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1] 디 임팩트 23권 21화
혹한의 대지 위로 눈보라가 몰아쳤다. 하얀 눈이 검은 구름처럼 두꺼워 햇볕은 지상에 도달하기 전에 그 기운을 잃고 소멸했다.
밝지도 그렇다고 밤처럼 어둡지도 않은 흐릿한 공기 가득한 땅을 휴반트는 묵묵히 걸어갔다.
이곳은 얼음탑 마법사들이 만든 마법진 속 세상.
쿠와아아아아!
눈 덮인 대지가 갈라지며 돌과 얼음으로 혼합된 전갈 모양의 거대한 괴수들이 떼로 나타나 그를 향해 돌진해 왔다.
대지가 진동하고 하늘 높이 치켜든 괴수의 집게발은 칼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저 집게발에 걸리면 집채만 한 바위라도 단번에 절단될 것 같았다.
무서운 기세로 눈보라를 뚫으며 달려오는 수십 마리의 괴수들을 잠시 노려보던 휴반트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고대의 검이 검게 불타오르며 괴수들을 압도하는 흉포한 기세를 일으켰다.
그는 느릿하게 검을 대지 위에 꽂았다.
그 순간 반경 수십 미터가 폭발했고, 그 폭발의 영향력 안에 들어와 있던 괴수들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 허공으로 튕겨졌다.
투두두두둑.
괴수들의 잔해가 휴반트 주위로 어지럽게 떨어졌다.
단 한 수에 괴수들을 전멸시킨 그는 땅에 꽂았던 검을 회수해 다시 길을 걸었다.
‘날 이곳에 끝까지 잡아 둘 수는 없을 것이다.’
마법진 속 괴수들을 제거할 때마다 그를 가둬 둔 이 마법진의 힘이 조금씩 약해지는 것이 전신으로 느껴졌다.
‘나가면 모조리 죽여 주마.’
며칠 전 섬에 도착한 그는 태양의 마을 사람들을 죽인 자들을 요구했다. 하지만 거부됐고, 그를 무시하며 조롱까지 했다.
오만한 그들에게 휴반트는 자신이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수의 검을 휘두르기로 결정했다.
항구의 모든 배를 파괴하고 섬 중심에 서 있는 얼음탑으로 향하며 마법사들을 죽여 나갔다.
숲에서 강한 마법사를 만나 가면이 일부 부서진 것 외에는 그의 발걸음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탑 앞 광장에서 상대하게 된 이 마법진은 보통이 아니어서 며칠째 이 안에 갇혀 있는 상태다.
-휴반트.
어디선가 여자의 목소리가 약하게 들려왔다.
-휴반트.
눈보라를 헤치며 얼어붙은 대지 위를 걷던 휴반트는 걸음을 멈추고 옆을 쳐다봤다.
눈처럼 흰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성이 맨발로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당신은.”
휴반트의 눈동자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죽은 에린이었다.
몸이 굳어 있는 그에게 다가온 에린은 부드럽게 입맞춤을 한 후 그윽한 눈길로 휴반트를 바라봤다.
-그래요, 나예요, 에린. 보고 싶었어요.
“당신이 왜 여기에?”
-신의 세계를 떠돌다 이곳까지 오게 됐어요. 당신을 만나 너무 기뻐요.
에린의 눈물이 휴반트의 손등에 떨어졌다. 그 소름 끼치는 감촉에 휴반트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도 알고 있다. 눈앞에 에린은 마법진이 만들어 낸 허상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그는 이 허상을 밀어 내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그녀인가.
-이곳에서 나와 함께 살아요. 밖으로 나가지 말고.
그녀의 손길이 그의 옷 사이로 뱀처럼 파고들어 왔다.
-당신의 괴로움과 그리움을 해소시킬 공간은 오직 이곳밖에 없어요. 나를 버리지 말아요. 평생토록 이곳에서 함께해요.
휴반트는 손을 들어 에린의 창백한 피부를 더듬었다. 실제처럼 느껴지는 그 감촉에 참았던 눈물이 밀려왔다.
에린이 살아 있다면 눈앞에 허상처럼 아름다웠을 텐데.
그는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에린, 난 마을 사람들의 복수를 해야 하오. 그러기 위해선 이곳을 나가야 하오.”
-그들이 나보다 더 소중한가요?
“그건 아니오.”
-그럼 가지 말아요. 당신은 고통받을 만큼 받았잖아요. 당신이 가 버리면 난 다시 혼자가 될 거예요.
