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마나통은 안녕하십니까?-5화 (5/350)

5. 마지막 숙면

<에이. 왜 이러셔? 같이 회귀했으면서. 물론 읽으려면 읽겠지. 네가 잠그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하지만 생각을 해봐. 널 봐온 세월이 20년이야. 굳이 네 마음을 읽을 필요도 없어. 네 표정에 다 보여.>

'그럼 넌 앞으로도 나와 함께 하는 거야?'

<벗어날 수 없지만 벗어나고 싶지도 않아. 이제는 네가 나인 것 같거든. 너무 오랜 세월을 함께 해서 그런 가봐. 미우라를 비롯한 일본 놈들을 처단해야지. 놈들이 했던 것보다 더 치밀하게 그리고 더 은밀하게.>

백호의 눈이 매섭게 바뀌었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인 거야?'

<너보다 더 할 걸. 아무래도 내 힘은 너와 대한민국의 마나통에 달려있는 것 같으니까. 미우라놈 말을 미루어봤을 때 한국인의 마나통이 많이 팔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힘이 급격하게 상실된 것 같거든.>

<너와 대한민국이 강해지면 잃었던 힘을 되찾게 될 것 같아. 그럼 다시 실체를 가지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내 한 입에 그놈을 집어 삼키고 말 거야.>

백호가 입을 크게 벌려보였다.

눈은 제법 매섭게 뜨고 있었지만 몸집이 작아서 그런지 지금은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우리 일본 놈들 마나통은 물론이고 경제도 모두 장악하자. 군사야 대변혁의 날 다 사라질 것이고, 외교야 우리가 힘이 세면 누가 뭐라고 하겠어? 안 그래?>

'하하하! 하하! 나하고 20년을 함께 다녔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가 보네. 나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회귀한 것을 깨달은 순간 가장 먼저 한 생각이 그거였거든.'

<20년을 함께 했는데 그럼. 아까 부모님을 봤을 때는 눈물 참느라 혼났어. 부모님께서 전생에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면···.>

으드드득!

백호가 이를 앙다물었는지 이가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20년을 함께 다녔다고 하더니 부모님을 자신의 부모님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 조금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하나하나 야금야금 다 씹어 먹을 거야. 골수 하나 남기지 않고 싸그리.>

'그런데 나는 왜 네가 함께 하는 것을 몰랐을까? 지금은 이렇게 보이는데 말이야.'

<내가 본격적으로 널 따라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실체화를 할 수 없을 때였어. 이상하게 네가 편하더라.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자 네게서 벗어날 수 없었고 말이야. 내가 실체를 잃은 뒤에는 아무도 날 보지 못했어. 미우라 그놈마저도 모르더라고.>

'나야 마나통이 그리 크지 않았으니 그럴 수 있지만 세계 최강자라는 미우라마저도 널 보지 못했다고?'

<그래. 아무도 나를 인식하지 못했어. 실체를 경험하기 전에는 당연한 것이었는데 실체를 경험한 이후에는 힘들더라. 네가 아니었으면 난 사라졌을지도 몰라. 네게 묶인 덕분에 그나마 존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거든. 네가······.>

백호는 조금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했다.

오랜 세월 우리나라에서 살았지만 그때는 실체가 없었다고 했다.

요정이나 정령처럼 어디든 갈 수 있었고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았다고 했다.

한때는 자신이 대한민국의 수호신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다른 존재와는 너무 달랐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오랜 세월 다른 생명체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단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어. 전쟁이 많기도 했잖아. 그런데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러니 수호신 같은 것은 아닌 거지. 그러다 대변혁의 날 몸을 가지게 됐어. 드디어 뭔가를 할 수 있게 된 거야. >

백호는 몸을 가지게 순간의 이야기를 했다.

기쁨!

환희!

흥분!

감동!

.

.

