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마나 하나면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흐르던 눈물은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는지 어느 순간 딱 멈추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어서 조금 민망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너와 20년을 함께 했다니까. 내가 모르는 너는 없어. 헤헤헤!>
백호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어? 의외로 담담하네? 난리를 칠 줄 알았더니···?>
'어쩌겠어. 난리를 쳐봤자 지금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네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려니 해야지. 네게 고마운 것도 많고. 사실 업고 다녀야 할 판국에 난리는 무슨.'
<아주 좋은 자세야. 아주 마음에 들어. 역시 넌 내가 집사로 선택할 만했어. 헤헤.>
'너 백호 아니었어?'
<나 백호 맞아. 딱 봐도 백호잖아. 호랑이는 집사 좀 두면 안 되나? 고양이만 집사를 두라는 법 있어? 그리고 이 몸이 이렇게 귀여우니 집사를 둘만 하잖아? 이 몸의 품위유지를 위해서 말이야.>
백호가 귀여운 몸짓을 했다.
나름 심각한 상황인데도 홀랑 넘어갈 만큼 앙증맞은 모습이었다.
백호의 재주는 계속 되었다.
영체 상태이기 때문인지 몸이 새털처럼 가벼운 것 같았다.
온갖 포즈를 다 취하며 애교를 부렸다.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애교를 다 방출하기로 작정을 했는지 한참을 귀여운 행동을 하더니 바닥에 축 늘어졌다.
<그래. 그렇게 웃어. 전생에 말이야. 널 이렇게 웃게 해주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어떻게 해도 네가 날 보지 못하더라. 이제 네가 날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동안 쌓아놨던 거 다 해줄게. 헤헤.>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밀려왔다.
백호도 외로웠겠지만 전생의 나도 백호 못지않게 외로웠었다.
그저 그런 각성자로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사기와 배신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었고, 믿었다가 배신을 당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백호라면?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말이야. 이런 반려동물 찾기 쉽지 않다. 먹이를 챙겨줄 필요도 없지.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도 않지. 어디 달아날 염려도 없는데다 시끄럽게 울어대지도 않지. 얼마나 좋아. 단지 약간의 마나만···.>
마나얘기를 하면서 내 눈치를 봤다.
'내 마나의 일부가 필요한 거야?'
<맞아. 그게 전생에 늘 미안하더라. 그래도 20년간 얻어 쓴 대가로 회귀를 시켜줬으니 집사는 남는 장사한 거야.>
남는 장사 정도가 아니라 대박 장사를 한 것이었다.
더구나 전생에 백호가 대변혁 3년 후쯤부터 따라다녔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쯤에 마나의 변화를 느낀 적은 없었다.
각성자들은 마나홀과 마나통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에 이상한 것을 눈치 챘다면 기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간간이 들던 탈력감 이외에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
탈력감은 미우라 놈이 마나를 바닥까지 사용해서 그런 것이었고 상시적으로 빼앗긴다는 느낌은 없었던 것이다.
<내가 네 마나를 얻어 쓴다고 표현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네 마나를 사용하지는 않아. 단지 네 마나가 미치는 범위 내에 있어야 안정감이 든다는 것이 문제지. 네 마나의 영향권 밖으로는 벗어날 수 없었어. 그래서 네 마나를 얻어 쓴다고 말한 거야.>
'그럼 쓴 것도 아니네 뭐.'
<그렇다고 아주 안 쓴 것도 아니기는 해.>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야?'
<쓰지 않지만 안 썼다고 말하기도 뭐해서 그래. 대변혁이후 사람들은 마나를 가졌어. 그런데 그 마나는 마나통에서 조금씩 흘러나와서 사라져. 그건 알지?>
'그렇지. 스킬을 사용할 때도 줄어들잖아.'
<그래. 그런데 나는 그 마나를 먹었어. 그것도 네 마나만. 네 몸에서 흘러 나와서 공기 중으로 흩어지려고 하는 마나만 내가 먹는 거지.>
'그럼. 미안할 것도 없어. 네가 먹는 만큼 마나의 기척이나 향기도 사라지잖아. 그것만으로도 감사하지.'