그녀는 휴반트의 가면을 천천히 벗겨 냈다.
-내가 그리워 나의 모습을 한 가면을 쓰고 있었군요. 이런 가짜는 더 이상 필요 없어요. 여기 당신의 진짜 에린이 있잖아요.
가면을 바닥에 버리려는 그녀의 손목을 휴반트가 강하게 붙잡았다.
“가면을 돌려주시오.”
-당신, 날 버리고 떠날 거예요? 당신은 날 지켜 주지 못했잖아요. 지금도 그럴 거예요?
그녀의 말이 휴반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눈앞에 에린이 허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휴반트는 흔들리는 감정을 제어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슬픈 눈동자로 휴반트를 응시하던 그녀는 휴반트의 손힘이 약해지자 들고 있던 가면을 저 멀리 던져 버렸다.
-우리 더 이상 헤어지지 말아요.
* * *
얼음탑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는 얼음탑주다. 하지만 탑 안엔 탑주조차도 어찌하기 버거운 늙은 마법사들이 수십 명이나 존재한다.
그들은 세상과 담을 쌓고 마법만을 수련하는 자들로, 탑 안의 사람들에게 원로로 통한다.
그들이 다수의 의견으로 결정한 사안은 탑주라 하더라도 무시 못 하고 존중을 해 줘야 한다.
그런 원로들이 모두 투입돼 철가면 휴반트를 며칠째 막고 있었다.
쿵쿵쿵쿵!
휴반트를 가둬 둔 반원형의 마법진이 출렁일 때마다 마법진을 구성하는 수십 명의 원로들의 몸도 동시에 출렁였다.
“버티시오! 버티지 못하면 얼음탑의 명예는 오늘로 끝이 날 것이오!”
빛나는 로브를 입고 있는 장대한 체구의 노마법사가 흰 수염을 휘날리며 원로들을 격려했다.
그는 원로들의 우두머리인 대원로로, 두 눈에서 번갯불 같은 푸른 광채가 수시로 번뜩여 굉장한 위압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쿠우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마법진이 또 한차례 출렁였다. 원로 중 한 명이 입에서 피를 뿜으며 뒤로 나뒹굴었다.
마법진을 유지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그는 체내의 마력이 뒤엉켜 얼굴이 녹아내리며 죽어 갔다.
원로의 죽음을 잠시 내려다보던 장대한 체구의 대원로는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대기 중인 원로에게 시선을 두었다.
“당신 차례요.”
지명당한 원로가 빈자리를 메우자 약해졌던 광장에 설치된 얼음탑 수호진이 다시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 갔다.
나흘간 죽어 간 원로들의 수는 스무 명 정도.
이제 싸움은 누가 먼저 지치느냐의 문제로 접어들었다.
숲에서 철가면 휴반트를 막다 팔을 하나 잃은 대원로는 광장을 가득 채우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원로들은 탑의 명예를 위해 목숨으로 자리를 지키시오!”
스승의 뒤를 이어 얼마 전 얼음탑주가 된 카샨은 광장에서 전투를 진두지휘하는 대원로의 뒷모습을 무거운 얼굴로 지켜보다 뒤를 돌아봤다.
그의 뒤로 수백 명이 넘는 탑의 마법사들이 긴장한 얼굴로 도열해 있었다.
만약 얼음탑 수호진이 깨지면 그는 이들을 데리고 전투에 참여해야 한다.
얼음탑이 세워진 지 백여 년이 넘었지만 탑이 전력을 다해 전투에 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엔 침입자가 있다는 보고에 브링틱에서 싸운 베일 가문의 그 용병이 온 줄 알았다.
그러나 침입자는 그가 아니었다.
‘그 용병 녀석이 오면 발동시킬 마법진을 엉뚱한 자에게 사용하고 있다니. 이제 원로들이 이렇게 큰 피해를 입었으니, 그 녀석을 상대하는 게 더욱 어려워지겠군.’
카샨은 그의 스승을 죽이고 씨드를 차지한 도현에 대한 강한 시기와 적대감이 여전히 가슴에 들끓고 있어서 한시도 그를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쿠쿵!
광장을 반원 형태로 뒤덮은 마법진이 연속해서 크게 요동쳤고, 수십 명의 원로들이 일제히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러나 그들은 곧 각자의 자리로 돌아와 광장 바닥에 꽂아 둔 마법 지팡이에 손을 얹고 다시금 마력을 주입했다.
