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 디 임팩트 23권 18화
“말도 안 되는 소리. 검은 기름이 불붙이는 데나 쓸 만하지 뭐 다른 필요한 데가 있겠소?”
짐브리오가 콧방귀를 뀌자 옆에서 듣고 있던 리드만 사제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영주님 말씀이 틀린 건 아니네. 고대에 작성된 신성한 사제들의 기록을 보면 검은 기름은 일곱 신이 인간에게 마지막까지 주지 않으려 한 선물 중 하나라고 쓰여 있었네. 검은 기름이 인간들에게 아주 가치 있다는 뜻이지.”
“다른 용도가 또 있다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는 그에게 영주 딘이 나직이 속삭였다.
“사실은 말이야, 도현이 어제 내게 놀라운 말을 해 주었다네.”
“도현이?”
짐브리오는 저만치 앞서가는 도현의 등을 힐끔 쳐다봤다.
그는 어베인과 뭔가를 얘기하며 마을 중심부로 향하고 있었다.
“뭘 말해 줬다는 거요?”
짐브리오도 덩달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현이 태어난 지구란 곳에선 사막의 검은 기름이 그들의 문명을 세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고 하더군.”
“그들의 문명?”
“자네도 듣지 않았나? 사람과 말 대신 움직이는 기계장치란 것들 말이야. 검은 기름은 권력의 지형을 바꿔 놓을 수가 있어.”
영주 딘은 음모를 꾸미는 얼굴로 말을 했다.
하지만 짐브리오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뭔 말인지는 이해했는데, 그럼 도현이 말해 준 기계장치들은 누가 만들 거요?”
“하아, 그게 문제야.”
영주 딘이 이마에 손을 얹고 턱을 좌우로 흔들었다.
“도현도 기계장치를 만드는 상세한 법은 모른다고 하더군.”
“그럼 검은 기름을 노리고 사막 영지를 받는다는 건 손해 아니오?”
“뭐, 그런 셈이긴 한데, 어찌 됐든 우리 앞날이 언제 뒤바뀔지 모르니까. 또 아나, 어디선가 기계장치란 걸 만들고 있는 뛰어난 자들이 있을지.”
그들이 사막의 검은 기름을 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때 앞서가던 일행이 낙타에서 내렸다.
태양의 마을 중심부에 도착했는데, 건물이 불타 부서져 있었고 거리 곳곳엔 죽은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뭐야 이거, 분위기가 왜 이래?”
고생을 하며 태양의 마을에 도착한 일행은 한바탕 전투가 휩쓸고 간 마을 전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전투는 오래전에 벌어졌는지 시신들은 부패가 심했고, 모래에 몸이 반쯤 파묻혀 있었다.
“아무도 없어요. 집 안에도 온통 시신뿐이에요.”
몇 개의 집을 조사하고 나온 금발의 로나는 분노 어린 눈빛으로 말을 했다.
그녀가 조사한 집엔 어린아이들도 있었는데, 모두 비참하게 죽어 있었다.
“이쪽도 살아 있는 사람은 없군.”
북쪽 거리를 조사하고 나온 영주 딘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기도 마찬가지야.”
태양의 마을 유일한 여관을 조사한 짐브리오는 임자 없는 술통을 들고 오며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을 다 죽인 것 같은데? 대체 어떤 녀석들이 이런 짓을 했지? 설마 철가면 휴반트는 아니겠지?”
사람들의 시선이 도현에게 쏠렸다. 도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신을 살펴봤지만 그의 짓이 아닙니다.”
“맞아요. 스승님과 정당한 대결을 하겠다고 이곳으로 오라고 했는데, 그가 왜 마을을 파괴하겠어요? 이유가 없잖아요. 어쩌면 어제 만난 그 도적들 짓일지 몰라요.”
에드는 도적들을 의심했지만, 로나는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들은 아닐 거야. 사막의 도적들은 사막에 사는 사람들을 존중해. 그게 사막의 전통이거든. 사막의 주민들을 죽이는 건 그들의 뿌리를 흔드는 거야.”
“그건 로나 말이 맞아. 그 겁쟁이 도적들이 이런 대담한 짓을 할 리는 없지.”
흰 두건을 벗은 어베인은 주민들이 모두 죽은 태양의 마을을 길게 둘러봤다.
간신히 명맥만 유지해 오던 역사 깊은 마을이 완전히 그 맥이 끊어진 것 같았다.
“도현, 어떻게 하겠나? 마을은 파괴되고 철가면 휴반트는 안 보이는군.”
잠시 생각하던 도현이 답했다.
