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 디 임팩트 23권 10화
“우리 마을로 가는 차 같은데, 누굴 찾아온 걸까?”
“궁금하면 따라가 보든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 고물 자전거로 어떻게 쫓아가냐?”
“공장 늦겠다, 그만 가자.”
두 청년은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아 공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야, 근데 운전하던 그 여자 말이야.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누굴 닮은 것 같던데…….”
마을이 관광지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던 청년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꺼냈다.
“누구?”
“그 혼자 사는 할머니 있잖아. 호수에서 낚시하면서 사는 할머니.”
“에이, 무슨 소리야. 그 할머니하고 뭐가 닮았다고.”
“넌 그 할머니 가까이서 자세히 본 적 없지? 나는 부모님 심부름으로 몇 번 그 할머니 집에 가 봤다고. 그분이 젊었다면 조금 전 그 여자처럼 생겼을 거라니까.”
“그런가? 그럼 운전하던 여자는 그 할머니 친척이라도 되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 * *
차를 운전하던 여령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작은 호수 주변으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제법 무성한 숲도 보였다.
수십 년 전이나 수백 년 전이나 이 모습 그대로였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마을의 예스러움이 여령의 큰 눈 가득히 들어왔다.
‘아름다워.’
언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차 안을 봤다.
잘생긴 중년의 외모로 회귀한 태선군이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었다.
‘이 마을엔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
태선군의 지시로 차를 몰고 여기까지 왔지만, 여령은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혹시 이곳에 자리를 잡으려는 걸까?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와 여기서 함께 살아도.’
살인을 일삼는 태선군이었지만 그녀에겐 소중하고 든든한 존재였다.
“내려서 보세요. 마을이 참 아름다워요.”
“알고 있다.”
차갑게 대꾸한 태선군은 지그시 감았던 눈을 떴다.
“여령.”
“네, 주인님.”
“너와 난 여기까지다.”
“네? 그게 무슨…….”
당황한 그녀는 차에서 내리는 태선군의 팔을 붙잡았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태선군의 싸늘한 시선에 여령은 순간 몸이 굳어졌다.
“너와 만난 후부터, 내 머리가 더 아파졌다.”
“하지만 저와 그동안 행복하셨잖아요.”
“행복?”
코웃음을 친 태선군은 여령의 목을 움켜쥐고 하늘 높이 솟구쳤다.
순식간에 수십 미터 허공에 도달한 그는 허공에 뜬 채 말했다.
“보았느냐? 이것이 내 힘이다. 내가 무엇이 부족해 너 따위와 행복을 속삭이겠느냐? 가소로운 계집.”
“오해했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제가 봤을 때 당신은 옆에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요. 진심을 다해서요.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전 당신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자꾸 입만 살아서 나불거리는구나. 정말 날 위해 목숨을 바치겠느냐?”
“물론이에요.”
“그럼 여기서 죽어라. 너 때문에 내 일정에 큰 차질이 벌어졌다. 아까운 시간을 너 때문에 많이 낭비했어.”
여령과 함께 지내느라 그는 고진영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았고 수광마을에도 늦게 찾아왔다.
미묘하게 틀어지는 일정이 그를 불안하게 했고 신경 쓰이게 했다.
“저, 정말 제가 죽기를 바라세요?”
“겁에 질렸구나.”
감정 없는 태선군의 눈빛에 자극을 받은 여령은 온몸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좋아요! 죽겠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하늘 높은 곳에서 보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여령은 태선군의 손을 뿌리치고 땅으로 추락했다.
수십 미터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이라 땅에 추락하면 그녀는 즉사를 피하지 못할 운명이었다.
공기를 가르며 빠르게 떨어지던 그녀는 목청껏 외쳤다.
“날 잊지 말아요! 난 여령이에요!”
콰앙!
큰 충격음과 함께 언덕 위의 땅이 들썩이며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냥 죽게 놔두지 그랬어요.”
여령은 눈물을 흘리며 태선군 품에 안겼다. 그녀가 땅에 떨어질 찰나, 한발 먼저 땅에 내려온 태선군이 그녀의 몸을 안아 든 것이다.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태선군은 차 운전석에 그녀를 밀어 넣었다.
