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아침 밥상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줄여줄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은 없어?'
밥을 짓고 반찬을 준비하다보니 의도치 않게 잡음이 생겼다.
작은 집이라 부모님께서 깨실 것 같았다.
<집사! 지금 나에게 말한 거지?>
'그럼 내가 너에게 말하지. 누구에게 말하겠어? 심상으로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존재가 너 말고 또 있어?'
<시스템이 있잖아. 시스템!>
'시스템이 있기는 하지. 하지만 시스템이 이런 것 하나하나까지 대답해주겠어? 그리고 이유 없이 능력을 주지는 않잖아.'
<혹시 모르지. 특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생겼으니까 말이야.>
'전생에 나를 따라다닐 때는 상태창을 보지 못했던 거야?'
<어떻게 알았어? 전생에는 네 상태창은 물론이고 시스템의 메시지도 난 들을 수 없었어. 그런데 네가 회귀한 순간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더니 실제로 되더라고.>
'그래서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특별 서비스라고 해도 모든 것을 해줄 리는 없어. 시스템이 얼마나 냉정한데···. 아무리 위급한 상황에서도 마나가 없으면 그 어떤 것도 해주지 않았던 것이 시스템이야. 그러니 너무 많은 기대는 하지 마.'
<그런 거였어? 전생에 그런 말을 듣기는 했지만 집사가 각성할 때 워낙 친절해서 과장된 말인 줄 알았지.>
달그락 달그락!
냉장고에 있던 애호박을 썰어 가볍게 밀가루를 바르고 계란 옷을 입혔다.
그리고는 살짝 달궈진 프라이팬에 올렸다.
치이이익! 치이익!
프라이팬에서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대변혁이 일어나고 나면 한동안 먹을 수 없는 음식 중의 하나였다.
앞으로 2년이나 남은 일이지만 나에게는 바로 앞에 닥친 일처럼 느껴졌다.
<부모님께서 특히 좋아하는 음식이잖아. 애호박.>
'싸고 맛있고 쉽게 할 수 있는 음식이기도 하지.'
<대변혁 이후에는 한동안 구경할 수도 없잖아. 그때는······.>
영체 상태여서 열기를 전혀 느끼지 않는지 프라이팬 바로 옆에 앉아 재잘거리는 나호였다.
'털 날려.'
영체 상태이면서도 털을 고르고 있는 나호를 보자 정말 털이 날릴 것만 같아서 한 말이었다.
<하하하하! 하하! 우리 집사. 정말 사랑스럽다. 전생에도 좋았지만 더 좋아지려고 해. 나중에 실체를 갖게 되면 조심할게. 그런데 지금은 걱정하지 마. 털 날릴 일은 없으니까. 열기도 느껴지지 않는데 뭘.>
말과 동시에 프라이팬 위로 올라가는 나호였다.
'야!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 드실 음식인데!'
<아! 미안!>
냉큼 프라이팬에서 내려오더니 사랑스러운 포즈를 취하는 것으로 봐서 나호도 자신의 행동이 과했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어젯밤에 상이 엎어지지 않았다면 어제 엄마가 준비한 음식이 상당량 남아있었겠지만 엎어지는 바람에 남은 반찬이 많지 않았다.
호박전을 부치면서 작은 냄비에 된장국을 올렸다.
썰어 넣을 것이라고는 호박밖에 없었지만 살림 경력 20년의 노하우는 어디 가는 것이 아니었다.
된장국에 고추장을 약간 풀어 감칠맛을 더했다.
청양 고추나 양파가 있었으면 넣었겠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물 조절을 잘 하면 제법 맛있는 된장국이 완성될 수 있었다.
'된장, 고추장도 미리 많이 담가두어야겠다.'
<담그려면 힘들어. 그냥 사야지.>
'아무튼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대변혁이후에 귀해지는 물품 목록도 뽑아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장은 산다고 해도 보관할 장소도 없지만 말이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최대한 소리를 죽여 가며 밥상을 차리고 있는데 안방 문이 열리면서 엄마가 나오셨다.
"벌써 일어난 거야? 우리 아들 밥 준비하고 있었어? 재료도 없는데···."
엄마 얼굴에 미안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은 가슴통증이 다시 시작되지는 않은 어머니였다.
당연하게 입 냄새도 나지 않았다.