“우리가 먼저 도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에게 다른 사정이 생긴 것일 수도 있고. 마을에서 며칠만 기다려 보죠.”
폭주의 후유증으로 정신을 잃은 그를 휴반트는 죽이지 않고 다음 승부를 예약하며 떠났다.
휴반트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도현은 충분히 짐작이 됐고, 그 때문에 그와의 대결을 성사시키고 싶었다.
사실 며칠이라는 시간은 차원 이동 에너지가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게는 큰 시간이었다.
* * *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휴반트는 태양의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다.
에드에게 검을 전수하며 그를 기다렸던 도현은 고민 끝에 일행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휴반트가 자신의 말을 이렇게 가볍게 여길 사람 같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그러게. 좀 의외이긴 한데? 자기가 먼저 이곳으로 오라고 했으면서 말이야. 무슨 다른 일이 생긴 건가?”
리타는 흑거미를 타고 일행 주위를 빙빙 돌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이게! 정신없다고 했지!”
짐브리오가 흑거미를 발로 걷어찼지만 흑거미는 빠르게 옆으로 피해 버렸다.
“흑거미를 진화시켰지, 헤헤.”
전투 능력을 갖춘 흑거미는 거미줄을 쏘아 짐브리오의 몸을 꽁꽁 묶어 버렸다.
모래 바닥에 쓰러진 짐브리오는 팔에 힘을 주었지만 거미줄은 신축성 있게 살짝 늘어나기만 할 뿐 끊어지지 않고 여전히 그의 몸을 구속했다.
“이거 안 풀래?”
“거미라고 얕잡아 보면 이렇게 된다고. 앞으로 조심해.”
거미줄에서 풀려난 짐브리오는 경쾌한 동작으로 단검을 세 개나 뿌렸다.
두 개는 흑거미가 쏜 거미줄에 걸려 바닥에 떨어졌지만 나머지 한 개는 흑거미의 아랫배에 꽂혔다.
그 순간, 펑 소리를 내며 흑거미는 검은 안개로 변해 뜨거운 사막의 열기 속으로 사라졌다.
“별것도 아닌 게 까불고 있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찐 리타는 짜증 난다는 시선으로 짐브리오를 올려다봤다.
“장난도 못 치냐!”
“적당히 해라. 어른에게 까불면 혼난다.”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쳇!”
투덜거리던 그녀와 짐브리오는 도현이 하던 말을 멈추고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에 미안했는지 얌전히 일행 사이에 섰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 건가?”
영주 딘이 묻자 도현은 리타를 보며 답했다.
“리타의 도움을 받아 며칠 전 만났던 그 도적들을 찾아야겠습니다.”
“그들은 왜?”
“태양의 마을은 사막 한복판에 있는 마을입니다. 이곳에서 벌어진 사건의 진실을 알 만한 자들은 그나마 사막을 돌아다니는 그 도적들이 아니겠습니까?”
도적들이 마을 사람들을 죽이진 않았다 해도 이 사건과 관련된 자들을 목격했을 수도 있다.
“떠나기 전에 확인해야겠습니다. 이 마을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말입니다. 어쩌면 그것과 휴반트가 나타나지 않는 게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일행은 도현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는 이곳에서 그를 계속 기다리고 있겠네. 자넨 리타와 그 도적들을 찾아서 확인해 보게.”
도현은 리타를 등에 업고 빠른 속도로 사막을 활보했다. 일행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낙타를 이용했을 뿐, 그가 작정했다면 며칠 거리의 사막은 반나절도 안 돼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리와 거리의 개념이었다.
사막처럼 넓은 면적을 다 확인하려면 아무리 도현이라 해도 시간이 많이 소요됐다.
그렇기 때문에 까마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리타가 필요했다.
모래 폭풍에 휘말려 하마터면 추락할 뻔한 리타는 날갯짓을 하며 상공으로 더욱 높이 떠올랐다.
‘작은 바위산이 있네?’
바위산 상공에 도착한 그녀는 바위산 뒤쪽에 쳐져 있는 수십 개의 이동식 천막들을 발견했다.
‘그들이다!’
그녀 눈에 며칠 전 도현에게 혼이 난 도적단 두목이 포착됐다.
그는 도현에게 맞은 장풍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는지 지팡이에 의지해 조심해서 천막 사이를 걷고 있었다.
그들의 경비 상태를 대충 확인한 그녀는 까마귀 마법에서 벗어나 도현에게 그들의 위치를 알려 줬고, 도현은 순식간에 바위산에 도착해 도적들의 소굴로 걸어 들어갔다.