“상해로 돌아가거라.”
“싫어요. 당신과 헤어지느니 죽겠어요.”
“난 할 일이 있다. 그런데 너와 함께하면서부터 너의 품을 떠나기 두려워하는 소심한 새가 됐다. 결단코 평소의 내 모습이 아니다.”
여령은 그의 말이 꼭 사랑 고백같이 달콤하게 느껴져 가슴이 두근거렸다.
“상해에 돌아가 있으면 가까운 시일 내에 내가 널 찾아가겠다.”
한동안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당신을 기다리죠. 난 당신을 위해 살기로 맹세했으니까요. 방해가 돼서는 안 되겠죠.”
차에 시동을 건 그녀는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여기는 대체 왜 온 거죠?”
“넌 모르는 게 좋다. 널 힘들게 할지도 모르니까.”
그의 말이 더욱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시동을 끈 그녀는 차에서 내려 뒷짐을 지고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는 태선군 옆에 섰다.
“알고 싶어요.”
“날 방해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금세 마음이 또 바뀐 것이냐?”
차가운 태선군의 눈빛에 찔끔한 그녀는 그의 허리를 손으로 감싸며 몸을 밀착시켰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말씀해 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궁금해서 가다가 사고가 날지도 몰라요.”
그녀가 끝까지 버티자 별수 없었는지 태선군이 과거지사를 털어놨다.
“이곳엔 아주 오래전 내가 사랑했던 여자가 살고 있다.”
뜻밖의 말에 여령의 몸이 경직됐다.
“사랑했던 여자요?”
“그래. 그녀와 난 검선문에서 함께 수련하던 사이였다. 한데 어느 날 그녀는 검선문의 장로였던 할아버지를 따라 하산을 하고 말았다. 스물도 되지 않았던 내 가슴에 수천 자루의 검이 한꺼번에 꽂히는 기분이 들었지.”
“그녀를 무척 사랑하셨군요.”
“젊은 혈기란 원래 그런 것이지 않느냐?”
태선군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을 했지만 여령은 조금도 그의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녀도 당신을 사랑했나요?”
“음…….”
태선군은 호수 위의 고깃배를 보며 천천히 답했다.
“내 마음을 제대로 전달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저 날 한 번 본 후 산을 내려가고 말았지.”
“안타깝네요.”
여령은 속으로 잘됐다며 박수를 쳤지만 겉으로는 그늘진 얼굴로 말했다.
“그건 모두 무허 때문이었다.”
“무허요?”
“그 망할 녀석도 그녀를 좋아했거든. 그자 때문에 번번이 그녀에게 내 마음을 고백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무허는 그 뒤로도 끊임없이 내가 잘되는 꼴을 보지 못했지.”
태선군과 무허가 서로를 미워하며 싸우게 된 계기는 사실 이때부터였다.
“그렇군요. 그녀 이름은요?”
“그녀 이름은…… 소정이다.”
태선군의 목소리에선 어떤 아련함이 느껴졌고, 여령은 질투심에 휩싸였다.
“이런 말 해선 안 되겠지만, 지금에 와서 그분을 만날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분은 이미 나이 든 할머니에 불과할 텐데요. 당신은 이렇게 젊어졌고요. 뭔가 맞지 않아요.”
“오해하고 있구나. 내가 그녀를 찾아온 건 철지 난 사랑 타령이나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럼요?”
“그녀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물건을 얻기 위해서다.”
“그게 무엇인데요?”
“작은 연단로다. 그녀 할아버지가 검선문을 나갈 때 가지고 나간 물건인데, 지금은 그녀가 가지고 있지.”
태선군의 시선은 호수를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향했다. 장로의 손녀가 사는 집은 호수 건너편 숲 부근이었다.
“그런 거라면 제가 몰래 들어가서 그 물건을 가지고 나올게요. 한때나마 사랑의 정을 품었던 여자와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잖아요.”
“네가 소정의 무서움을 몰라서 감히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다 늙은 할머니를 제가 왜 두려워하겠어요? 차 안엔 총도 있다고요.”
여령은 허세를 부렸다.