두 다리가 떨리는 원로들도 있었고, 혀가 터져 핏물이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 원로들도 있었다.
“참으로 지독하고 강한 자입니다. 초대 탑주가 남긴 마법진 안에서 저렇게 오래도록 버티다니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탑주?”
카샨의 곁에 서 있던 노마법사 드비오가 탑주에 대한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그렇군요.”
“이젠 심각하게 고려를 해야 할 시점입니다.”
“뭘 말이오?”
드비오는 탑 입구에 서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카샨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자와 타협을 하는 것 말입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카샨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드비오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생각을 계속해서 얘기했다.
“저자가 마법진 안에서 죽으면 좋겠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리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자는 조만간 마법진을 깨고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나게 될 겁니다.”
“그땐 남은 원로들과 내가 그자를 없애야지. 그자도 몸이 온전한 상태는 아닐 테니 말이야.”
“그래서 우리에게 남는 게 무엇입니까? 싸우면 싸우는 대로 우리 피해는 더욱 늘어날 테고, 만약에 지기라도 하면 목숨이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명예나 자존심은 잠시 내려놓으시고 저자와 대화를 통해 상황을 해결해 보십시오. 그자가 여기에 온 건 태양의 마을 사람들 때문이라고 하니, 그 일과 관련된 자들을 내주면 대화의 물꼬는 트일 겁니다.”
카샨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탑에 쳐들어온 단 한 명의 검사에게 굴복할 수 없다는 강경한 원로들의 주장을 뒤바꿀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이미 많은 수의 원로들이 희생당한 상태라, 고집스러운 원로들이 순순히 그의 지시를 따라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싸움이 한창인 지금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 누구도 신임 탑주인 그를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필요한 건 타협이 아니라 탑의 명예를 지키려는 강력한 결전의 의지다.
뒤로 돌아선 카샨은 얼음탑 입구에 도열해 있는 수백의 마법사들을 둘러보며 용맹하게 외쳤다.
“얼음탑 마법사들이여! 나와 함께 성지를 침범한 자를 죽일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렇습니다!”
수백의 마법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지팡이를 머리 위로 흔들며 결의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아니, 탑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화들짝 놀란 드비오가 광장으로 가려는 카샨의 팔을 붙잡았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이오?”
카샨의 차가운 시선에 드비오는 흠칫하며 그의 팔을 놓아줬다.
브링틱에서 얼음탑주를 잃고 겨우 살아 돌아온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됐지만, 지금 이 순간 다시 멀어진 것 같았다.
“드비오, 당신 말대로 저자가 마법진을 부수고 나올 수도 있소. 그러면 우리는 전력을 다해 그와 싸울 것이오. 후퇴는 없소. 가자!”
드비오에게 무안을 준 카샨은 수백의 마법사들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긴 계단을 밟고 내려가다 중간에 멈춰 섰다.
‘뭐지, 이 느낌은?’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인간의 뼈로 된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무서운 속도로 낙하하는 거대한 괴물이 있었다.
그 괴물은 리타가 소환한 어둠의 마왕으로, 리타가 강해짐에 따라 한층 무서운 능력을 갖추게 됐다.
이글거리는 핏빛 눈과 빨갛게 달궈진 머리 위의 뿔, 덩치도 더 커져 신장은 20미터에 육박했다.
“마왕아! 다 날려 버려!”
마왕의 등에 타고 있던 리타가 지상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카샨과 마법사들을 노려보며 외쳤다.
캬아아아아!
송곳니를 드러낸 근육질의 마왕이 어둡게 빛나는 마왕의 낫을 휘두르자 음산하게 타오르는 수백 개의 화염구가 생성돼 우박처럼 저들을 향해 쏟아졌다.
“막아라!”
광장으로 내려가는 긴 계단 위에 몰려 있던 수백의 마법사들이 다급히 지팡이로 하늘을 가리키자 둥근 얼음막이 생성됐다.
쿵쿵쿵쿵쿵!
얼음막에 가로막힌 화염구가 폭발하며 불길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옆을 조심해!”
마법사들이 화염구를 막는 사이 순식간에 위치를 이동한 마왕이 옆에서 거대한 낫을 횡으로 그었다.
후우우우웅!
엄청난 압력을 동반한 거대한 낫의 힘에 탑과 광장을 이어 주던 계단의 일부가 통째로 뜯겼고, 그 위에 서 있던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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