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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565화 (565/575)

[565] 디 임팩트 23권 15화

“이런 씹어 먹을 놈의 새끼! 정말 육기천 네놈이구나!”

욕설을 내뱉으며 당당히 걸어 나온 고진영은 불타오르는 별장을 등지고 육기천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잠을 자던 와중에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고 깬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대가는 컸다.

몸의 반은 심한 화상으로 연기가 피어올랐고, 머리엔 부러진 철근이 한 뼘이나 박혀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통증이 몰려왔다.

그야말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육기천, 용케 살아 있었구나.”

“흐흐흐, 놀랐나? 억울해서 죽을 수가 있어야지.”

육기천은 광기 어린 눈동자로 미소를 지으며 고진영에게 잘린 손목을 흔들어 보였다.

“나에게 이 손목은 생명이었다. 평생 검을 연마하고 폭탄을 제조하던 손이었지. 그런데 이젠 불가능하게 됐어. 한 손으로 뭘 할 수 있겠나?”

“어리석은 놈. 그래서 죽고 싶어서 날 찾아온 거냐? 이따위 폭탄 공격이나 하면서 말이야.”

고진영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사람처럼 과장하며 양팔을 벌리고 크게 비웃었다.

하지만 그의 비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육기천이 겉옷을 벗어 몸에 두른 많은 양의 폭탄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널 위해 준비한 특별한 폭탄이다. 이걸 누르는 순간, 반경 수십 미터는 화염과 함께 이 수천 개의 쇠구슬들이 장악하게 되지. 사부님에게는 별 효과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너에겐 치명적일 거야.”

“미친 자식, 자폭하겠다니.”

폭발의 여파로 인해 몸이 정상이 아닌 고진영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곁눈질을 했다.

료쿄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 실력이라면 별장에서 살아 나왔어야만 한다.

‘부상은 입었어도 료쿄가 죽지는 않았을 텐데, 왜 안 보이는 거지?’

그녀와 함께라면 화염과 총알처럼 날아올 수천 개의 쇠구슬을 막아 낼 수 있다.

그가 내공의 힘으로 화염 폭풍을 밀어 내고 그사이 파고들 쇠구슬들을 그녀가 검으로 상대하면 되기 때문이다.

한데, 유일한 희망인 그녀가 보이지 않았고, 고진영은 속이 타들어 갔다.

“옆에 저 녀석은 누구지?”

시간을 끌기 위해 고진영은 식칼을 들고 서 있는 방소를 가리켰다.

“방상의 동생 방소다. 형의 복수를 한다며 잘나가던 식당을 접고 왔지.”

“네가 자폭하는 순간, 저 녀석도 죽을 텐데 상관없나?”

“착각하고 있군. 방소, 보여 줘라.”

방소가 겉옷을 벗자 또 다른 폭탄 조끼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미친놈들.”

신음을 흘리는 고진영을 향해 방소와 육기천이 들소처럼 달려들며 사납게 소리쳤다.

“방상의 복수다!”

“형의 복수다!”

“안 돼!”

고진영이 왼편으로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렸지만 육기천과 방소가 동시에 터트린 폭탄의 영향권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고진영이 뒤를 돌아본 순간, 거대한 화염과 수백 개의 쇠구슬들이 그의 몸을 뒤덮었다.

퍼버버버벅!

쇠구슬에 온몸에 구멍이 난 고진영은 하나의 숯덩이가 되었고, 별장은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어 검붉은 연기가 하늘로 솟구쳤다.

전쟁이라도 난 듯이 변한 별장엔 살아 있는 생명체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별장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숲엔 두 사람이나 생존해 있었다.

“구사저…… 그만 됐습니다.”

전신이 피투성이인 주성하가 피를 게워 내며 료쿄의 팔을 밀어 냈다.

“가만히 있어!”

료쿄는 허리가 반쯤 잘려 내장이 길게 흘러나와 있는 주성하의 상처를 어떡하든 봉합하려 했다.

하지만 흘러나온 내장의 대부분은 별장이 폭발하며 군데군데 터져서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즉사하지 않고 살아 있는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구사저, 나보다는 구사저의 상처나 돌보십시오. 여기 얼굴에 상처가 깊은데 어떡하지.”

