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 디 임팩트 23권 20화
선착장 주변에서 상인들과 흥정하는 선장들을 여러 명 만났지만, 그들은 모두 처음 만났던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쳇! 다들 겁쟁이들이야. 왜 얘기도 듣기 전에 다들 도망가지?”
“그만큼 얼음탑이 두려운 존재니까. 일단 여관으로 가는 게 좋겠어. 더 이상 선장들도 없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선착장은 조금 전까지 보였던 열기가 사그라지고 배를 지키는 용병들과 내일 출항을 위해 짐을 싣는 일꾼들 일부만 보일 뿐이었다.
‘얼음탑은 어떻게 됐을까? 휴반트는 그의 복수를 끝냈을까?’
타노아링은 얼음탑과 가까운 항구임에도 불구하고 얼음탑과 관련된 정보나 소문 들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현, 저기 좀 봐. 누가 우리를 보며 뛰어오는 것 같은데?”
선착장 계단을 걸어 올라가던 도현은 뒤를 돌아봤다.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손 대신 갈고리를 끼운 한 노인이 헐레벌떡 그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왜소한 체형과 달리 목소리가 우렁찬 노인은 계단 중간에 멈춰선 도현을 따라잡은 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빠르게 물었다.
“저기 말이오, 배는 구하셨소?”
“어떤 배 말입니까?”
“아, 얼음탑으로 가는 배 말이지. 당신이 그곳까지 갈 배를 구한다고 들었는데.”
도현은 녹슨 갈고리로 가슴을 긁적이며 말하는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갈아입지 않은 그의 옷에선 진한 땀 냄새와 술 냄새가 동시에 올라오고 있었다.
“아직 구하는 중입니다만, 선장이십니까?”
“딱 보면 선장 같지 않소? 하하하!”
크게 소리 내어 웃던 노인은 도현과 리타가 웃지 않고 빤히 그를 쳐다보고만 있자 무안했는지 갈고리로 계단 난간을 툭툭 쳤다.
“거 말이오, 비록 내가 한 손이 이 모양 이 꼴이지만 선장으로 경험이 아주 풍부하다오. 말 잘 듣는 노련한 선원들도 데리고 있고. 2백 금화만 주면 당장이라도 얼음탑으로 출발 할 수 있소. 어떻게 나와 계약하시겠소?”
“다른 선장들은 얼음탑 가까이 가는 게 두려워 피하던데, 왜 당신은 먼저 나를 찾아온 겁니까?”
“돈이 궁하니까. 다른 이유가 있나? 어떻게, 나와 계약할 거요 말거요? 술집에서 내 선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얼른 답해 주시오.”
도현은 잠시 리타와 시선을 주고받은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당신과 계약을 하죠. 하지만 그 전에 배를 먼저 확인해야겠습니다.”
“물론이오. 날 따라오시오.”
노인은 거대한 선착장 제일 후미진 곳에 떠 있는 배로 도현과 리타를 안내했다.
돛이 접힌 배는 주변의 배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지만 관리가 잘됐는지 어둠 속에서도 광택이 나는 것 같았다.
“배는 작지만 아주 튼튼해서 얼음탑으로 가는 험한 뱃길도 이겨 낼 수 있소. 무엇보다 훌륭한 선장과 선원들이 배를 움직이니 안심할 수 있지.”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걱정 마시오. 출항 준비는 제대로 해 놓을 테니까.”
배를 둘러보던 도현은 금화 주머니를 꺼내 계약금의 일부를 지불했다.
배를 구하려고 시간을 길게 끌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 시간은 소중했고, 어떤 배를 이용하든 목적한 바를 이루면 된다.
금화를 손에 쥔 노인은 웃는 낯으로 자신을 제대로 소개했다.
“난 선장 파드미슈요.”
* * *
이른 아침 선장 파드미슈와 스무 명의 선원들이 움직이는 배가 항구를 벗어나 드넓은 바다로 항해를 시작했다.
느리게 움직이던 배는 조류와 바람을 타자 물살을 거칠게 헤치며 빠르게 나아갔다.
“바람이 거세다! 돛을 단단히 고정해!”
선장의 지시에 선원들이 일사불란하게 갑판 위를 움직이며 돛대와 돛을 점검했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선원들 태반이 다리가 불편하거나 팔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도현이 선원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자 선장이 다가와 말했다.
“보기엔 저래도 배를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소.”
“그래 보이는군요.”
팔이 하나밖에 없는 선원이 남은 한 팔로 필사적으로 굵은 밧줄을 기둥에 묶는 모습을 보며 도현은 살짝 감탄을 했다.
