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 디 임팩트 23권 6화
별장 주변은 나무가 우거진 숲이었지만, 차를 타고 얼마간 나가면 빌딩과 차가 돌아다닌다.
섭상이 남긴 재산 중 반을 주성하가 빼돌렸는데, 항주에 있는 이 별장도 그중 하나였다.
“료쿄를 데리고 오시오. 담기량의 은거지와 관련된 얘기를 해 주겠소.”
“그게 정말이오? 잠시만 기다리시오.”
크게 기뻐한 주성하는 두 동의 별장 건물 중 왼쪽 동의 건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료쿄와 고진영이 머물고 있었다.
‘곧 새해군.’
도현은 담담한 얼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새해는 아무래도 이곳에서 맞이해야겠어.’
며칠 전 산을 내려온 뒤, 용주와 홍영에게는 연락을 해 두었다.
머지않아 태선군이 고진영에게 연락을 해 올 것 같았기 때문에 그는 고진영 주변에 있어야만 했다.
‘그를 놔두면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 거야.’
벽곡촌 사람들을 죽인 마인이 태선군이라는 걸 거의 확신한 도현은 그를 하루라도 빨리 제거하려 마음먹고 있었다.
제2, 제3의 벽곡촌 사건이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그는 더욱 강해졌을지 몰라.’
핏빛으로 물든 석양을 바라보던 도현은 뒤를 돌아봤다.
주성하가 료쿄를 데리고 별장의 정원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료쿄의 겉옷 사이로 붕대가 언뜻 보였다.
잠시 료쿄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도현은 별장 주변 나무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지하 협곡에서의 일을 차분히 꺼냈다.
“당신들이 떠나고 돌기둥을 이용해 담기량의 은거지로 들어갔습니다. 숲과 새들이 있고,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더군요. 숲속에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곳에서 생전 모습 그대로인 담기량의 유해와 붉은 옥피리가 담긴 목함을 발견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붉은 옥피리의 기운을 흡수하고서 그가 부활을 했습니다.”
“담기량이 부활을!”
주성하와 료쿄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이 커졌다.
하지만 보고 온 당사자가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들은 숨죽이며 도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영면에 들어갔고, 내게 출입구를 봉쇄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절벽이 무너진 건 그 때문입니다.”
“무공은? 무공은 남기지 않았소? 영약과 같은 보물은?”
주성하는 도현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그치듯 물었다.
“그는 자신의 심득만을 내게 남겼소.”
“오, 심득! 절세 고수의 심득이라면 그 가치가 어마어마하겠군, 하하하!”
주성하는 료쿄를 쳐다보며 뛸 듯이 기뻐했다.
“거보십시오, 구사저. 내 말이 맞지요? 백 형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니까요.”
“아직 내 얘기 다 끝나지 않았소.”
“아, 미안하오, 백 형. 내가 마음이 급해서.”
주성하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계속 말하라는 손짓을 했다.
“담기량의 심득이 담긴 구결은 총 862자. 그중 일흔두 자를 알려 주겠소.”
“뭐라 하셨소? 일흔두 자라니?”
웃음기가 사라진 주성하가 도현을 노려봤다.
“일흔두 자? 구결의 반도 아니고?”
“그렇소.”
“백 형, 이 무슨 개 같은 말이오! 육 사형이 담기량의 은거지를 발견했다고 정보를 제공한 게 누군데, 겨우 일흔두 자라니! 누구 덕에 심득을 얻었는지 정녕 모르고 그리 뻔뻔하게 말하는 거요?”
“담기량은 내게 그런 말을 했소.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들어왔다면 죽였을 것이라고.”
걸음을 멈춘 도현은 흥분한 주성하와 다소 실망한 표정의 료쿄를 차분히 쳐다봤다.
“나도 같은 말을 해 주고 싶소.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서 당신들을 죽였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거요?”
“적다 하지 말고 그것만이라도 자기 것으로 만드시오. 평생 가도 일흔두 자의 의미를 다 깨닫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차가운 도현의 눈빛에 흥분이 가라앉은 주성하는 은테 안경을 벗고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일흔두 자가 뭐요, 일흔두 자가. 팔십 자 채워 주시오. 난 괜찮지만 여기 구사저가 보통 실망한 게 아니라서.”
