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 디 임팩트 23권 23화
그는 탑의 명예나 자존심보다 목숨을 먼저 챙겼다.
‘카샨, 너의 죽음을 누가 기억이나 한단 말이냐? 어리석은 놈.’
도현의 검에 비참하게 죽은 카샨을 떠올리며 속으로 비웃던 그의 얼굴이 옆으로 홱 돌아갔다.
앞니가 부러진 그는 격앙된 얼굴로 도현을 노려봤다.
“항복했는데 이래도 되는 것이오!”
“안 때린다는 말은 안 했어.”
일행이 카샨에게 사로잡혀 고문을 받게 된 계기는 드비오 때문이기도 했다.
“과거 일은 과거 일! 강자가 어찌 속 좁게 이리 행동하는 것인가!”
꾸짖듯 말하는 그의 뒤통수를 리타가 지팡이로 후려쳤다.
“이게 어디서 따지고 들어! 넌 카샨보다 더 나쁜 자식이야!”
리타는 지팡이로 드비오의 전신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얼마나 모질게 때리는지 고요한 광장에 매질하는 소리만 섬뜩하게 울려 퍼질 정도였다.
기절한 드비오의 엉덩이를 걷어찬 리타는 피 묻은 지팡이를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젊은 마법사의 어깨에 쓱쓱 닦아 냈다.
“떨지 마. 넌 안 때릴 테니까.”
“가, 감사합니다.”
“너희 탑에 귀한 마법서들이 보관되어 있지? 그것들 다 어디 있어?”
“예?”
“마법서들 말이야!”
리타가 지팡이를 들고 목소리를 높이자 탑에서 원로의 시중을 들었던 젊은 마법사가 움찔하며 급히 답했다.
“제,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리타는 도현을 보며 해맑게 웃었다.
“나 다녀올게.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 귀한 시간을 내서 왔는데 말이야.”
도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 안에 숨어 있는 자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응. 걱정 마.”
리타가 젊은 마법사를 앞세우고 탑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도현은 마법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점점 작아지던 마법진이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림
휴반트는 에린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마법진이 만든 허상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메마른 가슴이 그녀의 출현으로 인해 다시금 살아서 역동적으로 뛰고 있었다.
그의 본능이 위험을 경고했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하며 에린의 미소 띤 얼굴을 한없이 바라보며 걷고 또 걸었다.
-이제 다 왔어요. 저기 언덕만 넘으면 우리가 영원히 살 집이 나와요. 기대되죠?
“기대되오.”
-그럴 줄 알았어요. 당신은 날 절대 버리지 않아요. 그렇죠?
“물론이오.”
휴반트는 가면이 사라진 얼굴로 그녀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는 결코 보여 주지 못했던 미소였다.
-가면 없는 이 얼굴 그대로가 좋아요. 다시는 가리지 마세요.
“당신만 좋다면 그렇게 하겠소.”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요. 우리 함께 뛰어가요.
언덕을 뛰어 올라가던 에린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눈보라가 사라진 하늘이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누군가 당신과 나 사이를 방해하고 있어요.
“걱정 마시오. 난 당신과 영원히 함께 있을 테니.”
-고마워요. 서둘러요.
휴반트의 손을 꼭 붙잡은 에린은 언덕 정상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갔다.
그러나 언덕 정상은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녀가 뛰어 올라온 만큼 언덕은 더 멀어졌다.
-안 되는데. 당신을 언덕 너머까지 꼭 데리고 가야 하는데.
안타까워하던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휴반트를 껴안았다.
-미안해요. 안 되나 봐요.
휴반트는 에린을 안아 들고 언덕 정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진심을 다해 에린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죽음이라 해도.
유성처럼 빠르게 달려 붕괴되는 마법진 속 세상의 한계를 극복한 휴반트는 마침내 언덕 정상에 서서 아래를 굽어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언덕 너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이 안고 있던 에린을 봤다.
그녀는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강한 허탈감과 외로움에 휩싸인 휴반트는 자신의 발밑에 걸리는 물체를 집어 들었다.
마법진 속 세상이 만든 에린이 버렸던 그의 가면이었다.
그것이 왜 이곳에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습관처럼 가면을 얼굴에 착용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흔들리는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게 됐다.
“휴반트.”
