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2] 디 임팩트 23권 12화
“이 마을엔 인심 좋은 사람들이 많답니다.”
“그렇구려. 하지만 그 인심 좋은 마을 사람들이 다 죽어 버리면 그땐 어쩔 거요?”
소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장담하지 마시오. 오늘 밤, 그들은 모두 죽을 수도 있으니까!”
말과 함께 태선군의 양손에서 눈부신 섬광이 뻗어 나가 장로의 무덤을 파괴했다.
“태선군! 이 무슨 짓입니까!”
뜻밖의 상황에 놀란 소정이 수십 년 만에 가장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오? 흑로를 찾고 있지 않소?”
“나를 속였군요!”
소정에 눈에서 번갯불 같은 정광이 쏟아져 나왔다.
“조부의 관에서 물러나세요!”
“그리는 못 하지.”
파헤쳐진 무덤에 들어가 관을 들고 나온 태선군은 바닥에 관을 내동댕이쳤다.
콰앙!
목관이 산산조각 나며 그 안에 있던 장로의 유골과 부장품들이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여기 있군.”
손바닥만 한 흑로를 찾아낸 태선군은 껄껄 웃다가 옆을 돌아봤다.
소정이 넋이 나간 얼굴로 조부의 유골을 끌어안고 있었다.
조부는 일찍이 부모를 여윈 그녀에게 부모와도 같았다. 그래서 이 무덤은 단순히 조부의 무덤이 아닌 부모의 무덤이기도 했다.
“소정, 울지 마시오. 그래 봤자 죽은 자의 무덤 아니오.”
“교활한 자. 짐승만도 못한 자.”
조부의 유골을 바닥에 내려놓은 소정은 부장품으로 넣어 둔 조부의 검을 들고 일어섰다.
머리끈이 풀어져 바람에 휘날리는 그녀의 백발은 그녀의 무서운 눈빛과 어우러져 살벌한 풍경을 만들어 냈다.
“이 더러운 옥반지를 돌려주지.”
그녀는 검으로 반지를 두 조각 내 버렸다.
“다음은 네 목이다!”
무게가 없는 사람처럼 가볍게 공간을 날아온 소정은 검과 하나가 되어 성검술을 펼쳤다.
숲 전체가 흔들리는 착각을 만들며 우주의 별들이 그녀의 검 궤적에 따라 태선군에게 쏟아졌다.
“아름답군.”
별들의 향연을 보며 태선군은 미소를 지었다.
성검술은 검선문의 뛰어난 검술 중 하나로 태선군도 익힌 바 있었고, 그의 제자인 방상도 이 검술을 주 검술로 수련하고 있다.
“방상 그 녀석이 소정 자네의 이 멋진 검을 봤어야 하는데. 아쉽군.”
소정의 검술을 칭찬한 태선군이 발을 구르자 그의 주위에 있던 땅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 성검술과 하나가 되어 검을 찌르던 소정의 몸을 가두어 버렸다.
얼굴과 내뻗었던 팔만 남은 채 흙에 갇힌 소정은 땅에 선 자세로 온몸의 기를 발산했다.
하지만 시멘트처럼 굳은 흙은 그녀의 내공의 힘으로도 부서지지 않았다.
“이 무슨 사술을 쓰는 것이냐! 검선문의 제자로 부끄럽지도 않느냐!”
그녀의 꾸짖는 소리에 태선군은 뒷짐을 지며 담담히 말했다.
“이 보잘것없는 어리석은 것아. 네가 검을 알면 얼마나 알고, 무도를 알면 또 얼마나 알 것이며, 세상 만물을 이해해서 끌어 쓴다는 게 또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네가 어찌 알겠느냐?”
“무슨 잡설을 늘어놓는 것이냐!”
“그것이 네 수준이다.”
혀를 찬 태선군은 흙에 갇힌 소정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에서 검을 빼앗았다.
“소정, 옛정을 생각해서 고통 없이 죽여 주마.”
“어찌 너 같은 자가 검선문의 문주가 됐는지 하늘이 무심하구나! 퉤!”
침을 뱉은 그녀의 행동에 태선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무허와 놀아난 천한 년이 감히!”
“사부.”
소정의 목을 베려던 태선군은 귓가에 들리는 청선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손길을 멈췄다.
‘환청을 들은 것인가?’
“사부.”
또다시 들리는 청선의 목소리에 태선군의 표정이 굳어졌다.
숲 전체에 사부라는 두 글자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청선이었다.
“이놈 청선! 역시 살아 있었구나! 하하하하!”
크게 웃던 태선군은 왼쪽 숲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10여 그루의 나무들이 짚단처럼 잘려 나가며 청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발에 주름진 노인.
