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 디 임팩트 23권 5화
“그렇게 늦게 걸어서야 밤이 돼서나 도착하겠군.”
“조금 전 당신이 손을 쓰는 바람에 몸이 정상이 아니오.”
“그럼 내가 도와주지.”
도현은 공깃돌처럼 그를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린 후, 신법을 발휘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고진영은 절로 입이 벌어졌다.
‘평생 신법만 연습했나? 이자에게서 도망치는 건 꿈도 못 꾸겠군.’
험한 산속을 물 흐르듯 달리는 도현에게 고진영이 슬며시 물었다.
“한데 말이오, 료쿄와 주성하는 어쩔 거요? 아까 일로 인해 그들은 날 곱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
“그들도 태선군이 목적이다. 당신이 진심으로 사과하면 받아들일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료쿄는 몰라도 주성하 그 녀석은 내가 몸이 약해져 있는 지금을 놓치지 않을 게요. 차라리 그 녀석을 죽이는 게 어떻소, 내가 당신을 돕기로 한 이상 그 녀석은 쓸모가 없을 텐데?”
그의 말을 들은 도현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군.”
도현은 그를 땅에 내팽개쳤다.
“잘 들어, 고진영. 내 앞에서 그따위 소리를 한 번만 더 지껄이면 망설임 없이 널 죽일 거야. 상황 판단 똑바로 해.”
차가운 그의 시선에 고진영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알겠소. 내가 너무 앞서간 것 같소.”
얼마 후 그들은 료쿄와 주성하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검을 들고 다가오는 료쿄의 모습에 당황한 고진영은 도현을 방패 삼아 크게 말했다.
“미안하다, 사매! 내가 오판을 했다! 지금부터 난 너희와 한편이다!”
“한편? 또다시 우리 뒤에서 기습이나 하겠지.”
“천만에. 믿어도 좋다. 사부가 죽으면 검선문을 해체하고 우리 모두 제 갈 길을 가자. 나는 사업가의 길로 가고, 너는 열심히 네 하고 싶은 검을 수련하고, 그리고 너, 주성하 너는 죽은 섭상이 남겨 놓은 재산으로 아무튼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고.”
“믿지 못하겠는데…….”
눈을 가늘게 뜬 주성하는 독사 같은 눈빛으로 고진영을 노려봤다.
“믿지 못하겠어? 좋아, 그럼 다 덤벼, 이 빌어먹을 것들아! 사부고 뭐고 이 자리에서 난 그냥 너희들과 함께 죽고 말테니까!”
고진영이 분노하며 나서자 료쿄와 주성하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 한쪽에 서 있는 도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를 믿는 건 아니겠죠? 그는 언제든 사부에게 돌아설 인물이에요.”
료쿄의 말을 들은 고진영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헛소리! 내가 육기천과 방상을 죽이고 너희들까지 죽이려 한 이유가 뭔데! 구역질 나지만 사부가 두려워서다! 이제 나도 이 더러운 상황에서 깨끗이 해방되고 싶다.”
“퍽이나 그러겠소.”
주성하가 이죽거리자 고진영이 발끈했다.
“이 자식이!”
“그만.”
도현은 세 사형제들 사이에 서서 그들을 차례로 둘러봤다.
얼마 전까지 서로 죽이려 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믿음을 회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보였다.
“나에게 중요한 건 당신들 사형제간에 다툼이 아니라 태선군이다. 부디 내가 다른 생각을 품지 않게 조금씩 고려해 줬으면 좋겠군.”
스르릉.
료쿄는 검을 회수했고, 주성하는 더 이상 적대적인 시선으로 고진영을 노려보지 않았다.
고진영 역시 더는 료쿄와 주성하를 자극하지 않았다.
“험, 목이 타는군.”
몸을 숙여 태연히 계곡물을 떠먹는 고진영의 뒷모습을 힐끔거리던 주성하가 도현에게 속삭였다.
“백 형이 무슨 생각으로 저자를 살려 뒀는지 이해는 하지만,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되오.”
도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오. 담기량의 은거지…… 그곳은 어찌 되었소? 가 보니 절벽이 통째로 무너져 있던데.”
“그 일은 나중에 말합시다. 고진영이 있는 데서 듣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면.”
주성하는 궁금해 미칠 것 같았지만 물을 마시고 몸에 묻은 피까지 씻어 낸 고진영이 가까이 다가오자 더는 도현을 붙잡고 늘어질 수가 없었다.
