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4] 디 임팩트 23권 4화
“이제 료쿄와 주성하만 제거하면 되겠군.”
손에 피를 묻힌 이상, 마무리를 해야만 했다.
그는 신법을 발휘해 먼저 산을 내려간 그들의 뒤를 빠르게 뒤쫓았다.
‘어디로 갔지? 올라올 때 길을 이용하지 않았나?’
산을 한참 내려온 그는 료쿄와 주성하가 보이지 않자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더욱 속력을 냈다.
‘저기 있군.’
무엇이 그리 급한지 그들도 신법을 발휘해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멈춰라!”
고진영의 고함 소리를 들은 주성하와 료쿄는 계곡 옆에서 걸음을 멈췄다.
“젠장, 같이 내려가기 싫어서 서둘렀는데 그새 따라왔네.”
주성하는 투덜거리며 맑은 계곡물을 손으로 몇 번 떠서 마셨다.
그가 목을 축이고 일어설 때쯤 고진영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계곡가에 뚝 떨어졌다.
“왜 그렇게 서두르느냐, 뭐가 그리 급하다고.”
“영초를 빨리 찾으라고 저희를 다그치셨잖습니까. 그래서 좀 서둘러 산을 내려가는 중이었습니다. 한데 육 사형과 방 사형은 어디 갔습니까? 함께 내려온 게 아닙니까?”
주성하의 물음에 고진영은 옆에 서 있는 료쿄를 힐끔 쳐다보며 대꾸했다.
“그들은 따로 산을 내려갔다.”
“그렇습니까?”
주성하는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 고진영의 신발에 묻어 있는 많은 양의 혈흔을 발견했다.
‘왜 신발에 피가…….’
표정이 굳어진 주성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고진영을 쳐다봤다.
“대사형, 혹시 내려오다 산 짐승이라도 만났습니까?”
“전혀. 그건 왜 물어보는 거냐?”
“아닙니다, 아무것도.”
“눈치챘구나.”
고진영의 검이 번개처럼 빠져나와 주성하의 얼굴로 향했다. 사형제들 중 가장 무공이 낮았던 주성하로서는 완벽히 피하기 어려운 공격이었다.
예리한 검기에 얼굴이 두 조각 나려는 찰나, 곁에 서 있던 료쿄가 폭발적인 쾌검으로 고진영의 가슴을 찔러 갔다.
고진영은 주성하를 포기하고 급히 뒤로 물러나 료쿄의 검을 피해 냈다.
“무슨 짓이죠?”
검을 겨눈 료쿄가 싸늘한 눈빛으로 물었다.
“역시 매서워, 사매의 검은. 하지만 오늘 이 산에서 아무도 내려가지 못한다.”
“우릴 죽인다는 뜻인가요? 이유가 뭐죠?”
료쿄는 고진영과 싸움을 앞둔 상황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태도를 보였다.
“사부 밑에 제자는 나 혼자면 족하다는 생각이다. 너희들은 있어도 도움이 안 되는 존재일 뿐, 오히려 내 목숨과 지위만 위태롭게 할 뿐이야.”
검을 검집에 꽂은 고진영은 내공을 손에 모았다. 손이 불타오르듯 빨갛게 달아올랐다.
“료쿄, 네 검술이 뛰어나다 하지만 내 막강한 내공의 결정체인 이 장법을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쪽을 원해요?”
“어느 쪽이라니?”
“팔, 다리. 원하는 부위를 말해 봐요. 잘라 줄 테니.”
그녀의 눈빛은 검을 품은 것처럼 날이 섰고 차가웠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그녀의 도발적인 시선이 고진영을 잠시 망설이게 했다.
그 틈을 이용해 주성하가 재빨리 나섰다.
“고 사형, 지금 크게 실수하는 겁니다. 우릴 죽인다 해서 사부로부터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그런 단순한 생각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그걸 떠나서 당장 지금 자신의 형편을 생각해 보십시오. 구사저와 싸워 이길 자신이 있습니까? 설사 이긴다 해도 사지가 멀쩡하긴 힘들 겁니다. 비참한 몰골로 산을 내려가다 산짐승의 밥이나 되겠지요.”
“너같이 복잡하게 생각하는 놈은 그런 걱정을 할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주성하의 경고 섞인 말은 도리어 고진영을 자극했다. 넓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던 그는 주성하를 향해 천옥수를 펼쳤다.
태선군의 절기 중 하나인 천옥수는 검처럼 변화가 무쌍하고 바위를 부술 정도로 위력이 강맹한 것으로, 일찍이 내공이 탄탄한 고진영에게만 태선군이 일부 전수해 준 무공이다.
