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백호의 가호
마나통이 제거된 시기를 확인했으니 다음 할 일은 자금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휴대폰으로 은행 앱을 실행하려다가 시스템에게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전생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친절해진 시스템은 왠지 대답을 해줄 것 같았다.
'혹시 메모 같은 것도 가능하나?'
[강대한님은 직업이 기억술사이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직업과 권능 '기억'을 얻은 순간부터 강대한님께서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은 저장되며 언제든지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권능이나 스킬을 얻고 나면 숱한 시행착오를 통해서 제대로 된 활용이 가능한데 지금은 시스템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전생과 너무 다른 반응이어서 좋으면서도 살짝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우선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 메모 좀 부탁할게.'
[띠링! 권능 기억에 의해 메모를 시작합니다.]
메모를 시작한다고 했지만 상태창에 뭐가 나타나거나 나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메모하기를 원하는 것들은 메모가 되는 것 같았다.
목표는 명확했다.
복수!
복수를 위해서는 나를 비롯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나통을 보호하고, 일본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마나통은 획득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발 빠르게 움직여야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자금을 확인하기 전에 사건의 개요를 먼저 메모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대한민국이었다.
2028년 1월 5일 저녁 일곱 시.
대한민국 각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강력한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통증은 15분 정도 계속 되다 사라졌는데 집이나 사무실에서 통증을 느낀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운전이나 작업 중에 통증을 느낀 경우도 많아서 수많은 사고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도 1월 5일은 양반이었다.
1월 6일 해가 뜨면서부터 어제 가슴 통증을 느낀 사람들은 사라졌다고 생각한 통증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심한 입 냄새가 났는데 어떤 방법으로도 입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나마 가슴 통증은 어제보다 나아졌지만 하루 종일 통증을 느껴야했다.
그런데 1월 6일 해가 뜨면서부터는 다른 사람들도 가슴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동시에 가슴 통증을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증상은 모두 똑같았다.
시작은 15분 내외의 강력한 가슴 통증!
첫 통증이 지나가고 나면 마치 잠복기를 거치듯이 열 시간에서 열두 시간 정도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가슴 통증과 함께 입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가슴 통증을 호소한 사람이 나오고 정확히 일주일 만에 전 국민이 동일한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부터 빠르게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해서 3개월이 지나기 전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슴 통증과 함께 입 냄새를 호소하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심장 옆에 마나홀과 마나통이 생기면서 느끼는 통증이었다.
첫 통증은 약간 뜨거운 물을 천천히 마시면 완화시킬 수 있었지만 이후부터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통증과 입 냄새를 사라지게 할 수 없었다.
물론 이 사실이 알려진 것은 몇 년이 지난 후였지만 말이다.
가슴 통증과 입 냄새를 유발하는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서 말이 많았지만 원인으로 가장 많이 지목됐던 것은 일본의 원전 냉각수 무단 방류였다.
물론 일본은 가장 먼저 증상이 시작된 우리나라에 모든 비난의 화살을 쏟아 부으며 국제 분위기를 자신들이 유리한 쪽으로 가지고 가려고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일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사이 가슴 통증의 원인이 심장 옆에 생긴 결석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병의 원인이 밝혀지자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원전 냉각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공적자금을 들여서까지 자국민의수술을 지원하고 심장부근에서 떼어낸 결석을 가지고 각종 검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심장부근에서 떼어낸 결석은 몸에 생기는 일반 결석과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을 떼어낸 사람들은 가슴 통증과 함께 입 냄새가 사라졌다.
제법 큰 수술이었지만 성과가 나타나자 전 세계 돈 있는 사람들은 열풍처럼 이 수술을 받기 시작했다.
통증만 있었다면 참고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심한 입 냄새로 사회생활에 지장을 받자 울며 겨자 먹기로 수술을 받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수술로 인한 행복은 딱 2년이었다.
결석이라고 생각하고 떼어낸 것이 결석이 아니라 마나통이었기 때문이었다.
마나통을 제거한 사람은 2030년 1월 1일 대변혁이 일어났을 때 각성자가 될 수 없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상태창이라는 것이 주어졌을 때 이미 마나통을 제거했던 사람들도이름과 함께 마나홀과 마나통이 표시되었지만 마나통 옆에 기재된 발현율은 0%였다.
그리고 그것은 비각성자라는 확인과 동시에 절대로 각성자가 될 수 없다는 낙인이었다.
더 무서운 것은 상태창이 생김과 동시에 발현율 0%인 사람들은 가슴통증과 입 냄새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고통을 달고 살아야하는 형벌이 시작되어버렸다.
그런데 수술로 떼어낸 결석 같이 생긴 마나통은 어떤 방법으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불에 태워도 중앙의 작은 결정은 남았고 쪼개거나 깨뜨리려고 해도 절대 부서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냄새가 심해서 특별한 처리가 필요했다.
이 일을 담당했던 곳이 바로 의료폐기물 처리 업체였다.
전생에 큰아버지의 추천으로 잠시 일본에서 근무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곳의 사장 아들놈이 바로 내게 칼을 들이민 놈이자 우리 민족의 원수였다.
이놈이 어느 순간부터 마나통을 모으기 시작했고, 세상이 바뀌었을 때 이 마나통을 이용해서 세계의 강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할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놈의 마나통까지도 빼앗고 놈이 그랬듯 평생 내 마나 배터리로 살게 할 생각이다.
마나통이 제거된 사람은 마나통을 가진 사람에게 평생 마나를 제공하면서 살아야 했다.
물론 이 사실도 대변혁이 일어나고 8년쯤 지나고 난 후에야 몇몇 양심 있는 각성자들의 고백에 의해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말이다.