뒤에서 들리는 도현의 목소리에 휴반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마법진이 사라진 광장에 도현이 있는 게 의외였는지 휴반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
“이오나디 사막에 있는 도적단 두목이 알려 주더군.”
휴반트는 광장에 보이는 원로들의 시신을 둘러봤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어딘지 그를 원망하는 것 같은 휴반트의 목소리에 도현은 담담히 대꾸했다.
“내가 돕지 않아도 당신이 무사할 거라는 건 알았지만 당신을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서.”
도현은 말을 하며 손에 쥔 에린의 가면 조각을 내밀었다.
“당신 거 맞지?”
“……별걸 다 주워 오는군.”
무심하게 말하며 도현의 손에 들린 가면 조각을 받은 휴반트는 도현의 눈을 들여다봤다.
싸우지 않고 이렇게 가까이서 쳐다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젠 멀쩡해졌군. 베일성에선 껍데기가 미쳐 날뛰더니.”
“그땐 고마웠다.”
“착각하지 마라. 이 검으로 널 정당하게 쓰러트리고 싶어서 잠시 네 목숨을 연장해 둔 것뿐이니까.”
휴반트는 도현을 지나쳐 석상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얼음탑 마법사들에게 향했다.
그는 고대의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중에 태양의 마을 사람들을 죽인 녀석들이 있나?”
“우리 중에는 없습니다.”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거짓말을 하고 있군. 나는 느껴져, 너희들의 거짓말이.”
휴반트가 검을 휘두르자 파도와 같은 암흑 검기가 쏟아져 나와 마법사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콰앙!
다리가 부서진 거대한 초대 얼음탑주의 석상이 기우뚱하더니 곧 저들의 머리 위로 쓰러졌다.
기겁을 한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흑거미의 줄에 묶인 상태로 황급히 몸을 피했고, 잠시 후 그들이 피한 자리에 석상이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쿠우웅!
돌가루와 먼지가 바닥을 뒹군 마법사들의 온몸을 뒤덮었다.
피하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석상에 깔려 태반이 목숨을 잃을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드비오 님이 죽었어.”
몇몇 마법사가 석상에 깔려 죽은 드비오의 시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리타에게 맞아 기절해 누워 있던 드비오로서는 억울한 죽음이었다.
“다시 묻는다. 너희들 중에 마을 사람들을 죽인 녀석이 있나?”
휴반트의 검이 다시 위로 올라가자 마법사들이 일제히 한 사람을 응시하며 외쳤다.
“저자입니다!”
“맞습니다! 저자가 사막에서 사람들을 실컷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렸습니다!”
지목을 당한 중년의 마법사는 광장에 누운 채 겁에 질린 얼굴로 휴반트를 올려다봤다.
“저, 전 그저 구경만 했을 뿐입니다.”
“나머지 놈들은 다 어디 갔지? 열 명이 넘는다고 들었는데.”
휴반트가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탑으로 가는 계단에서 저 사람이 휘두른 검에 모두 죽었습니다.”
휴반트는 도현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마법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을 왜 죽였나?”
“다, 다들 술에 취해서 그냥……. 어쩌다 보니.”
“그랬군. 어쩌다 보니 말이야.”
휴반트의 검이 중년 마법사의 눈을 파고들어 갔다.
“으아아악!”
마법사는 몸부림치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은 나를 품어 준 가족 같은 사람들이었다.”
한 자 한 자 씹어뱉은 휴반트는 마법사의 눈에 박힌 검을 뽑아 그대로 목을 베어 버렸다.
마을 사람들의 복수를 끝낸 그는 마음이 그렇게 공허할 수가 없었다.
‘이젠 어디로 가야 하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는 갑자기 극심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며칠간 물 한 모금 음식 한 점 먹지 않고 마법진 안에서 싸운 후유증이 지금에서야 한꺼번에 밀려왔기 때문이다.
힘이 풀린 휴반트에 손에서 검이 미끄러져 땅에 떨어졌고, 그의 몸도 검을 따라 힘없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 * *
어두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넓은 공터에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밤이 되니까 꽤 쌀쌀하네. 이럴 땐 따뜻한 수프가 좋지.”
마법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솥단지 안의 물이 끓어오르자 리타는 콧노래를 부르며 말린 고기 가루와 각종 야채 가루를 넣고 국자로 휘휘 저었다.