“그녀는 검선문의 제자로 무공을 익힌 사람이다. 너처럼 총을 믿고 설쳤다가는 팔과 목을 잘라 호수에 뿌릴 여장부지.”
소정이 남자로 태어났다면 능히 그와 무허를 제치고 검선문을 호령했을 사람이었다.
“궁금증은 풀렸느냐?”
“어느 정도는요.”
“이제 그만 가 보거라. 더 귀찮게 하면 진짜 화를 낼 테니까.”
태선군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여령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턱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제물이 필요하면 저 아름다운 마을에서 사람 몇을 잡아 드세요. 고통스러워하지 말고요.”
섬뜩한 말을 남긴 그녀는 차를 타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고, 홀로 남게 된 태선군은 바위처럼 서서 호수를 응시했다.
* * *
화물차 두 대가 정면으로 충돌한 사고 현장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불길이 치솟고 뒤따르던 차량들은 급정거하며 또 다른 사고를 유발했다.
여러 대의 차량이 뒤엉킨 사고 현장이 정리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손님, 사고가 워낙 커서 길이 뚫리려면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택시 기사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도현은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저는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수광마을은 아직 한참 더 가야 하는데요?”
꽤 많은 택시비를 받은 택시 기사는 고마워하면서도 미안함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택시에서 내린 도현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사고 현장에 가까이 접근했다.
밤을 불사르며 타오르는 불길이 얼마나 강한지 차량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광이 지켜보는 도현의 얼굴까지 뜨겁게 만들었다.
사고는 몇 분 전에 발생했고, 안타깝게도 사고 운전자들은 모두 차 안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였다.
공사로 인해 좁아진 2차선 도로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사고 현장을 지나친 도현은 좌우로 논밭을 끼고 있는, 어둠이 깔린 도로를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택시 기사에게 듣기론 가로등이 들어오는 이 도로는 수광마을까지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선 도로 중간에 샛길처럼 이어진 비포장도로를 타고 상당히 들어가야 한다.
‘오늘은 아침부터 사고가 연이어 일어나는군.’
주성하의 별장에서 항주 공항으로 가던 길에도 차량 전복 사고로 인해 원래 타려던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 비행기를 놓치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청선이 있는 수광마을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곳에 검선문 장로의 손녀가 살고 있다니.’
어제 청선은 전화상으로 많은 이야기를 그에게 해 주었다. 장로의 손녀 얘기도 그렇고 태청단에 필요한 신비한 연단로 이야기도 그렇고.
‘속력을 내 볼까.’
비포장도로 길에 접어든 도현의 몸이 순간 사라졌다.
* * *
고진영과 료쿄, 주성하는 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이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게 됐다.
식사를 제안한 건 고진영이었다.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거냐?”
사제들의 눈치를 보며 저녁을 먹던 고진영이 료쿄를 쳐다봤다.
말없이 젓가락질을 하던 료쿄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고진영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렇게 간단히 지나갈 일은 아니죠.”
“사람은 그래, 자기가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때로는 멍청한 짓도 할 수 있는 법이야.”
“당신은 육기천과 방상을 죽이고 우리까지 죽이려 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미안하다고 하는 게 아니냐.”
고진영은 천으로 입가를 닦은 뒤,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이게 다 사부 탓이다. 원래 우리는 한 형제들처럼 등선궁에서 지내지 않았느냐? 료쿄, 너 기억 안 나냐, 일본에서 네가 처음 왔을 때 내가 얼마나 널 업고 다녔는지?”
“기억에도 없는 말 하지 마세요.”
차가운 그녀의 반응에 헛기침을 한 고진영은 시선을 돌려 주성하를 응시했다.
“주성하,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대 앞에 서 있다. 다 함께 힘을 모아서 그를 도와 사부를 없애고 화목하게 살자. 서로를 도와 가면서 말이다.”
“관심 없습니다. 저는 이번 일이 끝나면 고 사형과는 영영 담을 쌓을 생각이니까요.”
“섭섭하구나.”
“진짜 섭섭한 게 누군데 그러십니까. 지하에 있는 육 사형과 방 사형이 통곡을 하겠습니다.”
주성하의 대답에 고진영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