.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

<하지만 그 시간은 겨우 3년 남짓이었어. 그래도 그 3년 안에 널 만났으니 그건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지금이라도 네가 나를 이렇게 볼 수 있는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고···. 아까 네게 인사를 하면서도 네가 나를 보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많았거든. 복수를 해야 하는데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백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백호도 나 못지않게 복수를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사실 미우라 에이지가 고마운 면도 있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고맙다니? 때려죽여도 시원찮은 놈이 뭐가 고마워?'

<워! 워!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놈이 칼로 너를 찌르지 않았으면 아무리 내가 옆에 있었어도 회귀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고맙게도 미우라 에이지가 네 마나통과 마나홀을 가르고 심장을 찔렀거든. 아주 정확했지. 흐흐흐!>

'마나홀과 마나통은 어떤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잖아. 그런데 부쉈다고? 놈이 그렇게 강했나?'

<그게 일반적인 상식이지.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는 거. 하지만 부술 수 있는 경우가 있어. 상대의 마나통을 가지고 있으면 부술 수 있대.>

마나홀과 마나통은 어떤 방법으로도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몬스터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에게도 마나홀과 마나통은 남아있었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도 정확하게는 알지 못해. 나도 많은 것을 조사하지는 못했거든. 네게 묶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난 일정범위는 네게서 벗어날 수 있었거든. 그래서 듣게 됐어. 놈이 낄낄거리면서 다른 놈하고 이야기하더라.>

놈이 가둔 지하실에 갇혀 있을 동안 영체인 백호는 어떻게든 나를 구해보겠다고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던 모양이었다.

놈이 나를 가둔 건물로 들어오면 계속해서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마나홀과 마나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놈의 검이 기존의 마나통과 마나홀을 부수는 것과 동시에 바로 옆에 새로운 마나통과 마나홀이 태동한 거야. 그 크기는 먼지보다 작았지만···.>

'그때 새로운 마나홀과 마나통이 생겼다고?'

<맞아. 내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힘을 좀 썼거든. 부술 수 있다는 말을 미리 들었던 것이 신의 한수였지. 네가 칼에 찔려 고통을 느꼈을 때 말이야. 그 고통 중의 일부는 새로운 마나홀과 마나통이 자리 잡으면서 생긴 통증이었을 거야.>

<그리고 그 작지만 온전한 마나통과 마나홀을 확인한 순간 내가 가호를 부여했어. 이렇게 회귀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회귀할 줄 알았으면 이것저것 준비를 더 많이 하는 건데. 아쉬워.>

백호도 자신의 가호가 회귀를 유발하리라는 것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가호를 부여할 수 있었다면 미리 좀 도와주지 그랬어?'

<그러고 싶었지. 하지만 되지 않았어. 처음에는 왜 그랬는지 몰랐는데 시간이 가면서 알게 됐어. 아니 의심했지. 네 마나통도 일반인들처럼 팔린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야. 의심이 확신이 된 건 우연히 어떤 강자의 말을 들었을 때였어.>

백호는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지만 일정 범위는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근처에 강자들이 있을 때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단다.

물론 처음에는 자신이 다시 실체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렇게 다니다 우연히 강자들끼리 하는 은밀한 이야기를 듣게 됐고 그때부터 내 마나통이 팔린 것을 확신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내 마나통을 산 놈을 찾아내기 위해 애를 썼지만 내가 갇힐 때까지 알 수 없었단다.

<각성하자마자 마나홀과 마나통이 1이라고 표시되는 거에 놀랐지? 그거 새로운 마나홀과 마나통이 놈의 검에 부서진 네 기존의 마나홀과 마나통 일부를 흡수했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재각성이라도 수치로 표시될 정도의 마나홀과 마나통을 가질 수는 없지.>

기존의 마나홀과 마나통이 흡수되었다는 말에 걸리는 것들이 있었다.

놈의 지하실에 갇힌 후 놈에게 단 1의 마력도 주기 싫어서 몸을 잠시도 가만두지 않았었다.