사용하기에 따라서 기척을 없애는데 오히려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 네가 성장을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니까 그 마나들도 아깝더라고. 내가 흡수하지 않으면 네 성장에 도움이 될까 하고 말이야.>
'그건 어떤 방식으로도 잡히지 않아. 그저 공기 중으로 사라질 뿐이지. 알잖아? 20년이 넘게 연구했지만 늘 결과는 같았어. 그런데 마나를 쓴다는 걸 보니 너도 능력이 있는 거야?'
사실 별 의미 없이 한 말이었다.
백호가 워낙 조심스러워서 해서 분위기 전환용으로 한 이야기였는데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대답하는 백호였다.
<당연하지. 실체를 갖기 전부터 몇몇의 능력이 있었어. 능력도 능력이지만 난 잠을 잘 필요가 없으니 24시간 경계를 서줄 수도 있고, 내가 기억하는 네 전생을 얘기해 줄 수도 있지. 물론 네가 모르는 네 주변 이야기도 해줄 수 있어.>
'대단하네.'
<이게 끝이 아니야. 네가 강해지면 내 능력도 늘어날 거야. 아! 지금은 필요 없지만 던전에 들어가게 되면 전리품 수거도 해줄 수 있어. 물론 지금은 너에게서 3미터 이상 벗어나지 못해서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둥둥 떠서 움직이는 백호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네 이름은 뭐야?'
이름도 묻지 않은 것이 미안해서 물었다.
<나야 네가 뭐라고 부르던 크게 상관없어. 그런데 네 옆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호'자로 끝나는 이름이면 좋겠어. 성호? 내가 실체화 할 수 있을 때 다 자란 호랑이라면 앞발로 미우라 에이지의 머리통을 후려칠 거야.>
공중에서 앞발을 휘두르며 말하는 백호였다.
<가만! 강호도 좋아. 강한 호랑이. 아무도 우리나라를 건들지 못하게 할 거야. 아니지 네 이름이 대한이니까 대호도 좋겠다. 어차피 너와 함께 생활할 건데 형제 같은 느낌! 좋잖아?>
'성호도 좋고, 강호도 좋고, 대호도 좋은데?'
<에이. 그게 뭐야? 결정 장애 같잖아? 내 이름이니까 그럼 내가 선택할게. 에이 나는 그냥 '나비'로 할래. 내가 고양이로 다닐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불러주던 이름이 나비였어. 왜 고양이를 나비로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야.>
'백호인데 나비로 불리겠다고?'
<친숙하잖아. 그리고 가장 처음 불린 이름이기도 하고.>
'아무리 그래도 나비는 아닌 것 같아. '나비 호랑이' 줄여서 '나호' 어때?'
<나비 호랑이? 나쁘지 않아. 아니 썩 마음에 들어. 지금부터 내 이름은 나비 호랑이 나호야!>
나호가 씩 웃어보였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워 보였다.
이제 내게는 세상 누구도 볼 수 없는 친구가 생겼다.
백호의 이름을 지어주고 난 후에는 빠르게 상태창을 확인했다.
직업인 '기억술사'는 말 그대로 기억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마나만 지불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권능 기억과 마나는 각 권능에 대한 이해도 상승과 관련 상점창 오픈, 그리고 권능에 관한 아이템, 스킬석 등의 획득률이 두 배 상승하는 것이었다.
상태창을 확인하다가 '최초 각성' 보상을 확인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재각성 보상으로는 직업을 받았고, 이 직업으로 인해 권능을 얻고, 다시 권능으로 인해 인벤토리와 인벤토리 할인까지 받게 되었다.
재각성 보상이 이 정도라면 최초 각성 보상도 상당할 것이 분명했다.
기대감을 가지고 최초 각성 보상을 터치했다.
[띠링! 먼저 인류 최초로 각성한 강대한님께는 마나홀과 마나통에 대한 정보을 열람하실 수 있는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이 권한은 강대한님께서 성장할수록 함께 성장합니다.]
이 말은 지금 당장은 모든 정보를 열람할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대변혁이 일어나고 나서 23년간 가지고 있었던 마나홀과 마나통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통증을 느끼면서부터 가지게 되었으니 25년 동안이나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나홀과 마나통에 관한 것은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마찬가지였다.