“주 사제, 그만해.”
료쿄는 구결 몇 자를 더 얻기 위해서 비굴한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고마워요. 당신 말대로 일흔두 자를 완벽히 내 것으로 만들어 보도록 하죠.”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구결이 많다 해서 당신들에게 다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니까. 심득은 그 한 자 한 자가 당신들이 평생 짊어져야 할 수련의 무게만큼 무겁고 깊이가 있소.”
“대단히 높게 평가하는군요. 요 며칠간 당신은 그의 심득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나 보죠?”
“일부는.”
도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섭섭한 마음이 가시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주성하는 투덜거리며 수첩을 꺼냈다.
애초에 그가 장소를 찾아냈다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도현에게 구결의 반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테지만, 아쉽게도 육기천이 장소를 찾아냈다.
솔직히 그도 이 이상으로 더 내놓으라고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싸워서 억지로 빼앗을 수도 없었고, 주는 대로 받는 게 이로웠다.
‘빌어먹을. 백도현만 좋은 일 시킨 게 아닌가?’
주성하는 도현의 코앞에 수첩을 내밀었다.
“여기다 일흔두 자를 적어 주시오. 아니면 그냥 말해 주겠소? 일흔두 자 정도는 이 자리서 외울 수 있으니까.”
“지금은 곤란하고 태선군 일이 정리되면 그때 말해 주겠소.”
“그건 또 무슨 말이오?”
“그럴 가능성은 낮게 보지만, 두 사람을 통해 담기량의 심득이 태선군에게 전달될 수도 있기 때문이오.”
“죽으면 죽었지 우리가 왜 사부에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이오?”
“나도 그렇게 믿고 싶지만, 나로서는 만일을 대비하지 않을 수가 없소. 그러니 기다려 주시오.”
태선군과 같은 고수는 담기량의 심득을 통해 무한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마치 도현이 그랬던 것처럼.
따라서 도현은 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끝까지 살아남아서 백 형에게 꼭 일흔두 자를 넘겨받고 말 거요.”
주성하는 인상을 쓰며 수첩을 내렸다.
“담기량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료쿄는 나무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상태로 물었다.
그녀는 주성하처럼 심득을 당장 얻지 못해 초조해하거나 불만에 차지 않았다. 백도현에 대한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불처럼 뜨거운 강호인이었소. 강호가 사라졌다 하니 그 공허해하던 눈빛이란…….”
“무인에게 강호란 꿈이었겠죠.”
료쿄는 뭔가를 동경하는 눈빛으로 지는 해를 응시했고, 도현도 말없이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같이 응시했다.
‘뭐야, 지금. 강호 타령이나 하고.’
두 사람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주성하는 돌멩이를 구둣발로 걷어찼다.
“가서 저녁이나 먹읍시다.”
* * *
고진영과 사이가 좋지 않은 주성하와 료쿄는 저녁도 따로 했다.
“그는 방에서 하루 종일 자신의 사업 일로 통화를 하고 있어요.”
“카지노?”
도현이 음식을 접시에 담으며 료쿄를 응시했다.
“맞아요. 그에게 카지노 사업은 인생의 전부라고 할 수 있죠.”
“왜 그렇습니까?”
“고 사형은 도박을 즐기는 사람이에요. 검선문의 제자가 안 됐다면 유명한 도박꾼이 되어 있을 정도로요. 죽은 노 사형 말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노름판에서 맞아 죽었다고 해요. 충격을 받아 주사위를 씹어 먹는 어린 그를 사부께서 거두신 거죠.”
비극적인 개인사였다.
‘주사위를 씹어 먹다니. 과연 그는 도박이 즐거워 카지노 사업을 하는 걸까, 아니면 어떤 트라우마가 그를 괴롭히는 걸까?’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백 형, 사부를 처리한 이후엔 뭘 할 거요?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나와 손을 잡고 한국에서 사업을 일으켜 보는 건 어떻소? 한국에 땅이 좀 있는데, 거 경기도하고 제주도 쪽에 말이오. 테마 파크라든가 뭐 그런 걸 조성하면 괜찮을 듯싶은데.”
반란을 일으키다 태선군에게 죽은 섭상은 홍콩에 본사를 둔 부동산 투자 개발 회사를 운영했고, 막대한 부를 일궈 냈다.