“내려갑시다.”
사람이 사라진 계곡은 다시금 정적에 휩싸였으나, 그 정적은 얼마 가지 않아 깨졌다.
계곡을 둘러싼 원시림의 수풀에 엎드려 있던 육기천이 피투성이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흐흐흐, 고진영.”
광기가 일렁이는 눈동자로 도현과 고진영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던 그는 힘겹게 내려와 계곡에 머리를 처박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아, 하아.”
하늘을 보고 누운 그는 양팔을 눈높이에 들어 올렸다.
가슴에 칼을 맞고 한 손까지 잘렸지만, 그는 그 폭발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목이 잘려 죽은 방상의 몸을 방패 삼아 최대한 폭발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게 큰 도움이 됐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하늘에 도움이 없었다면 무너진 동굴에 사람 한 명이 드나들 수 있는 작은 공간이 만들어지진 못했을 것이다.
“방상아, 내 동생아, 걱정 말아라. 이 형이 네 복수를 해 주겠다.”
하늘을 보며 원한에 찬 복수를 다짐한 그는 계곡으로 내려오며 찾아낸 몇 가지 약초를 입으로 질겅질겅 씹어 가슴과 손목 상처에 발랐다.
어려서부터 옥룡산에 입산해 생활을 했던 터라 상처에 도움이 되는 약초는 웬만한 건 그도 알았다.
상처를 지혈하고 소독을 한 그는 너덜거리는 옷가지를 입으로 길게 찢어 손이 사라진 부위를 칭칭 감쌌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일어서다 휘청거린 그는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산을 내려갔다.
“으하하하하! 고진영!”
* * *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잠을 깬 태선군은 거울에 자신에 얼굴을 비춰 봤다.
코가 옆으로 삐뚤어져 있고, 눈알이 반쯤 삐져나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위태로웠다.
또한 얼굴에 주름은 고랑처럼 깊었다.
코와 눈이 정상이 아닌 괴물처럼 보이는 노인의 얼굴.
‘또 변했군.’
패천공을 익혀 중년의 모습으로 회귀했던 그는 며칠 전부터 뜻하지 않은 부작용에 시달려야만 했다.
때때로 얼굴이 괴상하게 변하는 것이다.
그가 받은 충격은 대단했지만, 그는 그 해결책을 쉽사리 찾아냈다.
“누, 누구세요.”
호텔 객실의 침대보로 몸을 가린 여자에게 태선군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놀랄 것 없다. 네가 알던 어젯밤의 멋진 남자로 금세 변할 테니까.”
알몸 상태로 일어선 그는 벽을 뚫고 옆 객실로 침입했다.
회사 업무차 출장을 왔던 일본인 남성은 전화를 걸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이 맨몸으로 단단한 벽을 뚫고 오다니.
“뭐, 뭐야.”
“나를 위해 죽는 걸 영광으로 알거라.”
일본인 남성은 도망치려 했지만 왠지 몸이 말을 안 들어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거미줄에 걸린 날벌레처럼 몸부림치는 그의 얼굴 위로 태선군의 손이 다가갔다.
“곧 끝이 날 것이다.”
“크아아아아!”
머리카락이 푸석푸석해지고 피부가 바싹 말라 뼈에 달라붙었다.
고통스러운 얼굴로 입을 벌린 채 죽은 일본인 남성의 시신을 잠시 내려다보던 태선군은 손으로 얼굴을 만져 보았다.
중년인의 모습으로 다시 변해 있었다.
“보았느냐? 네가 알던 남자로 다시 돌아왔지?”
태선군의 행동을 뒤에서 지켜보던 여자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사, 살려 주세요.”
“누가 죽인다 하더냐. 어린 게 겁이 많구나. 그 입만 조심하면 장수할 수 있다. 내 말 이해했겠지?”
클럽 직원으로 일하는 여자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끄러미 여자를 내려다보던 그는 욕실로 향했다.
평상시라면 여자도 입막음을 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얼굴이 변하더니 마음도 제멋대로 바뀌는 건가?’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태선군은 옷을 갖춰 입었다.
그때까지 여자는 멍한 얼굴로 전화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도망칠 줄 알았는데 왜 아직 그러고 있느냐?”
명품 시계를 손목에 차며 그가 묻자 여자는 긴장된 얼굴로 침묵했다.
“내가 묻지 않느냐.”
차가운 그의 어조에 여자는 그때서야 고개를 돌려 대꾸했다.
