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1] 디 임팩트 23권 1화
강호
측량할 수 없이 깊은 도현의 내공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돌기둥을 자극하자, 돌기둥이 강렬한 빛에 휩싸인 채 좌우로 요동치며 안으로 밀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드드드드.
돌기둥이 절벽 안으로 밀려 들어갈수록 지각이 움직이는 듯한 굉음이 연속해서 들려왔고, 돌기둥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도현의 얼굴을 어둠 속에서 환하게 밝혔다.
허공에 뜬 상태에서 돌기둥에 내공을 주입하는 도현의 모습은 중력을 거부한 초인이나 다름없었다.
‘고진영이 힘들어한 이유가 있었군. 보통의 내공이 필요한 게 아니야.’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돌기둥과 씨름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 돌기둥을 상대하는 당사자는 돌기둥과 연결된 절벽 전체를 상대로 힘겨루기를 하는 모양새였다.
완성된 고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애초에 이 돌기둥을 절벽 안으로 완전히 밀어붙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셈이다.
‘어설픈 자는 아예 발도 디디지 말라는 건가?’
한 손을 내뻗은 자세로 절벽에 튀어나온 돌기둥에 내공을 주입하던 도현은 강하게 반발하는 돌기둥을 압도적인 힘으로 내리누르며 끝까지 밀어붙였다.
쿠우우웅!
돌기둥이 절벽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춘 순간 강한 비명과 같은 울림이 지하 협곡 전체에 메아리쳤고, 그와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절벽 중간의 석문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절벽 속으로 연결된 긴 통로가 노출됐다.
나비처럼 허공을 날아 절벽 중간 통로에 들어선 도현은 낮게 탄성을 자아냈다.
‘절벽 전체에 기이한 힘이 어려 있다 했는데, 바로 이것이었군.’
얼마나 오래됐는지 모를 고풍스러운 장검 몇 자루가 절벽 내부 통로 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꽂혀 있었는데, 그 장검 주위로 번개와 같은 불꽃이 튀며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절벽에 설치된 진법의 핵심이 바로 이 몇 자루의 장검이었던 것이다.
검으로 만든 진법을 유심히 살피던 도현은 고개를 돌려 어두운 통로를 응시했다.
‘절벽 속에 난 길이라…….’
주성하로부터 담기량의 은거지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는 반신반의했다.
이제 그 실체를 확인해야 할 때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이곳이 특별한 장소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도현은 또 다른 진법의 존재를 주의하며 절벽 속 길을 따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등 뒤에서 들리던 지하 협곡의 웅장한 물소리가 귓가에 들리지 않을 때쯤 절벽 길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그의 앞에 나타나는 것을 놀란 눈으로 받아들였다.
향기로운 꽃과 나무 들이 지천에 깔려 있고 햇빛을 받은 작은 강물은 보석처럼 반짝이며 흘렀다.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슴은 도현의 출현에도 도망가지 않았고 도리어 다가와 그의 손등에 코를 대더니 킁킁댔다.
그뿐만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는 도현의 어깨에 내려앉아 부리를 비벼 댔다.
오랜 시간 인간의 손에 해침을 당하지 않은 동물만이 보일 수 있는 거침없는 행동이었다.
“너희들은 정말 겁이 없구나.”
이계에서 잡아먹은 사슴만 해도 여러 마리였던 도현은 왠지 미안한 감정이 들어 쓴웃음을 흘렸다.
“좋군.”
심신을 맑게 해 주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은 말년에 담기량이 은거지로 삼을 만큼 편안하고 조용해 보였다.
잠시 동물들에 둘러싸여 주변을 둘러보던 도현은 앞으로 나아갔고 무릉도원 같은 숲을 수색한 끝에 작은 집을 한 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이 담기량의 거처였을까?’
나무와 수풀로 뒤덮인 집 주변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간 도현은 반쯤 기울어진 집 외관을 둘러보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방 안에는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노인이 낡은 목함이 놓인 작은 다탁 너머에 가부좌를 한 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라는 걸 알고 있는 도현이었지만, 그 생생한 모습에 잠시 동안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얼마나 무공이 높았으면 죽은 후에도 이렇게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원숭이를 닮은 긴 팔과 하늘로 치솟은 눈매.