“저 사람 깨우는 게 좋지 않을까? 뭐라도 먹고 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리타는 모닥불 근처에 누워 있는 휴반트를 보며 말했다.
도현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지금은 그냥 이대로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몸도 마음도 아주 피곤해 보이거든.”
“응, 알았어. 우리끼리 먹자.”
늦은 저녁 식사를 끝낸 그들은 모닥불 옆에 나란히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사막의 별 못지않게 바다의 별도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배에서 듣는 파도 소리와 섬에서 듣는 파도 소리가 굉장히 달라.”
“어떻게 다른데?”
팔베개를 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도현은 고개를 조금 돌려 옆에 누워 있는 리타를 쳐다봤다.
리타는 작은 손을 움직이며 파도 흉내를 냈다.
“배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는 이렇게 격렬하거든? 그런데 섬에서 듣는 파도 소리는 뭔가 자장가처럼 은은하고 듣기 좋아.”
“그건 그때그때 날씨에 따라 다른 게 아닌가?”
“몰라, 아무튼 그래. 지금은 듣기 좋아.”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밤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리타의 말을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절벽 아래 해안가에 부딪쳐 오는 파도 소리가 편안하고 듣기 좋았다.
곧 리타는 잠이 들었고 옅게 코까지 골았다.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법 주머니 안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는 종이 상단에 ‘섬에서 리타와 파도 소리를 들으며’라는 제목을 지은 다음, 모닥불 옆에 잠이 든 리타의 모습을 정성스럽게 그려 나갔다.
* * *
휴반트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분신과 같은 고대의 검을 찾았다.
검은 다행히 그의 손이 미치는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었다.
‘빌어먹을. 정신을 잃다니.’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난 그에게 리타는 어젯밤에 끓인 수프를 내밀었다.
“배고파서 일어났어? 이거 먹어. 맛있어.”
“넌 뭐냐.”
“뭐냐라니? 나 누군지 알잖아. 도현과 함께 다니는 사람.”
휴반트는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수프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수프 그릇을 받았다.
“많이 있으니까 먹고 또 먹어도 돼.”
“백도현은 어디 갔지?”
수프를 먹으며 휴반트는 절벽 공터 주변을 둘러봤다. 도현이 보이지 않았다.
“저기 숲으로 잠깐 볼일 보러 갔어. 사람인 이상 볼일은 보고 살아야 하잖아.”
“너희 둘만 이곳에 왔나?”
“응.”
휴반트는 빈 수프 그릇을 리타에게 내밀었고, 리타는 솥단지 안에 남아 있는 수프를 그릇에 담아 다시 돌려줬다.
“넌 내가 두렵지 않은가 보지?”
“뭐 별로.”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난 리타는 기지개를 크게 폈다.
“실컷 잤더니 허리가 아프네.”
물끄러미 리타를 응시하던 휴반트는 고개를 숙이고 수프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가면 벗고 먹는 게 편하지 않아?”
“참견 마라. 난 이게 편하니까.”
차가운 그의 대꾸에 리타는 입술을 삐죽였다.
수프 두 그릇을 비운 휴반트는 아직 양이 부족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수프를 그릇에 담아 몇 번이고 더 먹었다.
그사이 공터에 나타난 도현은 휴반트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줬다.
“잘 먹었다.”
리타에게 눈인사를 보낸 휴반트는 절벽에서 훌쩍 뛰어내렸고 도현도 그의 뒤를 따라 절벽에서 몸을 날렸다.
절벽 밑 해안가는 고운 모래들이 선을 이루듯 일정하게 길게 깔려 있어서 맨발로 밟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휴반트는 신발을 벗고 흰 거품을 만드는 바다 물결을 발등으로 느끼며 말없이 바다를 응시했다.
사막의 모래는 뜨겁지만 바다의 모래는 물기를 머금어 시원했다.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거냐.”
조금 쉰 듯한 휴반트의 목소리가 작은 파도 소리를 뚫고 도현의 귓가에 전달됐다.
도현은 모래 위에 놓인 조개껍질을 주워 들며 답했다.
“나도 얼음탑에 갚아야 할 빚이 있었거든. 겸사겸사해서 찾아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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