주성하는 떨리는 손으로 료쿄의 피 묻은 뺨을 매만졌다.

“말하지 말고 호흡을 길게 유지해.”

“싫습니다. 죽기 전에 할 말이 얼마나 많은데.”

“닥치라고 했지!”

내장을 배 속으로 밀어 넣던 료쿄가 고함을 치다 고개를 푹 숙였다.

주성하의 부상이 너무 컸다. 바로 옆에 뛰어난 의사가 있어도 그를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

절망감과 안타까움이 그녀의 전신을 지배했고, 겨우 참아 왔던 눈물이 어느 순간 그녀도 모르게 흘러내렸다.

“웁니까?”

“안 운다.”

“울지 마십시오.”

주성하는 땅에 머리를 대고 누운 채 조금씩 밝아 오려는 새벽하늘을 올려다봤다.

“젠장. 백도현이 사부만 잡으면 이제 마음껏 편안하게 살 것 같았는데…… 우습게 됐네요. 그죠?”

“말하지 마. 힘들잖아.”

료쿄는 주성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고 사형은 뒤끝이 깔끔하지 못해요. 육기천을 죽였다면서 이게 뭡니까? 참나.”

말을 하던 주성하는 고통이 너무 심했는지 간간이 고통에 찬 신음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결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말을 멈추는 순간, 곧장 죽음이 닥쳐올 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구사저, 백도현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질투 나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그 녀석을 좋아해?”

“다 압니다. 그러니까 좋아하지 마십시오. 약속하세요.”

료쿄는 빤히 올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망설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됐습니다, 그럼. 구사저까지 그 녀석에게 빼앗겼다면, 난 죽어서도 눈을 제대로 감지 못했을 겁니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주성하는 손을 더듬어 료쿄의 거칠고 차가운 손을 꽉 움켜쥐었다.

“먼저 갑니다.”

짧고 굵은 한마디를 남긴 그는 그렇게 숨을 거뒀다.

막내의 죽음을 목격한 료쿄는 마음이 말할 수 없이 허전하고 괴로워 한동안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가슴이 찡하며 눈물이 쏟아졌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주성하에게 제대로 잘해 준 게 없었다.

어린 주성하는 그녀가 검을 수련할 때면 주변에서 맴돌다 그녀에게 혼이 나며 쫓겨나기 일쑤였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주성하는 등선궁의 낯선 차가움 속에서 그녀의 따뜻한 손길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른다.

죽은 막내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준 그녀는 점차 식어 가는 주성하의 입술에 처음이자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잘 가, 주성하.”

* * *

폐허가 된 넓은 도관 내부를 도현은 천천히 거닐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등선궁이라 불렀고, 등선궁에 속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을 검선문의 제자라 했다.

‘이제 누가 이곳을 지킬까…… 청선도 죽었는데.’

시커멓게 불타고 부서진 도관의 잔해들은 무너진 검선문의 현재를 보여 주는 것 같아 도현의 마음 한구석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비록 검선문과 악연으로 엮였었지만, 그들의 몰락이 기쁘지는 않았다.

청석이 깔려 있던 도관 앞마당에 땅을 판 그는 청선의 유골함을 묻었다. 그가 청선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호의였다.

‘이제 이곳에 다시 올 일은 없겠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무너진 등선궁을 응시하던 도현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등선궁 앞을 흐르는 계곡 앞 큰 바위 위에 료쿄가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녀는 원래 말수가 적었지만 주성하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로 더 말이 없어졌다.

“그는 왜 그랬을까요?”

도현이 옆으로 다가오자 흐르는 계곡물에 시선을 두던 그녀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무엇을 말입니까?”

“대사형 말이에요. 오원신공이 있으면서 바보처럼 수십 년을 지내 오다니.”

청선이 목숨을 던져 사부와 싸웠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를 원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문주로 내정된 사부의 지위를 곤란하게 만들기 싫었기 때문이겠죠.”

“그의 결단이 좀 더 빨랐다면 아마 많은 게 달라졌을 거예요.”

“주성하의 죽음이 안타깝긴 하겠지만 원망할 대상은 그가 아닙니다. 태선군이죠.”

딱 잘라 말을 한 도현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담기량이 남긴 심득의 일부입니다.”