“아니, 청선아, 네 몰골이 어찌 그리 변했느냐?”
“사부님이야말로 얼굴이 왜 그렇게 변하셨습니까?”
“가까이 오너라. 궁금하면 내가 아주 자세히 알려 주마.”
사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청선은 미끄러지듯 태선군 앞에 섰다.
“이분은 보내 주시죠.”
청선이 소정을 가리키자 태선군은 시험하듯 말했다.
“재주가 있으면 네가 구해 보아라.”
“원하신다면.”
청선이 소정의 몸을 감싼 흙에 손가락을 대자 갑옷처럼 단단했던 흙이 부서지며 평범한 흙으로 되돌아갔다.
몸이 자유로워진 소정은 자신을 구해 준 청선을 의혹 어린 시선으로 봤다.
방금 전 대화로 봐서는 태선군의 제자 같은데, 왜 그녀를 돕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옆에 서 있는 태선군을 향해 기습적으로 손을 뻗었다.
“죽어라!”
바위에 손자국을 남길 수 있을 만큼 위력이 강맹한 장법이 태선군의 얼굴에 그대로 적중했다.
‘됐어!’
기뻐하던 소정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장법을 맞은 태선군은 끄덕도 하지 않았고, 얼굴엔 작은 상처 하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눈치가 없군.”
퍽 소리와 함께 총알처럼 튕겨져 나간 소정은 나무에 처박혀 피를 토하며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네년은 잠시 후에 죽여 주지.”
차가운 시선으로 정신을 잃은 소정을 노려보던 태선군은 고개를 돌려 청선을 봤다.
“제자야, 난 네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언젠간 내 앞에 나타나겠지 기대를 하고 있었지. 다만, 그것이 오늘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
“그러셨군요.”
청선은 담담히 대꾸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느냐?”
“무허 사숙에게 들었습니다.”
“무허가?”
태선군은 쓰러져 있는 소정에게 눈길을 한번 주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자가 그런 얘기까지 했단 말이지. 부끄러움도 없는 녀석이군. 그가 널 구했던 것이냐?”
청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한 섭상 녀석. 상황을 보니 섭상은 무허에게 이용을 당한 것이로군. 무허도 이곳에 있느냐?”
태선군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숲을 둘러봤다. 바람에 나무가 흔들릴 뿐 사방은 고요했다.
“그는 죽었습니다.”
“거참 잘됐군. 지긋지긋하게 명줄도 길더니.”
“사부님도 이제 그의 뒤를 따라갈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제자야, 네가 보기에 내가 늙은 것 같으냐?”
태선군은 팽팽한 피부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더라도 40대로 보이는 건강한 외모였다.
“제 눈에는 사부의 얼굴에 죽은 자들의 영혼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게 보입니다. 그것이 어찌 얼굴이라 하겠습니까?”
“얼굴이 아니면 무엇이냐?”
“죄악입니다. 온갖 탐욕과 욕망이 삐뚤어져서 만들어 낸 죄악의 덩어리.”
콰앙!
청선은 등에 맨 통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통이 부서지며 고풍스러운 검 한 자루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손을 뻗어 청선이 검을 잡는 순간, 숲에 돌풍이 몰아치고 거짓말처럼 뇌성벽력이 쳤다.
“태선군! 오원신공을 전수받은 33대 검선문의 문주로서 당신을 파문하고, 패천공을 익혀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죄! 엄히 묻겠소!”
위엄 있게 말을 하는 청선의 몸 주위로 두 개의 원이 교차하며 빙글빙글 회전을 했다.
그 원이 무엇을 뜻하는지 태선군은 알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배우고 싶었던 오원신공이었다.
“허허, 이런 기특한 놈을 봤나. 죽는 순간까지 오원신공이 없다며 딱 잡아떼더니.”
태선군은 오원신공을 익힌 청선의 모습을 눈이 부신 듯 쳐다봤다. 원래는 그의 무공이어야 했다.
“남의 것을 훔쳐 배우는 기분이 어떠하냐, 청선?”
“아주 가슴이 시리고 아프오. 가슴에 묻고 잊었던 것을 결국 당신이 익히게 하고 말았으니 말이오!”
사부를 향해 검을 빼 든 청선의 마음은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에게 사부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마에 물든 사부는 더 이상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죽음으로 회개하시오!”
감정을 수습한 청선의 냉정한 목소리에 태선군의 눈동자가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청선아, 네 오원신공은 완성되지 않은 것 같은데, 날 잡을 수 있겠느냐?”
“당신 역시 패천공이 완성된 건 아니지 않소?”