각성을 한다면 지금부터 2년 동안만 고통을 느끼면 되지만 각성을 하지 못한다면 평생 안고 가야 하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이 시작될 시간이 한 시간 남짓 남은 상태였다.
"제가 차릴게요. 엄마 하시고 싶은 일 하세요."
"우리 아들 제대하더니 철들었네. 사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미안하기도 하고···."
"엄마 아빠가 미안할 일은 아니죠."
"큰아버지도 일부러 일을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니야."
"알고 있어요. 엄마."
전생에 이 시기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정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네가 이해해주니 고맙다. 말년 휴가 때 그렇게 복귀하고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거든. 더구나 네가 복귀하고 그런 일이 터져서 어찌나 가슴을 졸였는지···."
아버지와 싸우고 복귀를 했으니 마음이 편치 않으셨을 텐데 하필 복귀한 날 부대에서 총기사고가 나는 바람에 제대까지 보름 미뤄졌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말년휴가 때에 비해 해쓱해진 두 분의 얼굴이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전생에는 이런 것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나도 어지간히 철이 들지 않았었다.
전생에는 이런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고사하고 차라리 제대가 미뤄진 것이 반가웠었다.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 복귀한 상태라 아버지를 보기 껄끄러웠고 무엇보다 곰팡이 냄새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싫어서 제대가 잠정 보류됐을 때 신이 나를 위한 안배를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총기사고로 부대는 물론이고 대한민국이 들썩이고 있었지만 내겐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갑자기 변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부대에서 그런 일을 겪어서 그런지 집이 망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그러니 엄마도 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부대에서 겪은 일 때문이 아니라 전생에서 숱한 일을 경험했기 때문이지만 굳이 그런 것까지 말씀드릴 필요는 없었다.
"고마워. 아들. 그럼 오늘은 우리 아들 덕에 여유롭게 출근준비를 해볼까?"
엄마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시며 욕실로 들어가셨다.
<에궁! 해 뜨려면 한 시간 정도 남았나?>
나호가 엄마가 들어가신 욕실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이 나는 거실에 밥상을 펴고 밥을 차리기 시작했다.
고통 없이 드실 마지막 아침 식사일 수도 있기 때문에 없는 반찬이지만 최대한 정성을 들여서 밥상을 차렸다.
욕실에서 나오신 엄마가 차려진 밥상을 보시고는 놀라는 사이 아버지께서 후다닥 씻고 나오셨다.
부모님께서 앉으시자 뜨끈한 된장국을 내려놓는 것으로 아침 밥상이 완성되었다.
"고맙게 먹으마."
아직도 아버지께서는 내 눈치를 살짝 보셨다.
여리고 예민한 성격인 아버지는 상황이 나아지기 전까지는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쉽게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실 것이다.
"예. 맛있게 드세요. 지하철로 출근하시죠?"
"지하철이 편하지. 그런데 그건 왜?"
"당분간 지하철만 이용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걸으실 때도 차도 가까이로는 걷지 마시고요."
"왜? 어제 일 때문에?"
"예. 또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 TV에서는 계속 어젯밤의 일이 방송되고 있을 것이다.
인터넷도 그 문제로 밤새 시끄러웠을 것이고···.
"괜찮아. 아버지 아직 팔팔하다. 걷다가 쓰러질 일은 없어."
"엄마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제는 멀쩡한데 뭘. 우리 아들이나 조심해. 우리야 나이가 있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네가 걱정이지. 병원에라도 가볼래?"
"저는 괜찮아요. 이제 아프지도 않는걸요. 스트레스 때문에 일시적이었을 거예요."
"부대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니 멀쩡하면 그것이 더 이상하지. 자. 이거 용돈."
어머니께서 제법 두툼해 보이는 봉투를 하나 건네셨다.
"엄마. 저 부대에서 받은 돈 제법 있어요. 그거 쓸게요."
"그 돈은 그 돈이고. 이거 받아. 그래야 엄마 아빠 마음이 편해."
<집사. 냉큼 챙겨. 지금부터 움직이려면 다 돈이야.>
나호가 엄마가 건넨 봉투에 발을 들이대며 말했다.
하지만 나호의 발은 봉투를 통과해 버렸다.