눈앞에 사람이 담기량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낸 도현은 고대 무림인이었던 절세 고수 담기량에게 진중하게 묵례를 하며 예의를 갖췄다.
딱히 악행을 일삼은 사람도 아니었고, 당대 제일 고수라는 위명을 남긴 만큼 대단한 실력자였지만 그는 권력과 명예 대신 조용히 칩거를 선택한 진정한 고수였다.
앞서간 선배 고수에 대한 예의를 갖추며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넨 도현은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예의를 갖춘 건 갖춘 것이고 이제 그가 남긴 것이 있다면 하나도 남김없이 수습해야만 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도현은 담기량 앞에 놓인 낡은 목함에 손을 뻗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일부러 남겨 놓은 것처럼 보였기에 안에 무엇이 있을지 기대가 됐다.
‘그는 자신의 무공을 남겼을까?’
도현이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목함을 여는 순간, 돌연 목함 안에서 붉은 빛기둥이 암기처럼 튀어나왔다.
도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꺾으며 붉은 빛기둥을 피해 냈다.
‘뭐지?’
도현은 뒤로 물러나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상자 안에서 나온 붉은 빛기둥이 천장에 매달린 작은 거울에 반사돼 벽에 기대어 있던 담기량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계산된 장치다. 누군가 상자를 열면 안에서 나온 빛이 거울에 반사돼 담기량에게 향하도록 고안된 거야. 뭘 노리고 이런 거지?’
의혹에 찬 눈빛으로 붉은 빛이 나오는 상자와 담기량을 번갈아 보던 도현의 얼굴이 어느 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담기량이 갑자기 두 눈을 뜬 것이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도현은 깜짝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담기량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분명히 죽어 있었는데, 멀쩡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누워 있던 거목이 다시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일어서는 것처럼 담기량의 움직임에서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투명한 눈빛으로 말없이 도현을 노려보던 담기량은 좌우로 목을 꺾고 허리를 반듯이 폈다.
우드드득. 우드드득.
관절이 부딪치는 소리가 작은 방 안에서 선명하게 났다.
“누가 날 깨울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어린 녀석이 들어왔군.”
죽음 앞에서도 평정심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 온 도현이었지만, 나직한 위엄이 서린 음성으로 말을 하는 절세 고수 담기량의 부활에는 표정을 관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담기량 선배님이 맞으십니까?”
“그럼 네 눈앞에 내가 누구로 보이느냐?”
감정이 절제된 담기량의 음성에 도현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답했다.
“믿어지지가 않아서 여쭸습니다. 좌정하신 채 선계로 가신 줄 알았습니다.”
담기량은 예를 차리며 공손히 답하는 도현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다 말문을 다시 열었다.
“어디서 온 누구냐?”
“한국에서 온 백도현이라고 합니다.”
도현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지금 상황이 의심스럽고 믿어지지 않았지만 일단 담기량과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한국? 어디에 있는 곳이지?”
도현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과거엔 고려라 불렸습니다.”
“고려가 망했나 보군. 넌 고려의 후손인가?”
“그 땅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현을 빤히 쳐다보던 담기량은 방을 벗어나 마당으로 나가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그가 가꿨던 화원과 채소밭은 다 사라지고 그 위에 나무와 풀만이 무성했다.
“긴 시간이 흘렀군. 명나라는 어떻게 됐지?”
“명나라 역시 수백 년 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뒤따라 나온 도현의 대꾸에 담기량의 두 눈썹이 꿈틀댔다.
“원나라 황제가 주원장을 죽여 달라고 해서 모른 척했는데, 결국 그의 나라도 멸망을 피하지 못했군.”
“…….”
도현은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 느낌이 들어 실로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상대는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그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부활한 걸까? 상자 안에 그 붉은 옥피리와 관계있는 것 같은데.’