“옳은 지적. 그럼 한번 해보자꾸나. 네 어설픈 오원신공이 어떻게 조각조각 나는지 보여 주지.”
“당신은 모르는 게 있소. 패천공은 애초에 오원신공의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오원신공이 어떤 무공인지를 말이오!”
눈빛이 투명하게 변한 청선이 검을 휘두르자 그의 몸을 휘감고 돌던 두 개의 원 중 하나가 아주 느리게 태선군에게 날아갔다.
작았던 그 원은 갈수록 커지며 숲의 어둠과 달빛을 빨아들였고, 시간과 공간까지 빨아들이며 일순간 세상을 정지시켰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마네킹처럼 굳은 태선군의 몸을 블랙홀처럼 변한 원이 집어삼켰다.
이대로 모든 게 끝이 날 것 같았던 순간, 원이 폭발하며 그 속에서 태선군이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전신에 피를 흘리는 태선군은 부러진 검을 들어 청선을 가리켰다.
“이 정도로는 날 꺾을 수 없지. 더 나은 걸 보여 줘야 할 게다. 아니면 다음번엔 네놈이 죽을 테니까.”
눈빛이 깊어진 청선이 검을 다시 휘두르자 그의 몸 주위를 돌던 원이 재차 태선군을 향해 날아갔다.
콰앙!
원을 맞은 충격으로 태선군은 숲을 부수며 호수까지 밀려 났다.
청선은 유령처럼 스르륵 공중을 날아와 호수를 내려다봤다.
호수에 빠진 태선군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물속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호수의 물이 채찍처럼 날아와 청선의 몸을 휘감고 물속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물속으로 빨려 들어온 청선을 향해 태선군은 이글거리는 반달 모양의 백색 검기를 날렸다.
순식간에 자신을 덮친 백색 검기를 보며 청선은 황급히 검을 휘둘렀다.
쿠쾅!
번쩍이는 섬광과 폭음이 울리며 거대한 물보라가 하늘 높이 솟구쳤고, 청선은 뒤로 거세게 밀려 났다.
요동치는 기혈을 잠재운 청선은 수중에서 중심을 잡으며 왼손으로 크게 원을 그려 강기막을 만들었다.
태선군의 손짓으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물로 된 창들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쩌어엉! 쩌저정!
청선의 강기막과 충돌한 창들은 마치 유리가 깨지듯 부서져 나갔다.
울컥.
강한 힘을 동반한 물로 된 창은 겨우 억눌렀던 기혈을 다시 들끓게 했고, 청선의 입가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두 차례 오원신공을 발휘하느라 힘이 많이 소진된 그였기 때문에 물속에서의 싸움은 쉽지 않았다.
“패천공은 마공이라 하나 그 깊이가 오원신공 못지않을 것이다! 크하하하!”
물속에서 소리치는 태선군의 목소리가 청선의 고막을 울렸다.
표정이 굳어진 청선은 물속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태선군은 그를 놔주지 않고 호수의 물을 수족처럼 움직여 청선을 계속 공격했다.
“네 힘도 이제 다한 것 같구나.”
“그리 생각하시오?”
태선군의 반격에 지쳐 보이던 청선의 눈이 투명하게 변하자 호수의 물이 크게 한 차례 출렁였고, 그 순간 태선군의 조종을 받아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변해 그를 공격하던 물줄기들이 펑펑 소리를 내며 유리처럼 깨져 물로 변해 갔다.
“오원신공이 왜 문주 무공이 되었는지 똑똑히 알게 해 주겠소, 사부.”
청선이 지그시 눈을 감고 검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자, 호수의 물이 그를 중심으로 회전했다.
엄청난 흡입력에 대항하던 태선군은 굳은 얼굴로 호수를 탈출해 하늘로 비상했다.
“더 이상 갈 곳은 없소, 사부.”
회오리치는 거대한 물줄기와 함께 수십 미터를 떠올라 태선군의 앞을 가로막은 청선은 가슴에 모으고 있던 검을 앞으로 찔렀다.
쿠오오오오오.
굉음과 함께 청선의 검 끝에서 강렬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쾅!
피할 사이도 없이 푸른 빛에 강타당한 태선군은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호수를 벗어나 숲에 처박혔다.
그 충격으로 숲 일대가 진동하고 부서진 나무 파편과 먼지구름이 뒤엉켜 밤하늘 높이 피어올랐다.
이 한 수에 전력을 다한 청선은 창백해진 얼굴로 허공을 가르며 태선군이 처박힌 숲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절대 다가오지 마시오.”
한밤의 소란에 놀라 뛰쳐나온 몇몇 마을 사람들에게 청선은 엄히 경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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