약속대로 담기량의 심득 일부를 넘겨준 도현은 얼굴이 수척한 그녀에게 뭔가 위로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망설이다 그만두었다.

“재대결을 하고 싶으면 언제든 날 찾아오십시오. 그럼 이만.”

검선문에서 가장 검을 사랑한 여제자 료쿄에게 작별 인사를 한 도현이 길을 따라 하산하려 할 때, 료쿄가 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백도현!”

뒤를 돌아본 도현을 한동안 바라보던 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사형은 꽉 막힐 정도로 어느 면에선 고지식했어요. 그런 그가 검선문의 문주 무공을 품 안에 안고 죽었다는 게 이상해요. 당신에게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나요?”

질문을 받은 도현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나에게 문주 자리를 맡아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긴 했습니다.”

“그래서요?”

료쿄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도현은 담담히 말했다.

“싫다고 했습니다.”

“아!”

료쿄는 가는 탄성을 자아내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상황을 보니 도현이 허락했다면 그 자리에서 오원신공을 전수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대사형 못지않게 꽉 막힌 곳이 있어요.”

“그럴지도 모르죠.”

“난 일본으로 돌아갈 거예요. 당신을 뛰어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수련을 할 테니까 긴장하는 게 좋을 거예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무심히 멀어지는 도현의 뒷모습을 깊은 눈빛으로 응시하던 료쿄는 뜬눈으로 그곳에서 밤을 보낸 뒤 조용히 사라졌다.

검선문의 마지막 제자라 할 수 있는 료쿄마저 사라진 등선궁 위로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 *

용주는 술이 센 편이다. 그러나 전날 기분 좋게 마신 술은 그의 주량을 훨씬 뛰어넘었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를 장철호가 도장과 가까운 그의 집으로 데리고 와 재웠다.

철호의 집에서 부스스한 몰골로 아침에 눈을 뜬 용주는 따뜻한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방 천장을 올려다봤다.

도장에 출근하기 위해선 지금 일어나 씻어야 하는데, 감히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떡하지? 술에 취해 다 말해 버렸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그는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철호의 눈치를 살폈다.

도현이 관장님 복수를 해냈다는 사실이 기뻐 며칠간 미친놈처럼 웃으며 지내다가 어제 철호 형과 가진 술자리에서 그만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말았다.

그동안 철호 형을 속인 일은 선의에서 한 것이지만 결론적으로 그를 무시한 것처럼 비쳐지는 일면이 있어서 그 후폭풍이 겁이 났다.

“철호 형, 방이 참 따뜻하네요.”

“너 감기 들까 봐 새벽에 보일러 좀 길게 돌렸다.”

“이래서 온돌이 좋아요. 침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온돌 바닥만의 아늑함이 있거든요.”

“안 일어나냐? 도장 가야지.”

“이제 일어나려고요.”

용주는 대답을 하며 내심 안도를 했다.

‘괜찮은데? 형이 우리를 이해한 건가?’

술이 깬 자신에게 당장이라도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잠잠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이불 속을 벗어나 욕실로 가던 용주는 문득 등을 보이고 앉은 철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슬쩍 곁눈질을 했다.

철호는 돌아가신 관장님 사진을 손에 들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그 진지한 모습에 흠칫한 용주는 재빨리 욕실로 향하다 뒤에서 들리는 철호의 묵직한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도현이 오늘 귀국한다고 했지?”

“예, 낮에 비행기 편으로.”

“공항엔 내가 마중 나간다.”

“아니에요, 형. 이따가 저하고 홍영 씨하고 같이 가려고요.”

철호는 감았던 눈을 뜨고 일어나 벽에 백남식 관장의 액자를 다시 걸어 놨다.

“화낼 생각 없다.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뒤돌아선 그는 용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마중 나가도 되겠지?”

* * *

작은 옷가방을 들고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도현은 하늘거리는 눈발을 머리에 맞으며 공항 야외 주차장으로 향했다.

몇 차례 중국을 오가는 동안 오늘처럼 귀국길이 마음 편한 적은 없었다.

복수라는 무거운 짐이 마침내 그의 두 어깨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주차장으로 가는 횡단보도 앞에 선 도현은 건너편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철호를 보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다 큰 어른들이 서로 마주 보며 횡단보도 앞에서 크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일견 우스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두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미묘한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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