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4] 디 임팩트 23권 24화
“마법진에 갇힌 나를 도운 것도 그렇고, 정신을 잃었을 때 돌봐 준 것도 그렇고, 그래 봤자 너와 난 싸울 운명이야.”
“베일성에서 당신이 날 살려 준 이유와 같다고 보면 돼.”
도현의 담담한 대답에 휴반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절벽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리타를 힐끔 쳐다봤다.
“네 제자 녀석은 왜 같이 안 왔나. 그 녀석이 보는 앞에서 널 쓰러뜨리겠다고 약속했는데.”
휴반트는 베일성에서 그를 용감히 막아선 에드를 잊지 않고 있었다.
“사막까지는 동행했어. 상황이 안 돼서 나와 리타만 온 것이고.”
“아쉽군. 그 녀석은 내가 패할 거라고 확신하던데 말이야. 그것이 아니라는 걸 눈앞에서 보여 주지 못하게 됐으니.”
“그런가?”
도현은 피식 웃으며 들고 있던 조개껍질을 모래 바닥에 내려놨다.
“그 몸으로 괜찮겠나?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 조금 더 기다려 줄 수도 있어.”
“아니, 지금이 딱 좋다.”
휴반트는 얼굴에 차고 있던 가면을 벗어 잠시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바다 멀리 던져 버렸다.
뜨거운 태양이 그의 얼굴을 자극했다.
에린을 향한 마음은 이 가면으로 채워질 수 없었다.
그녀는 죽어 갈 때 그의 얼굴을 보며 보기 좋다고 했다. 그것이면 됐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 따윈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수십 년 만에 스스로의 의지로 비로소 자유로운 얼굴이 된 휴반트는 자신을 가두던 벽이 깨져 나가는 기분이 들어 전신이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스르릉.
휴반트가 허리에 찬 검을 뽑는 순간, 날카로운 기세가 뻗어 나와 모래와 파도를 부수고, 절벽 위에서 바라보던 리타의 머리카락 일부까지 잘라 버렸다.
‘한순간에 달라졌군.’
도현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손을 한 번 휘저었다. 휴반트가 검을 뽑으며 생성된 무형의 검기가 그의 손짓에 따라 둥글게 뭉쳤다.
그는 둥글게 뭉쳐진 무형의 검기를 바다로 내몰았다. 잠시 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바닷물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백도현!”
모래사장을 박차고 오른 휴반트의 검이 맹렬한 속도로 도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사막의 폭풍 같군.’
허공에서 떨어지는 휴반트의 검 속엔 사막의 뜨거움과 차가움, 그리고 끈질긴 생명력도 느껴졌다.
사막에서 살아온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게 저 검 하나에 담겨 있는 것이다.
자연은 검을 수련하는 자에게 좋은 스승이다.
잠시 감탄하던 도현은 부드럽게 검을 뽑아 호검술의 정화가 담긴 원을 하나 그려 갔다.
허공 한 점에서 시작해 완벽한 원이 된 순간, 원 안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와 사막의 기운들을 녹여 내고 뒤따라오던 휴반트까지 날려 버렸다.
콰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휴반트의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모래사장에 처박혔다.
그러나 휴반트는 큰 타격을 받지 않았는지 손바닥으로 모래 바닥을 내려치며 그 반동으로 벌떡 일어나 도현에게 짓쳐 들었다.
“이얏!”
손등의 푸른 힘줄이 불끈 올라올 정도로 검 손잡이를 움켜쥔 휴반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도현을 노려보며 단숨에 다가와 도현의 허리를 베었다.
떨어지는 사막의 해를 보며 수없이 반복했던 검 동작이었다. 빠름을 초월해, 환상까지 불러일으키는 절대적인 쾌검.
우드드득.
초월적인 검의 속도에 휴반트의 손뼈가 감당하지 못하고 뒤틀렸다.
찰나간에 이뤄지는 최고의 검술.
어떤 방어도 무력화하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까지 갖춘 휴반트의 필살기였다.
쾅!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 사이에서 거대한 불꽃이 일어나 모래 바닥이 삽시간에 녹아내렸다.
녹고 있는 모래 위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검을 교차하고 있었다.
휴반트의 필살기도 도현의 검에 가로막힌 것이다.
채에에에엥!
두 사람의 힘이 실린 검에선 불꽃이 계속 일어났고, 귀를 자극하는 금속성이 악마의 울음처럼 주변을 괴롭혔다.
한자리에서 원을 그리듯 서로의 위치를 바꾸며 돌던 두 사람은 교차한 검을 어느 순간 떼는가 싶더니 다시금 맞붙어 한 치의 양보 없이 폭풍 같은 공방전을 이어 갔다.