힘도 힘이지만 자신이 맡은 구역은 자신이 책임진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다른 선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신체의 불리함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일을 훌륭히 해내고 있었다.
“선장님, 일부러 이런 선원들만 모은 거예요?”
뱃머리에 서서 푸른 바다를 구경하던 리타가 돌아와 선장에게 물었다.
선장은 갈고리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바다에서 해적과 싸우다 이 모양이 됐소. 저들 중 몇은 나처럼 해적과 싸우다 팔다리가 잘린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태풍을 만나 조난을 당해 살이 썩어 신체를 도려내기도 했지. 하지만 우리는 팔다리가 없다 해서 바다를 벗어나 살 수는 없소. 평생 이것으로 먹고살았으니까. 내 선원들은 바다에서 죽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오. 배를 가진 난, 그들이 자랑스럽고, 그래서 함께 죽을 생각이오.”
바다를 노려보는 선장의 주름진 눈 속엔 바다에 대한 깊은 애증이 넘실거렸다.
“대단하네요.”
리타가 치켜세우자 선장은 조금 전 자신이 한 말이 다소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다른 곳으로 갔다.
“바다가 얼마나 좋으면 바다에서 죽겠다고 할까?”
“바다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니까. 생계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에게 바다는 어머니의 품일지도 몰라.”
“엄마의 품?”
리타는 배 난간에 기대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어릴 때 흑마법사 모엘에 의해 돌아가셨다.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품이 갑자기 그리워졌다.
“도현은 엄마와 아빠가 그리우면 어떻게 해?”
“글쎄.”
도현은 담담한 시선으로 바다를 응시했다. 그립다는 건 열렬히 보고 싶다는 뜻이다.
“그냥 그분들과의 좋은 추억들을 떠올리곤 해.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렇구나. 추억……. 지구로 갈 너에게 우리도 좋은 추억으로 남게 될까?”
잠시 말이 없던 도현이 고개를 돌려 리타를 봤다. 어딘지 감정을 꾹꾹 눌러 숨기고 있는 모습이다.
“당연히 좋은 추억이지. 하지만 다시 만날 희망을 품은 추억이 될 거야. 평생토록.”
* * *
해가 기울 무렵, 거친 파도와 싸우며 항해한 파드미슈호는 얼음탑이 위치한 섬 부근까지 도착했다.
“저기 뿌연 안개로 가려진 곳에 섬이 있는데, 그 안에 얼음탑이 있소.”
마법진의 영향인지 몰라도 안개가 늘 섬을 감싸고 있어서 내부 모습을 밖에서 확인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됐습니다. 더는 들어가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이 바뀌셨소? 섬에 헤엄쳐서라도 들어가려면 바짝 접근해야 하는데.”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도현은 대꾸를 하며 점점 기우는 하늘의 해를 올려다봤다.
“내일 이 시간에 이 부근으로 다시 오십시오. 나머지 보수는 그때 드리도록 하죠.”
“그거야 당연히 그러겠지만, 아니 어떻게 여기서 섬으로 가려고 하는 거요? 거리도 너무 떨어져 있고 파도가 거칠어 위험할 텐데.”
“걱정 마세요, 헤헤.”
리타가 귀엽게 웃으며 도현의 등에 업혔다.
“내일 보도록 하죠.”
도현은 선장과 선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갑판에서 바다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의 대범한 행동에 놀란 사람들이 배 난간에 상체를 기댄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기 좀 봐! 바다를 걷고 있어!”
순식간에 바다 위를 평지처럼 내달려 멀어지는 도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선원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선장님, 저 사람 혹시 마법사 아닙니까?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가 있죠?”
“마법사라도 저렇게 하긴 힘들 거야. 대단한 사람이군. 어쩐지 얼음탑을 두고도 별 두려움을 갖지 않더라니.”
배에 탄 사람들을 놀라게 한 도현은 리타를 업은 채 거침없이 바다를 내달리고 있었다.
높은 파도가 그의 몸을 삼킬 듯 다가왔지만 도현의 몸을 보호하는 호신강기에 가로막혀 성난 소리를 내며 뒤로 미끄러져 밀려갔다.
“도현, 앞에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어!”
흑마법을 발휘해 마법진을 탐지하던 그녀가 검게 변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잠시만 기다려 줘. 내가 없앨게.”
넓은 안개 속을 돌파하던 도현이 바다에 멈춰 서자 리타는 락제프가 남겨 준 고대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음산하게 주문을 외웠다.