빠짝 말린다는 표현이 적당할 만큼 몸을 굴려서 마나를 제로에 가깝게 만들었다.

혹시 마나가 제로에 수렴하지 않았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마나홀과 마나통의 크기가 더 컸을까?

<그런 생각하지 마. 넌 최선을 다했어. 만약 네가 그렇게 몸부림치지 않았다면 놈은 널 평생 지하실에 가두고 배터리로 사용했을 거야. 설마 지하실에 너만 갇혀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 말고도 갇혀 있었던 사람이 있었던 거야?"

부모님이 주무시고 계시기 때문에 심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너무 놀라운 이야기에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목소리 낮춰. 부모님 깨시겠다. 오늘이 마지막 숙면일 수도 있잖아. 푹 주무시도록 해드려야지.>

백호의 말에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랬다.

오늘이 마지막 숙면일 수도 있었다.

각성을 하고 나면 나아지겠지만 각성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 마른세수를 하고는 냉장고에서 물을 하나 꺼내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을 넘어가는데도 답답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아직 냄새가 완전히 빠지지 않았지만 현관문을 닫았다.

조금 전부터 보일러가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오늘 밤이 부모님께는 마지막 숙면일 수도 있었다.

그걸 방해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 숙면일수도 있다는 말은 막연히 복수를 꿈꾸던 청년을 현실로 복귀시키는 마법을 부렸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조금 더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전생과 똑같은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마법 같은 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밖으로 나가 찬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싶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벽에 몸을 기대앉았다.

"후우우우우!"

<그래. 잠시 마나호흡이라도 해. 그래야 마음이 진정될 거야. 부모님은 잘 주무시고 계셔.>

백호가 아무렇지 않게 벽을 넘어 부모님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방금 그건 뭐야?'

<뭐라니? 부모님의 안부를 확인한 거잖아.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까지 늘 하던 일이라 익숙한 일인데? 왜?>

"뭐?"

회귀하기 5년 전 부모님께서는 3일 간격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순간까지도 부모님께서는 가슴통증과 함께 입 냄새를 달고 사셨다.

각성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나통을 떼어낸 사람뿐만 아니라 '숨겨진 세계'라고 불리던 '비세계(秘世界)'에서 일정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각성자가 되지 못했다.

부모님은 그 시험에서 탈락했고 일반인으로 평생을 사셔야했다.

밤낮 시달리던 통증 때문에 날카로울 때가 많아서 나도 대하는 것이 힘들고 버거울 때가 많았다.

그런데 백호가 그런 부모님의 잠자리를 챙겼단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지켜보는 것뿐이었어. 그것도 네가 집에 있을 때만 가능했어. 지켜본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어. 고통을 경감시켜드릴 수도 없었고 고통이 심할 때 네게 알릴 방법도 없었어.>

부모님은 안방에서, 나는 거실에서 생활을 했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때로는 서울과 부산만큼이나 먼 곳이기도 했다.

밤새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말씀을 하시지 않아 아침이 되어서야 발견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었다.

어찌나 고통을 참았는지 이른 나이에 이가 다 빠질 정도였는데···.

그때 생각을 하자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도꼭지를 들어 올린 것 같았다.

지금의 눈물은 조건반사적인 눈물이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 때문인지 그때의 생각만으로도 무조건반사 같은 반응이 일어난 것이었다.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고는 눈물을 닦았지만 그렇다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울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계속해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자 조금 당황스러웠다.

눈에 문제가 생긴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울어. 그거 그동안 네가 울지 못해서 그래. 이를 앙다물고 살아오기만 했잖아. 네 몸 구석구석 켜켜이 쌓인 눈물이 터져 나오는 거야. 그러니 그냥 그대로 둬. 억지로 참으려고 하지 말고.>

'······.'

<흘려버릴 것은 흘려버려야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지.>

인형보다도 더 귀엽게 생긴 백호가 할아버지들이나 할 법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나 하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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