쿠쿠쿵쿵!
두 사람이 싸운 여파로 인해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폐허가 되어 갔고, 리타가 있는 절벽도 굉음을 내며 모서리가 부서져 내렸다.
먼지를 뒤집어쓴 리타는 머리 위의 돌 조각을 털어 냈다.
“스승님, 설마 도현이 지는 건 아니겠죠?”
절벽 위에서 지켜보던 리타가 락제프에게 물었다.
-걱정 마라. 이미 승패는 결정 났다. 도현은 검을 좋아하는 녀석이다. 지금은 휴반트와 싸우는 걸 즐기고 있는 거야. 휴반트를 죽이려 했다면 벌써 끝이 났겠지.
“역시 그렇죠? 저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구요.”
락제프와 대화를 마치고 고개를 돌리던 리타는 해변에서 올라오는 섬광에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도 눈이 부셔서 순간 눈이 멀 것 같았다.
빛이 사라지는 게 느껴지자 그녀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방금 전까지 치열하게 싸웠던 모래사장엔 도현만 서 있었고, 휴반트는 저 멀리 바다까지 밀려 나 있었다.
도현의 검을 막지 못하고 가슴에 상처를 입은 휴반트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 내며 천천히 바다 위를 걸어 도현에게 다가왔다.
“더 해볼 텐가?”
도현의 물음에 휴반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평생 수련한 검을 최선을 다해 펼쳐 봤지만 도현의 검술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그는 자신보다 강했다.
“졌다. 아직 내가 너에게 미치지 못하는군. 네 검술은 훌륭했다.”
“당신의 검도 훌륭했어. 진심이야.”
도현은 사막의 검을 선보인 휴반트를 진심으로 칭찬했다.
그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휴반트와 싸우는 내내 아주 즐거웠다.
“다음엔 반드시 내가 이길 거다. 나에게 남은 건 오로지 검밖에 없으니까.”
가면에서 벗어난 휴반트의 얼굴을 보며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지.”
휴반트는 자신의 검을 내려다봤다.
그의 검은 파괴신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고대의 검으로, 일단 발동하면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조금 전 도현과 싸울 때 그는 그 힘을 사용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끓어올랐지만 그것을 이겨 냈다.
‘파괴신의 힘은 나의 것이 아니다.’
검을 검집에 꽂은 휴반트는 잠시 도현을 응시하다 몸을 돌려 해안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후에 배가 올 거다. 가슴에 상처를 치료하고 우리와 같이 떠나는 건 어떤가?”
도현의 말에 휴반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꾸했다.
“떠나는 건 내가 알아서 하겠다.”
더 권해 봤자 휴반트의 마음을 돌리기는 어려워 보였다.
“어디로 갈 건가?”
“태양의 마을.”
“거긴 더 이상 아무도 살고 있지 않잖아.”
“상관없어. 난 그곳이 좋으니까.”
모래사장을 박차 오른 휴반트는 순식간에 도현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저렇게 그냥 가는 거야? 얘기 좀 나눠 보고 싶었는데.”
절벽을 내려온 리타가 아쉬운 얼굴로 말하며 도현의 옆에 섰다.
그녀 손에는 마법 주머니에서 꺼낸 술병이 들려 있었다.
“뒷모습이 커 보여.”
“응? 뭐라고?”
술병의 마개를 열던 리타가 도현을 봤다.
도현은 해풍에 몸을 맡긴 채 먼 바다를 응시했다.
“뭔가 자신의 한계를 한 꺼풀 벗겨 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하는 말이야.”
“휴반트가?”
“그래.”
도현은 리타가 반쯤 마시고 건네준 술병을 비우고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성장이 기대됐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군.’
* * *
사막 날씨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에드네 집이 있는 작은 마을도 무더위가 찾아와 사람들을 지치게 했다.
“뭔 놈의 돼지들을 이렇게 많이 키우는 거야?”
짐브리오는 투덜대며 돼지우리 안에 질퍽하게 쌓인 돼지 똥을 삽으로 퍼 수레에 담았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 내자 손에 묻어 있던 돼지 똥이 이마에 묻었다.
왈칵 짜증이 솟구친 그는 삽을 한쪽에 내팽개치고 돼지우리를 나왔다.
“내 몫은 했으니까, 이제 당신 차례요.”
“조금 더 하지 그러나?”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에드네 소유의 과수원에서 딴 포도를 먹던 영주 딘이 웃으며 말했다.
며칠 전 에드의 집에 도착한 그들은 도현을 기다리며 소소하게 에드네 집안일을 거들고 있었다.