“하, 한 사람만, 한 사람만 절 위해 죽여 주세요. 그럼 당신을 위해 무엇이든 할게요.”
“날 천박한 살인 청부업자로 보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이년!”
유령처럼 다가온 태선군이 여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따위 요구를.”
“다, 당신은 저와 하룻밤을 함께한 사람이죠.”
그녀의 당돌한 대답에 순간 태선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수, 숨이 막혀요. 제발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사, 상관없어요. 부탁만 들어주시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절 죽이셔도 괜찮으니까요.”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의 모습에도 태선군은 감정 없이 말했다.
“살려 주려 했더니, 기어이 명을 재촉하는구나.”
태선군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손을 쓰지 못했다. 여자의 얼굴이 아주 오래전 그녀와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머리가 아프군.’
여자를 놓아준 태선군은 수만 마리의 거머리가 뇌에 달라붙어 골을 빨아 먹는 것과 같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눈동자가 충혈된 그는 격렬히 끓어오르는 과격한 감정을 계속 억눌렀다.
그가 패천공을 익힌 건 젊음과 세속적인 욕망 때문이지 이성 없이 멋대로 행동하는 광인을 원한 건 아니었다.
이 부작용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맑은 정신을 유지시켜 주는 태청단을 만들어 복용하거나, 패천공을 대성하는 수밖에 없다.
“괜찮으세요?”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여자의 손길을 거부한 그는 찬물에 세수를 하고 나온 후 머리를 손질했다.
중년의 외모는 그가 많은 것을 희생시켜 얻은 소중한 것이다.
“어떤 놈이냐?”
“네?”
“죽이고 싶다는 놈.”
그의 말에 여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수광마을
고대 무림인이었던 절세 고수 담기량의 심득은 오롯이 그 혼자만의 경험의 산물이 아니고, 도도하게 흘러 내려왔던 그 전 시대의 무림의 기억과 경험의 합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수백 자의 구결 속에 함축된 것은 무도의 길을 가는 자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귀중한 깨달음의 보고로서, 글자 하나 문구 한 구절에서도 다양한 해석과 깊은 정신적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구결은 매우 고차원적인 것들이라 준비되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저 지루하고 보잘것없는 글귀들에 불과했다.
며칠 전 산을 내려온 도현은 주성하가 소유한 항주 인근의 별장에서 담기량의 심득을 참오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그동안 자신이 얻은 무학적인 깨달음을 더욱 풍성하고 예리하게 가다듬고 있었다.
‘대체 3일간 밥도 안 먹고 뭘 수련하는 거지?’
문틈을 통해 도현이 명상하는 장면을 훔쳐보던 주성하는 솟구치는 의심을 참을 길이 없었다.
‘지하 협곡 안에서 뭔가를 얻은 게 분명해.’
도현으로부터 아직 담기량의 은거지와 관련된 자세한 얘기를 듣지 못한 터라, 주성하의 마음은 하루하루 애가 탔다.
“그만 훔쳐보고 들어오시오.”
명상에서 깨어난 도현과 시선이 마주친 그는 헛기침을 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백 형, 오랫동안 밥을 굶으면 아무리 무인이라도 힘이 빠질 텐데, 그만 나와서 식사나 같이 합시다.”
“며칠이나 지났소?”
“3일 정도 됐소. 아니, 그런데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참으로 대단하시오.”
놀란 표정을 지은 주성하는 침대 옆 바닥에 좌정을 하고 있는 도현의 맞은편에 슬그머니 자리를 잡았다.
“백 형, 무슨 무공을 수련한 것이오? 심법 같은데…….”
“태선군과의 결전이 다가온 느낌이 강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소.”
“그렇구려.”
도현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주성하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조바심이 났군.’
도현은 그의 속내를 읽고서 속으로 피식 웃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성하는 도현이 일어서는 간단한 동작에 뭔지 모르지만 숨이 턱 하는 압박감을 받았다.
‘3일간 정신을 갈고닦아서인가? 왠지 또 달라 보이는데?’
한없이 자신이 왜소해지는 느낌을 받은 주성하는 안경을 바로 하며 도현을 따라 일어섰다.
“고진영과 싸우지는 않았소?”
“그와 싸울 일이 뭐가 있겠소? 호랑이 같은 당신이 떡하니 여기 버티고 있고, 구사저가 검을 빼 들고 한쪽에서 주시하고 있는데.”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방을 나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