수술로 제거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발현율 0%가 많았는데 이 사람들도 모두 마나통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본인들은 전혀 모르고 살았지만 말이다.
'혹시 비세계(秘世界)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까? 숨겨진 세계 말이야.'
상태창이 내가 묻는 것을 대답해주자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띠링! 비세계(秘世界)라. 확실히 인간들은 그곳을 그렇게 부르기도 했죠. 비세계에 관한 것은 강대한님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책이나 영화, 뉴스 등을 통해 비세계에 대한 정보를 보신 것에 한해서는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가 알려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강대한님의 기억을 명확하게 해드리는 것뿐입니다.]
[물론 권능 기억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럼 혹시 내가 알고 있던 정보가 참인지 거짓인지도 알려줄 수 있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세계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많이 떠돌았기 때문에 묻는 것이었다.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강대한님은 직업이 기억술사이시니 직업을 이용하시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다른 것을 물으려고 하는데 시스템이 선수를 쳤다.
[띠링! 재각성을 하신 관계로 상태창에 변화가 많습니다. 상태창을 먼저 확인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잠깐만 혹시 나 이외에도 재각성을 한 경우가 있었나?'
[없습니다.]
회귀로 인해서 재각성을 한 것 같은데 재각성자가 존재하지 않다면 나 이외에 회귀자는 없다는 말이었다.
궁금한 것도 너무 많았고,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았지만 시스템 말처럼 우선 내가 가진 것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상태창을 켜고 '백호의 가호'를 생각하자 백호의 가호에 대한 정보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 정보의 내용보다 더 놀라운 일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안녕? 칼에 찔린 곳은 괜찮지?>
"뭐?"
<칼에 찔린 곳 말이야. 미우라 놈에게 찔린 곳 괜찮아?>
지금 내 눈앞에는 하얀 새끼 호랑이 한 마리가 둥둥 떠 있었다.
그것도 적응이 되지 않는데 말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생의 내 죽음까지 알고 있었다.
"너! 너는 뭐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상태창처럼 속으로 말해도 되는데···. 심상으로 말하는 것이 더 편할 거야. 부모님 주무시잖아.>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 너는 뭐지?'
목소리가 너무 커지는 것 같아서 재빨리 심상으로 말했다.
<나? 나는 네게 '백호의 가호'를 내려준 존재. 그 외에는 나도 나를 뭐라고 정의 내리기 어렵네. 아! 너희들이 게임이나 소설에서 말하는 정령과 가장 흡사하겠다. 정령이나 요정은 절대 아니지만 말이야.>
사람이 너무 놀라면 멍해지기도 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아니 두 번째였다.
전생에 갑자기 눈앞에 상태창이 나타났을 때도 딱 이랬던 것 같다.
둥둥 떠 있는 백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내가 아는 네 표정 중에 가장 바보 같은 표정이다.>
백호가 빙그레 웃었다.
<에이. 인심 썼다. 딱 한번만 얘기해줄 테니까 잘 기억해. 아니 직업 때문에 한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지? 너 지금이라면 무슨 시험이든 다 통과할 수 있겠다. 에이! 그럼 뭘 해. 다 쓸모없어지는데.>
<나는 오래전부터 이 땅에서 살았어.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한국에서 벗어날 수 없기도 했지만 벗어나고 싶지도 않았어. 난 이곳이 좋았거든. 오래 살았지만 인간들의 삶에는 개입할 수 없었어.>
<뭘 해보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 나를 보고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 그런데 대변혁이후에 달라졌어.>
<영체로 살던 내게 육체가 생긴 거야. 당연히 내 모습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되었어. 신기했어. 그래서 사람들에게 접근해봤지. 하지만 너도 알잖아. 당시에는 동물에게 관심을 둘 상황이 아니었던 거.>
<그래서 사람들에게 많이 실망했을 때 너를 만났어. 기억하려나? 새끼고양이를 돌봐줬던 거.>
새끼 고양이?
대변혁이 일어나고 각종 몬스터가 던전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반려동물을 버리기 시작했다.
반려동물도 몬스터화 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사실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주인과의 유대가 좋은 반려동물은 절대로 몬스터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대가 좋지 않는 동물은 몬스터화 되어서 주인을 공격하기도 했다.
사실 대변혁초기에는 던전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보다 이런 몬스터화된 동물이 더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버려지는 동물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 동물들을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더구나 그 동물 중에 몬스터로 변했거나 변하는 과정 중에 있는 녀석들을 죽이면 마나통이 채워지기도 하니 동물만 보면 무기를 꺼내드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나는 동물과 몬스터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유 없이 괴롭힘을 당하는 동물들을 보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동물들이 보이면 간혹 도와주곤 했었다.
<너무 많아서 내가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지? 네 그런 마음이 좋았었나봐. 네가 나를 돌봐준 5일은 내가 실체를 가지고 받았던 호의 중 최고였어. 그래서 더 이상 실체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널 따라다녔어. 쭉!>
'쭉 따라다녔다고? 얼마나? 언제부터?'
<대변혁이 일어나고 3년 후에 널 만났으니까 지금으로부터 계산하면 5년 후에 널 처음 만났었네. 처음에는 네 주위에서 맴맴 돌다가 본격적으로 너만 따라 다녔더니 3년이 지나자 네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되더라. 사실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야. 그때부터 네가 죽을 때까지 함께 다녔어. 그런데 너 자야하지 않아? 내일 할 일 많잖아.>
'잠깐 너 설마 내 생각도 읽는 거야?'
마지막 숙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