<왜 나를 봐? 마나홀과 마나통 때문에 그래? 나도 많이 알지는 못해. 너를 만나기 전에는 실체화된 내 자신이 너무 좋아서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고, 너를 만난 후에는 너를 따라다니느라 다른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
<안타깝게도 네 마나통 산 놈은 찾아보려고 노력했는데 실패했지. 네게서 벗어나는데 한계가 있었거든. 죽기직전에라도 알았으니 이제 복수하러 가야지. 미우라 그놈은 두 번 죽여야 해. 널 죽인 죄로 한 번. 마나통을 탈취한 죄로 한 번!>
나호가 이를 갈며 말했다.
죽기 직전에야 마나통이 팔렸다는 것을 알았는데 나호는 미리부터 알고 있었으니 많이 답답했을 것이다.
마나통은 일반인, 그것도 재수 없는 경우에만 팔린다고 생각했다.
사실 마나통이 팔린 사람도 고통을 느껴서 그렇지 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알고 있는 마나홀과 마나통에 대한 정보는 상당부분 잘못되어 있거나 감추어진 것이 많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최초 각성 보상으로 마나홀과 마나통에 관한 정보가 나올 리가 없었다.
[띠링! 강대한님께서 열람하실 수 있는 마나홀과 마나통에 관한 정보가 있습니다. 지금 열람하시겠습니까?]
바로 열람해야 했다.
정확하게 알아야 제대로 된 계획을 수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열람하겠어."
[갑자기 얻게 되는 많은 정보로 인하여 신체에 무리가 올 수 있습니다. 이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메시지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머릿속으로 정보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으으으으윽!"
마나홀과 마나통에 대한 정보였다.
각성할 때 느끼는 고통만큼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 고통이 끝났을 때 잠시 멍하니 앉아있었다.
밀려들어온 정보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시의 시간이 지난 뒤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25년을 품고 있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마나홀과 마나통은 우리가 아는 것 이상이었다.
인류의 대부분은 마나홀과 마나통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고 잘못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
<왜? 마나홀과 마나통이 기존에 알던 것과 많이 달라? 전생에 내가 조사를 해보려고 해도 한계가 있던데.>
'많이 다르네. 아니 똑같다고 해야 하나?'
<그게 무슨 말이야?>
'마나 하나면 다 통하는 세상이었잖아.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까지 마나면 다 살 수 있었네. 마나홀은 살 수 없지만 마나통은 각성자의 것도 살 수 있었어. 넉넉한 마나만 주면 말이야.'
놈의 말대로였다.
마나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이었다.
<이런 정보가 미리 알려졌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뭘 해. 히든 상점을 열어야 하는데···. 히든 상점을 열만한 마나는 웬만한 각성자는 엄두도 내지 못해. 알잖아.'
<그렇게 비싸?>
'이건 비싸다고 표현 정도를 넘어서. 그리고 일부 히든 상점은 비세계에서만 열 수 있는 것도 있어. 그러니 우리 같은 각성자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거지. 비세계를 온전하게 기억하지 못하니까 말이야.'
<비세계라면 그럴 만하네. 하지만 이제 집사는 기억술사니까 양 세계를 모두 기억할 수 있잖아. 이미 열린 상점도 몇 있고. 이건 엄청난 이점을 가지고 출발하는 거야. 힘내! 그놈 때려죽일 때까지는 아프지도 마.>
'그럴 거야. 그놈뿐만 아니라 일본을 손아귀에 넣고 말거야. 이걸 이용해서 모두 씹어 먹어야지.'
권능 기억과 마나를 얻자 히든 상점 중에서 기억과 마나에 관한 상점이 개방되었다.
이미 두 개의 상점, 그것도 히든상점이 열렸으니 엄청난 것이기는 했다.
"혹시 다른 보상도 남았어?"
[띠링! 최초 각성 보상으로 두 가지가 더 남아 있습니다. 강대한님께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 보상을 지급하여 드릴 수도 있고, 저희가 제시한 다섯 가지 중에서 강대한님께서 직접 두 가지를 선택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고민이 되었다.
시스템은 나보다는 나를 더 잘 알 것이다.
하지만 과연 내가 하고자 하는 복수까지 감안해서 보상을 지급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나호도 고민에 빠져 있었다.
'혹시 보상내용을 미리 알 수 있을까?'
마나의 눈과 유일 스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