비록 태선군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완벽한 천옥수가 아니었지만, 위력만큼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아서 천옥수를 펼치며 다가오는 고진영의 모습은 사신과 다름없었다.
“네놈 먼저 죽여 주마!”
하늘을 뒤덮는 수많은 손을 보며 정신이 아득해진 주성하는 비명처럼 료쿄의 도움을 청했다.
“구사저!”
“엎드려!”
료쿄의 검이 화려한 궤적을 만들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옥수와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콰앙!
마른하늘에 벼락 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두 사람은 곧 바짝 붙어서 서로를 향해 치명적인 살수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목숨을 두고 겨루는 승부에서 사형제간의 정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서걱.
손을 칼처럼 이용하는 고진영의 손날에 의해 료쿄의 긴 머리카락이 싹둑 잘려 나갔고, 팔다리엔 붉은 핏물이 튀어 올랐다.
“몸이 찢겨 죽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목을 내밀어라, 료쿄!”
“당신 걱정이나 해.”
천옥수에 고전하는 듯싶던 그녀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얼굴로 매서운 일격을 날렸다.
완전치 못한 천옥수의 빈틈을 노리고 들어간 그녀의 검은 고진영에게 화끈한 고통을 심어 주었다.
“빌어먹을 년! 곱게 죽을 것이지!”
옆구리에 부상을 입은 고진영은 머리끝까지 화난 얼굴로 료쿄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움을 계속했고, 두 사람이 흘린 피는 계곡을 붉게 적셔 갔다.
간간이 주성하가 도움을 주려 끼어들었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생각보다 고진영의 무공이 뛰어나 승패를 예측하기 어렵게 됐다.
‘젠장, 이럴 때 백도현이라도 있었으면 좋을 텐데.’
머릿속이 복잡해진 주성하는 결국 다른 수를 썼다.
“고진영! 내 이대로 산을 내려가서 무슨 수를 쓰든 사부님을 찾아내 만날 것이다! 오늘 이 산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고할 것이야! 사부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참으로 궁금하다!”
그 말을 남기고 주성하는 산 밑으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당황한 고진영은 료쿄를 뿌리치고 도망치는 주성하를 쫓아갔다.
“주성하! 산을 내려가기 전에 넌 내 손에 잡힌다!”
“잡아 봐!”
“네놈이 복면인과 한패라는 걸 사부가 알아도 네 말을 좋게 들을 것 같으냐! 오히려 네놈이 나타나자마자 죽이려 드실 것이다!”
“무슨 헛소리냐, 고진영!”
원시림 사이로 사력을 다해 도망치던 주성하가 외쳤다. 그러자 료쿄의 검을 피하며 고진영이 크게 소리쳤다.
“내통자가 없이 어떻게 사부의 행적을 알고 그 복면인이 때마다 등장했겠느냐! 사부에게는 우리들 중에 배신자가 있을 리 없다고 강조했지만, 난 벌써부터 네놈과 료쿄가 의심스러웠다!”
“방귀 뀌는 소리 하고 있군!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배신자 같은데! 그러니 우리들을 다 죽이려 드는 거지!”
“내 짐작이 맞구나! 너희 두 연놈들이 복면인과 손을 잡은 거야! 그래, 도망가 보아라! 내 더 이상 쫓지 않겠다! 사부에게는 너희들이 배신자라고 보고하겠다!”
료쿄를 상대하느라 주성하를 잡는 게 쉽지 않았던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어쩔 수 없지, 료쿄만이라도 죽이는 수밖에.’
그는 도망치는 주성하를 더 이상 쫓지 않고 료쿄를 상대하기 위해 몸을 돌리다 근처에서 그를 쳐다보고 있는 복면인을 발견했다.
“너, 넌!”
“시끄럽게 잘도 떠들어 대더군. 그렇게 나를 찾고 싶었나?”
팔짱을 낀 도현은 몸무게가 없는 사람처럼 풀잎 위에 서 있었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의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몸이 움직이는 놀라운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고진영의 기를 단번에 죽이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많이 다쳤소?”
도현의 물음에 료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로.”
“백 형!”
도망치던 주성하까지 복면인을 보며 인사를 하자, 고진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런 빌어먹을! 너희 놈들 진짜 배신자였구나! 복면인과 한 패거리였어!”
경악을 한 고진영은 원시림 속으로 냅다 뛰어 들어갔다. 주성하와 처지가 뒤바뀐 것이다.
그를 쫓으려던 료쿄를 도현이 제지했다.