붉은 빛의 근원지는 목함 안에 들어 있던 붉은 옥피리였다.
담기량이 깨어나는 순간, 붉은 옥피리는 부서져 버렸고, 더 이상 붉은 빛기둥은 생성되지 않았다.
붉은 옥피리는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뒷짐을 진 담기량의 등을 바라보는 도현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전설의 절세 고수와 얘기를 나눈다는 것은 결코 평범치 않은 좋은 기회였다. 무학에 대한 조언을 구할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와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보통 깐깐한 성격이 아닌 것 같았고, 뭘 부탁한다 해서 쉽게 들어줄 인상은 아니었다.
자칫하면 빈손으로 이곳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죽은 내가 부활해 당황했느냐?”
“조금은 그렇습니다.”
속마음을 지적당한 도현은 숨기지 않고 인정했다. 그러자 담기량은 껄껄대며 소리 내어 웃었다.
“마당이나 정리해라.”
“예?”
“내가 깨어나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렇게 두 눈 뜨고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느냐?”
당연한 것처럼 지시를 내린 담기량은 한쪽에 가부좌를 틀고서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거냐?”
멀뚱히 서 있던 도현은 그의 다그침을 받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당과 집 주변을 깨끗이 정리해 갔다.
뿌리를 내린 무거운 나무도 도현의 손이 가면 뿌리째 뽑혀 마당에서 자취를 감췄다.
“힘 하난 좋군. 그러니 내가 남긴 진법을 통과했겠지?”
“돌기둥에 내공을 주입하게 만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녹이 잔뜩 슬어 굴러다니던 호미를 찾아내 마당의 풀을 긁어내던 도현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아무나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날 귀찮게 하던 녀석들이 몇몇 있었거든. 한데, 넌 이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느냐?”
도현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히 답했다.
“검선문의 제자들이 우연히 찾아냈지만 진법을 열지 못했고, 그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제가 들어오게 됐습니다.”
“검선문이라고?”
“예, 그 문파에 대해 잘 아십니까?”
“모를 수가 없지. 강호에서 활약할 당시에 유일하게 내 검을 막은 자가 검선문의 문주였으니까. 그의 오원신공에 크게 데어서 낭패를 볼 뻔했다.”
호미로 마당의 풀을 긁어내던 도현은 귀를 쫑긋 세우며 그를 쳐다봤다.
“외람되지만 검선문 문주에게 패하셨던 겁니까?”
“난 강호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담기량의 두 눈에서 번갯불 같은 파란 정광이 일렁이자 도현이 쌓아 놓았던 나무 더미가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불씨와 재를 보며 도현은 가슴 한쪽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검이다. 그의 몸에서 빛으로 만들어진 검 하나가 생성돼 날아와 나무를 순식간에 불태운 거야.’
검을 매개체로 날리는 검기는 도현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빈손으로 유형의 검을 만들어 낸다는 건 그도 아직 도달하지 못한 지극히 높은 검의 경지였다.
마음으로 검을 만들어 내는 경지.
일명 심검으로 향하는 경지였기 때문이다.
검과 하나가 되는 경지를 뛰어넘어 마음이 곧 검이 되는 경지는 궁극적으로 도현이 도달해야 할 검의 길이였다.
‘눈앞에서 심검의 일종을 보게 되다니.’
괜히 절세 고수 담기량이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니었다.
“오원신공이 천하의 신공이지만 그 또한 상대적인 것. 오원신공을 만든 검선 이연백도 아닌 자에게 어찌 내가 패하겠느냐.”
“후배가 아는 게 적어 말실수를 했으니 노여움을 푸십시오.”
정중한 도현의 사과에 담기량은 수염을 훑으며 물었다.
“검선문엔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넘쳐 나는데 어찌 한 명도 내가 만든 진법을 열지 못했지?”
“선배님이 살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는 많이 다릅니다. 문파들은 사라지고 검선문 정도나 그 무맥을 간신히 잇고 있는 정도입니다. 당연히 선배님 시대와 무공의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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