<에잉! 이래서 빨리 실체를 가져야 하는데···. 그럼 이 맛난 음식도 맛볼 수 있을 텐데.>
나호가 밥상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럼 이번만 받을게요."
"이번만이 아니라 언제든 말해. 상황이 이렇게 됐지만 우리는 네 부모야. 알지?"
"네."
부모님은 항상 날 도울 준비가 되어있었다.
단지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을 뿐이지···.
아버지의 젓가락이 부지런히 애호박부침개를 나르고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고 계셨지만 아침 밥상이 상당히 만족스러우신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고 아직 해도 뜨지 않았지만 부모님은 출근 준비를 하셨다.
아버지는 서울 시청에, 어머니는 서울 시청 인근의 중소기업에 근무하셨다.
망하기 전에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강남에 살았기 때문에 자동차로 30분이면 출근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급하게 싼 집을 찾느라 의정부 녹양역 인근에 살고 있었다.
지하철을 갈아타지 않아도 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부모님 직장까지는 한 시간 십 분 정도 걸렸기 때문에 지금 나서야 했다.
아마 지하철을 타고 가시는 도중 가슴 통증과 함께 입 냄새가 시작될 것이다.
해 뜨는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 일곱 시 사오십 분쯤에는 뜰 것이다.
"이거 하나씩 가지고 가세요."
텀블러를 하나씩 안겨드렸다.
"이게 뭐니?"
"날이 추워서 생강차 좀 끓였어요."
엄마는 매년 생강차를 담갔다.
어릴 적 감기를 달고 살았던 나 때문에 담그기 시작했던 것이 이제 우리 집의 전통 같은 것이 되었다.
이곳으로 옮겨오면서도 챙겨 오셨는지 싱크대 아래에 큰 유리 항아리에 담겨 있어서 끓인 것이었다.
생강차를 드신다고 가슴 통증과 입 냄새가 가시는 것은 아니지만 마실 때만이라도 잠시 위안은 되실 것이다.
"어머어머! 엄마 감동 먹으려고 하네. 아들! 고마워. 그럼 엄마 다녀올게. 오늘 나갈 거지? 늦을 것 같으면 전화하고···."
"밥 해둘게요. 어제 제대로 못한 저녁 함께 해요."
엄마가 건넨 봉투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
"그래. 엄마도 퇴근하면 바로 날아올게."
"고맙다. 잘 마시마. 저녁에 보자."
두 분께서 얼굴에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출근을 하셨다.
<사고 때문에 그러지?>
"아무래도 일주일 동안이 가장 위험하잖아."
<그렇긴 하네. 한국은 일주일, 전 세계적으로 세 달 동안 별별 사고가 다 났었지.>
처음 가슴에 마나홀과 마나통이 들어설 때의 통증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한 고통을 유발한다.
오늘 해가 뜨면서부터는 빠르게 이런 통증을 느끼는 사람이 확산되는데 그러면서 온갖 사고가 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거리에 돌아다니는 자동차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럴 때는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전생에 지하철도 문제가 됐던 것 같은데? 이 시기에 지하철도 일이 있지 않았어? 기억이 나질 않네?>
"기억이 나지 않으면 확인을 해보면 되지. 내 직업이 뭐야? 기억술사잖아."
<하하하! 별 쓸모가 없어 보이는 직업인데 알고 보니 엄청난 직업이네. 전생에 관한 모든 일이 다 기록되어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주인이 보고 들은 것만 저장 된 것이 아쉽다.>
"거기까지 바라면 도둑놈이지.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잘 활용해도 엄청난 거야."
<그렇기는 하지. 어서 확인해봐.>
나호가 재촉을 하고 있었지만 전생에 이 시기에 부모님께서 타고 다니시는 구간 안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그 구간에서 문제가 있었다면 내가 기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권능 기억을 통해 확인을 했다.
[2028년 1월 6일 오전 7시 40분부터 일주일 동안의 지하철 사고입니다. 먼저 1월 6일 오전 10시 지하철 4호선······.]
전생에 내가 보거나 들었던 지하철 사고에 관한 것들이 나열되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의 일인데도 크고 작은 사고가 많기도 했다.
<다행히 없네. 그런데 지금 뭐하는 거야?>
"준비하는 거야. 사고를 막고 폭탄을 던질 준비 말이야."
민간 화장장(民間 火葬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