그 옆에서 비서 노릇을 하며 따라다니던 주성하는 그 사업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다.
“내 꿈은 창대하오. 홍콩, 중국, 한국, 일본, 나아가 유럽과 아메리카까지, 부동산 제국을 건설할 거요. 이런 일에는 암흑가 녀석들이나 겁 없이 덤비는 떨거지들이 많잖소. 백 형과 내가 나서면 감히 우리를 누가 넘볼 수 있겠소?”
“관심 없소.”
단번에 거부하는 도현의 대꾸에 주성하는 입맛을 다시며 술잔에 술을 따랐다.
“관심 없다니 아쉽구려.”
“검선문 7대 문주인 이연백이 악인들을 가둬 놨다는 동굴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도현은 태선군과 관련된 일로 화제를 돌렸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죠?”
의외라는 얼굴로 료쿄와 주성하가 쳐다보자, 도현은 수저를 내려놓고 그들을 마주 봤다.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다지 많진 않아요. 한때 그런 동굴이 있었다는 걸 사부께 지나가는 말로 들은 정도.”
“위치도 모르겠군요.”
“당연하죠. 사부도 모른다고 했으니까요. 사실, 등선궁은 당신이 알던 것보다 훨씬 방대한 규모였어요. 그런데 원인 모를 화재가 나서 많은 건물이 불타고 귀중한 장서들이 보관되었던 장서고가 잿더미로 변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아마 그 장서고 안에는 악인곡에 위치가 기록되어 있었을 텐데.”
“그 동굴의 명칭이 악인곡이었군.”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알고 있냐는 내 질문에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요.”
도현이 악인곡을 언급하기 전까지 료쿄는 악인곡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 정도로 먼 과거 속 이름이었다.
한데 그것을 도현이 알고 있으니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도현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료쿄에게 천천히 답했다.
“악인곡을 다녀왔으니까요.”
“악인곡을!”
손에 든 술잔을 내려놓으며 주성하가 크게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우리도 모르는 곳을 백 형이 어찌 알고서?”
“나도 알고 찾아간 건 아니오. 시작은 벽곡촌이었지.”
“벽곡촌?”
“그렇소.”
도현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벽곡촌 이야기를 시작했다.
“벽곡촌은 여기 항주에서 꽤나 떨어진 깊은 산중의 오지 마을인데, 수개월 전 어떤 자가 나타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마을 사람들을 남김없이 학살했소.”
“독한 자군. 그 정도 심보는 나도 갖지 못할 정도인데.”
주성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당시 사건을 유일하게 목격한 내 지인의 말을 빌리면, 사건을 일으킨 자는 노인이었고 희생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미라처럼 바싹 말라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로 죽었다 했소.”
“말라 죽었다고? 어떻게 사람을 해치면 그렇게 될 수가 있지? 구사저, 들은 바가 있습니까?”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야. 하지만 평범치 않은 살인 수법인 건 분명해.”
료쿄는 도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알고 있나요?”
“나는 그자가 마을 사람들의 생기를 강제로 흡수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마을 사람들의 생기라고요?”
“자연의 기를 받아들여 체내에 공력을 쌓는 법도 있지만, 이처럼 산 사람을 제물로 해서 공력을 쌓는 방법도 있습니다. 유사한 경우를 내가 직접 봤습니다.”
“어디서 봤나요?”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이계의 흑마법사가 용병들을 해친 사례를 이들에게 사실대로 설명할 순 없었다.
“아무튼 마을 사람들을 해친 자는 무인이라는 심증을 가진 상태로 벽곡촌 일대를 조사했고, 그러던 중 우연히 악인곡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악인곡은 어떻게 생겼소?”
주성하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무저갱처럼 깊고 어둠이 가득한 곳이었소. 수백의 유골도 보였고, 입구엔 이연백이 남긴 비석도 존재했지.”
“검선문의 유적을 당신이 발견하다니, 기묘하군요.”
료쿄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악인곡을 발견함으로써 나는 벽곡촌을 폐허로 만든 자가 누구인지 알게 됐고, 그가 검선문과도 연결됐다는 걸 짐작하게 됐습니다.”
“벽곡촌과 관련된 무인이 검선문 사람이라는 건가요?”
도현이 료쿄와 주성하를 천천히 둘러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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