“카디옴 움브라도나 카비타! 카디옴 움브라도나 카비타! 어둠의 힘과 존재들이여, 태초부터 이어 온 약속에 따라 내 앞을 가로막는 마법을 없앨지어다!”
쿠웅!
안개 속에서 묵직한 소리가 나며 강한 회오리바람이 하늘로 솟구쳤다.
“됐어, 이제 가도 돼.”
안개가 낀 마법진 지역을 통과하자 파도가 잔잔해졌고, 멀리 섬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섬은 언뜻 보아도 그 크기가 상당했다.
“도현, 저기 떠 있는 게 뭐지?”
리타는 잔잔한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섬에서 밀려오는 물체들을 보며 말했다.
도현은 살짝 방향을 바꿔 그쪽으로 빠르게 이동한 후 물체들을 확인했다.
그것들은 가슴에 구멍이 나거나 목이 베인 시신들로, 죽은 지 며칠은 됐는지 시신이 심하게 손상된 상태였다.
‘시신은 다섯. 모두 검에 당한 흔적들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얼음탑 마법사들이 입는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도현은 섬의 동쪽에 해당하는 바다 방향을 주시했다.
시신으로 보이는 또 다른 물체들이 조류를 따라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아주 느리게 밀려오고 있었다.
“휴반트가 죽인 거지?”
리타의 물음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상에 그의 존재감이 느껴져.”
“그가 이 섬에 아직 남아 있을까?”
“글쎄, 지금부터 확인해 봐야지.”
리타를 업고 바다 위에 떠 있던 도현은 섬에서 밀려오는 시신들을 따라 이동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섬의 반대편까지 가게 됐다.
그곳엔 섬 안으로 완만하게 굽어진 해안과 항구 시설들이 늘어서 있었다.
“와! 여기서 싸움이 시작됐나 봐!”
셀 수 없이 많은 시신들이 부서진 배의 잔해들과 뒤엉켜 항구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만 명의 대군이 일시에 항구에 들이닥쳐 휩쓸고 간 듯 철저히 파괴됐다.
반쯤 불타 버린 선착장에 오른 도현은 리타를 바닥에 내려 주고 주위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쥐들이 썩어 가는 시체의 살을 파먹고 있었고, 침몰한 크고 작은 배들의 돛대가 무덤의 묘비처럼 항구 앞을 장식했다.
그것은 마치 얼음탑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처럼 보였다.
“리타, 아무래도 휴반트는 이 섬에 모든 사람들을 죽이려고 작심한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해?”
“배를 철저히 파괴했어. 당장 탈출할 수 없게 말이야.”
도현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항구 뒤로 넓은 숲이 보였고 그 너머로 산과 비견될 만큼 높고 웅장한 원통형의 회색 탑이 하늘을 뚫을 듯한 기세로 서 있었다.
대영주들도 싸우기를 꺼려하는 막강한 얼음탑의 본산이 바로 저곳이었다.
그들은 항구를 벗어나 탑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그들은 파괴된 수십 개의 마법진과 죽어 있는 많은 마법사들을 발견했다.
격렬한 싸움이 있었는지 숲의 몇몇 장소는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거대한 분화구 모양의 웅덩이가 생성돼 있었다.
“나무들이 모두 얼어 있네.”
리타가 지팡이로 나무 기둥을 살짝 건드리자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나며 거목이 한순간에 박살이 나 옆으로 쓰러졌다.
“이크!”
머리 위로 쏟아지는 얼음 조각들을 피해 앞으로 후다닥 달려간 리타는 굳은 표정으로 뭔가를 살피고 있는 도현에게 다가갔다.
“뭘 보고 있는 거야?”
“가면 조각.”
도현은 거대한 분화구 모양의 웅덩이 옆에 떨어져 있던 가면 조각을 리타에게 보여 줬다.
“이건 휴반트가 착용한 여자 가면의 일부분이야.”
“그게 왜 여기 떨어져 있지?”
리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무래도 강적이 나타났었던 것 같아.”
“강적?”
“그의 가면이 떨어져 나갈 만큼 강한 마법사 말이야.”
도현의 말에 리타는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녀석 굉장히 강하잖아. 도현이 아니면 상대할 자가 없을 만큼. 얼음탑에 누가 있어서 그를 상대한 거지?”
“너무 심각한 표정 지을 필요 없어. 휴반트가 당했다면 항구엔 얼음탑 녀석들이 복구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을 거야.”
“맞아, 그랬겠지. 그럼 휴반트 손에 얼음탑이 전멸한 건가?”
도현은 휴반트의 가면 조각을 손안에 쥐며 숲 너머 탑을 지그시 응시했다.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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