거라도 있나?”
“괴인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그와 관련 있을지도 모르는 것을 발견하긴 했습니다.”
“정말인가? 그게 뭔가?”
도현은 모석청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좀 더 알아본 다음에 결과가 나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중한 그의 대답에 모석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나중에 내게도 꼭 말해 주게. 그것이 마귀를 잡는 단서가 됐으면 정말 좋겠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만 내려가시죠.”
도현은 모석청과 함께 폐허가 된 벽곡촌을 떠나 교통이 자유로운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붐비는 기차역 안에서 표를 끊은 도현은 모석청에게 말했다.
“모 선생님, 이쯤에서 헤어져야겠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만날 사람이 있다고 하니. 벽곡촌 일을 돕기 위해 와 줘서 고마웠네.”
모석청은 도현이 마귀를 잡는 일에 계속 관심을 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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