“그는 내게 맡기고, 상처나 치료하시오.”
* * *
“빌어먹을! 빌어먹을! 료쿄와 주성하가 그자와 한패였다니.”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비밀을 알게 된 사람처럼 고진영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대체 목적이 뭐지?”
산등성을 넘어 도망치던 고진영은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봤다. 쫓아오는 기색이 없었지만 그는 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복면인은 사부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 강자 중에 강자였다. 그와 싸운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살려면 도망쳐야 한다. 내가 비밀을 알게 됐으니 살려 두려 하지 않을 거야. 큰일이군. 오늘 내가 악수를 뒀어.’
료쿄와 싸우다 입은 부상이 욱신거렸지만, 그는 그 통증을 참고 부지런히 산을 넘었다.
한참을 도망치던 그는 기겁을 하며 몸을 세웠다.
복면인이 바위 위에 앉아서 멀리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발걸음이 늦군. 오래 기다렸어.”
“넌 누구냐!”
“지금 그걸 물을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
“가까이 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왔던 길로 다시 도망치려던 고진영은 섬뜩한 도현의 눈빛에 압도당해 몸이 굳어졌다.
“날 죽이지 않을 거요?”
“당신 하는 짓 봐서.”
도현은 고진영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여러 번 움직이는 걸 봤다.
‘신뢰를 주기 어려운 인물이군.’
고개를 돌려 잠시 산 아래를 내려다보던 도현이 천천히 입을 뗐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겠어. 나를 돕든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든지.”
“뭘 도우란 말이오?”
“태선군을 잡는 일.”
고진영은 사부가 시체가 되어 땅에 쓰러지는 것을 상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도우라는 건지 모르겠소만.”
“태선군이 당신에게만 연락한다고 들었어. 그에게 연락이오면 세 가지 영초를 다 찾았다고 보고해. 그럼 그가 당신을 찾아오든지 아니면 제3의 장소로 당신을 오라고 부르겠지.”
“사부를 유인하라는 뜻이오?”
“맞아.”
도현은 손에 끼우고 있던 나뭇잎을 앉아 있던 바위 위에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떡하겠나?”
“왜 사부를 죽이려 하는 거요?”
“그건 알 필요 없어. 당신이 두려워하는 태선군을 없애 줄 사람이 나타났다는 게 오히려 기쁜 일 아닌가? 그것 때문에 사형제들을 모두 죽이려 했으니 말이야.”
정곡을 찌르는 도현의 말에 부끄러움이 솟구친 고진영은 굳은 표정으로 도현을 노려보기만 했다.
“사부를 확실히 죽여 줄 수 있소?”
“당신이 적극적으로 협조만 하면 보다 쉽게 일이 풀리겠지. 시간도 줄고.”
“그렇다면 내 가치가 상당하군.”
고진영의 태도가 마치 칼자루를 쥔 사람처럼 바뀌자, 도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진영을 향해 가볍게 손짓을 했다.
펑 소리가 나며 수십 미터나 몸이 날아간 고진영은 여러 그루의 나무를 부러트리며 땅에 처박혔다.
“우엑!”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피를 토하는 고진영에게 다가온 도현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착각하지 마. 당신이 반드시 필요하단 말은 또 아니니까.”
“아, 알겠소. 이해했으니까 그만하시오.”
말 한번 잘못했다가 저승 문턱까지 다녀온 고진영은 도현의 눈치를 보며 일어섰다.
순간 극심한 현기증이 밀려왔고 그는 좌우로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지독하군. 단 한 수에 몸이 엉망이 됐다. 내상이 심해.’
고진영은 새삼 도현의 무서움을 깨닫고 바짝 긴장이 됐다.
‘그나저나 불안하군. 이자가 강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사부도 만만치 않은데 말이야.’
덩치는 곰처럼 크면서도 속내는 여우 못지않은 고진영은 마지막까지 사부와 도현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돕겠소. 사부의 그늘 밑에서 불안하게 살고 싶지 않으니까. 단,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오.”
“뭐지?”
“당신이 왜 사부를 죽이려 하는지 모르겠지만, 날 이용하고 죽일 생각은 하지 말란 거요.”
도현은 몸 곳곳에 피를 흘리고 있는 고진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료쿄와 주성하가 기다리고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요?”
고진영이 따라가며 물었다.
“굳이 대답을 해야 하나?”
도현의 간결한 대답이 고진영을 오히려 안심시켰다.
‘약속을 쉽게 어길 녀석은 아니로군. 한데 대체 누구지? 목소리는 젊어 보이는데 말이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그는 도현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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