“장난하시오? 내가 저 냄새나는 돼지 똥을 거의 다 치웠는데, 더 하라고?”
“난 영주가 아닌가? 영주 체면에 돼지 똥이라니.”
“힘들고 지저분한 일을 해 봐야 영지민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도 알지. 그렇게 번 돈이 모두 영주의 세금으로 들어가는 거 아니요? 거 비켜 보시오.”
무더위를 피해 나무 그늘 안으로 들어간 짐브리오는 어깨로 슬쩍 딘의 몸을 밀어 냈다.
짐브리오에게 떠밀려 나온 딘은 별수 없었는지 돼지우리로 걸어가 삽을 손에 들었다.
“내가 돼지 똥을 치웠다는 얘기는 어디 가서 하지 말게.”
“관심 없으니까 어서 치우기나 하시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매번 쉬기만 하고 말이야.”
“가까이서 맡으니 냄새가 보통이 아니군.”
영주 딘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몸을 사리지 않고 돼지 똥을 열심히 치워 갔다.
짐브리오는 딘이 남긴 포도를 먹다가 옆을 돌아봤다.
에드의 동생 토밀이 주뼛거리며 다가와 바위에 걸터앉으려 했다.
형이 돌아와 기뻐하던 토밀은 손님으로 온 낯선 어른들이 형과 함께 베일 가문의 전쟁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포도 더 갖다 드릴까요?”
“아냐, 괜찮다.”
“형이 없을 때 저랑 누나들이랑 포도나무를 잘 키웠어요.”
“그래, 잘했다. 맛이 좋구나.”
짐브리오는 씨익 웃어 보이며 입안에 남은 포도씨를 툭 뱉어 냈다.
“그런데 저기 돼지들은 왜 그렇게 많은 거냐? 돼지 농장 수준이야.”
“그건…….”
토밀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저 돼지들은요, 지난번 도적들의 약탈 때 죽은 마을 사람들이 키우던 돼지들이에요.”
“아, 그랬어?”
짐브리오는 괜한 걸 물었다 싶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도 이 마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도현과 에드로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태반이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
“너, 그 검 계속 차고 다니는 거냐?”
짐브리오는 키 작은 토밀이 자신의 키만 한 목검을 허리에 차고 다니는 게 기특했는지 웃으며 물었다.
“네, 형처럼 강해지려면 저도 노력해야 하니까요.”
“좋은 자세다.”
토밀을 칭찬하던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을 탄 도현과 리타가 마을로 들어오고 있었다.
내심 걱정을 하고 있던 그는 웃으며 외쳤다.
“영주! 도현과 리타가 왔소!”
* * *
밤이 되자 한낮의 더위는 잠시 물러났고 바람이 선선해졌다.
도현의 방문을 반긴 에드의 아버지와 식구들은 돼지와 닭을 잡고 신선한 과일과 독한 술로 식탁을 풍성하게 꾸려 축제와 같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도현보다 며칠 앞서 도착한 어베인을 비롯한 동료들은 에드네 가족과 이미 허물없이 친해져서 저녁 식사 자리는 웃음과 장난이 끊이지 않았다.
“마왕이가 낫을 이렇게 휘두르니까 말이야, 얼음탑 녀석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더라니까!”
많이 마신 술 때문에 코끝이 빨갛게 변한 리타는 얼음탑에서의 무용담을 큰 동작을 섞어 말을 했다.
“마왕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 주시면 안 돼요?”
어른들 사이에 껴서 몰래 술을 한 모금씩 훔쳐 먹던 토밀이 마왕이 보고 싶었는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럴까?”
리타가 당장이라도 마왕을 불러낼 듯 의자에서 일어나는 시늉을 하자 토밀의 아버지 루드가 손짓을 하며 말렸다.
옆에서 들어 보니 마왕의 크기가 산만 하다고 하던데, 그런 거대한 존재가 마을에 등장하면 마을 사람들이 놀라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철없는 녀석이 한 말이니 무시하십시오.”
“아버지, 꼭 보고 싶어요!”
어린 토밀이 당돌하게 대들자 인상을 쓴 루드는 사과를 집어 들어 토밀에게 냅다 던졌다.
“아야!”
이마에 사과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토밀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아버지를 흘겨봤다.
“아버지도 보고 싶으시면서.”
“이 녀석이, 정말! 술을 훔쳐 먹더니 버릇이 없어졌어. 넌 그만 네 방으로 가!”
“치이.”
아버지에게 혼이 난 토밀은 형인 에드에게 도와 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에드는 모른 척 동생의 시선을 외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