“그놈이다! 두목을 부상 입힌 자가 나타났다!”
도현을 알아본 도적들이 무기들 들고 대항할 준비를 했다.
이곳은 그들의 터전.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도적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검을 꺼냈던 도현은 도적들 뒤에 서 있는 여자와 아이들을 보고선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너희 두목을 만나고 싶다.”
* * *
낡은 의자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도적단 두목은 천막 안으로 들어온 도현과 리타를 잠시 노려보다가 앞에 있는 의자를 권했다.
“앉으시오.”
도현과 리타가 의자에 앉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천막 안에 잔뜩 들어와 있는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쳤다.
“네놈들은 왜 여기 있어! 당장 나가!”
두목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도현이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져 천막 안에 발 디딜 틈도 없이 자리를 차지했던 도적들은 두목의 호통에 놀라 우르르 천막을 나갔다.
“날 죽이기 위해 찾아온 거라면 깔끔하게 죽이고 떠나시오. 부하들은 놔두고.”
제법 용기 내어 말하는 도적단 두목을 향해 리타는 깔깔대며 웃었다.
“당신, 정말 재밌네? 그런다고 우리가 당신을 살려 둘 것 같아?”
“리타.”
“알았어, 미안해.”
리타의 장난을 제지한 도현은 긴장한 도적단 두목의 눈을 보며 말했다.
“난 당신과 싸우려고 온 게 아니야. 태양의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 궁금해서 왔지.”
“태양의 마을?”
도적단 두목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마을이 불타고 사람들이 죽었어. 어떻게 된 거지?”
“우리 짓이 아니오. 우리는 사막의 친구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소.”
“그럼 누구 짓인지 알고 있나?”
도적단 두목은 도현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외지인이 그 마을에 왜 관심을 갖는 거요?”
“필요하니까. 아는 게 있으면 말해 줬으면 좋겠어.”
도현은 푸른 보석 몇 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이 정도면 당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구입하기에 적당할 것 같은데?”
몇 달간 허탕을 친 도적단 두목은 값비싼 보석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정도면 부하들의 사기를 북돋을 수 있었다.
‘조금 더 달라고 할까?’
그의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는 순간, 리타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알 굴리지 마! 혼나기 전에!”
“험, 말이 참 거칠구려.”
헛기침을 한 도적단 두목은 지팡이에 의지한 채 몇 걸음 걸어와 탁자 위의 보석을 챙겼다.
“그 마을이 그렇게 된 건, 얼음탑 마법사 때문이오.”
“얼음탑?”
“그렇소. 그들이 며칠 동안 태양의 마을에 머물렀었는데, 마을을 떠나며 사람들을 해친 거요.”
브링틱에서 얼음탑주와 싸웠던 도현은 그곳과 멀리 떨어진 사막에서 얼음탑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되자 기분이 묘해졌다.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그건 나도 모르겠소. 제 놈들 기분에 따라 그랬겠지. 원래 그런 놈들이니까.”
사막에서 활동하는 도적단 두목도 알 만큼 얼음탑 마법사들은 두려움과 악명을 떨치는 무서운 존재였다.
거침없이 얼음탑 마법사들을 욕하던 그는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경계를 했다.
“설마 당신들 얼음탑과 가까운 사이는…….”
리타는 걱정 말라는 듯 그를 안심시켰다.
“불안해하지 마. 우리도 그들을 싫어해. 심지어 받아야 할 빚도 있다고. 그런데 그 얼음탑 마법사들 중에 은빛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중년인은 없었어? 이름은 카샨이야.”
“내가 부하에게 보고받기론 그런 자는 없었소.”
“그 녀석을 혼내 줘야 하는데.”
리타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카샨은 얼음탑주의 제자로, 도현에게 잡히기 직전, 운 좋게 배를 타고 얼음탑으로 떠나 목숨을 건진 자다.
어베인과 로나, 리타는 그에게 사로잡혀 한동안 모진 고문을 받기도 했었다.
“이게 내가 아는 전부요. 더 궁금해도 말해 줄 것도 없고.”
탁자 위의 보석을 다 챙긴 그는 의자로 돌아와 힘겨운 얼굴로 갈색 약을 삼켰다.
말을 할 때마다 도현에게 당한 가슴 부위가 욱신거리고 아파서 그는 약 없이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이러다 나 죽는 거 아니요?”
자신의 부상에 대해 강하게 불만을 제기하는 도적단 두목에게 도현이 담담히 대꾸했다.
“죽진 않아. 그보다 한 가지만 더 묻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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