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조력자
"좋은 것 같네요."
"그렇지? 나도 이렇게 좋은 환경이 제공되는 것은 처음 봤다니까. 국제교류와 인재양성 차원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하더구나. 사회 환원차원에서 만들었다고 하던데 이런 생각을 가진 회사라면 믿을 수 있지. 너도 들어봤을 거야. 화출판(花出版)이라고···. 일본에서는 유명한 출판사지. 요즘은 종이 출판이 많이 사장되었지만······."
갈 의향이 있다고 대답하자 조카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하신 큰아버지께서는 높아진 목소리로 친구에게 들은 내용과 본인이 조사하신 내용을 열심히 설명하셨다.
하지만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조사를 하셨으니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질 리 없었다.
하긴 큰아버지께서 화(花)출판 주식회사의 자회사 중 하나가 화장(花葬)주식회사고, 화장주식회사 산하에 수많은 화장장(火葬場)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겠는가.
설혹 아셨다고 하더라도 나를 화장장으로 보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셨을 것이다.
사업차 일본을 자주 오가셨지만 우리나라와 달리 민간이 장례식장과 화장장을 함께 운영한다는 것은 모르셨을 큰아버지셨다.
나도 일본에 가기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내가 간 곳은 화장주식회사가 됴쿄에 가지고 있는 장례식장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으로 화장 주식회사의 사장 아들이 총괄을 맡고 있는 곳이었다.
총괄을 맡고 있는 사장 아들이 바로 미우라에이지였고 말이다.
"일본어도 굳이 학원을 다니지 않도록 회사에서 교육 프로그램도 제공해주고 언어관련 시험을 보게 되면 일본어가 아니라고 해도 지원을 해준다고 하더구나. 정말 괜찮은 조건이지? 어? 어! 으으으으으어어어억! 으어어억!"
열심히 설명을 하시던 큰아버지께서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으시며 비명을 지르셨다.
"으어어억! 으억!"
갑작스러운 통증에 중심을 잃은 큰아버지께서 옆으로 쓰러지셨다.
"으아아악! 으어어어억!"
큰아버지께서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아보려고 애를 쓰셨지만 참아지는 고통이 아니었다.
불로 달군 송곳으로 심장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지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큰아버지. 이것 좀 드셔보세요."
큰아버지를 부축하며 집에서 끓여 온 뜨거운 물을 드시지 좋게 입에 가져다 대었다.
"천천히, 최대한 천천히 드셔보세요."
"으으으으아아아악!"
천천히 물을 드시면 통증이 많이 줄어들 텐데 큰아버지께서는 물을 삼키지 못하셨다.
통증이 너무 강해서 물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큰아버지의 머리를 붙잡고 입에 물병을 가져다 댄 후 천천히 물병을 기울였다.
"쁘으으으! 으으쁘으으!"
반은 다시 흘러나왔지만 반은 식도를 통해 내려갔다.
뜨겁다 느낄 정도의 물이 넘어가고 나자 어느 정도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큰아버지. 최대한 천천히 드세요."
"으으으으! 가슴이 으으으!"
큰아버지께서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순간부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큰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가슴 통증을 느낀 사람이 있다는 말이었다.
빠아아아아아앙! 쿠우우웅! 콰아아앙!
삐삐삐삐이이이! 빠아앙! 콰광! 쾅! 쿵! 쿵! 쿵!
운전 중에 첫 가슴 통증을 느낀 사람이 여럿 있었던 모양이었다.
지금 쯤 부모님께서도 가슴 통증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셨을 것이다.
아무리 해도 지워지지 않는 입 냄새도 나기 시작했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첫 통증에 비하면 묵직하다고 느낄 정도의 아픔일 것이다.
첫 통증을 느끼고 열 시간에서 열두 시간 정도의 잠복기를 거치고 나면 다시 통증이 시작되는데 이 통증은 참을만한 통증이었다.
하지만 이 통증과 입 냄새는 날마다 조금씩 강도를 더해가서 5일째 되는 날 정점에 이르게 되고 정점에 이른 통증과 입 냄새는 그대로 유지된다.
정점에 이른 통증의 정도는 개인마다 조금씩 다른데 마나홀과 마나통의 크기가 크고 몸에 쌓인 노폐물이 많을수록 강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각성을 하게 되면 2년 만에 끝나게 될 고통이지만 각성을 하지 못하면 평생 안고가야 할 고통이었다.
"후우우우우! 후우우우! 이제 좀 살만 하구나. 고맙다. 대한아."
"잠시 누우세요. 큰아버지."
"그래. 고맙다. 고마워."
순간 큰아버지의 코끝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큰아버지께서는 모르시지만 방금 큰아버지의 운명은 바뀌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큰아버지를 찾아온 이유가 있었다.
전생의 오늘, 해가 뜨고 얼마 후 처음으로 통증을 느끼는 사람 중에는 큰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큰아버지께서는 가슴 통증을 느낄 때 하필 고시원의 공동취사실에 계셨고, 가슴 통증을 느낀 순간 넘어지시면서 벽에 걸린 거울에 부딪치셨다.
얼마 전부터 불안하던 거울이 충격에 와르르 쏟아져 내리면서 그대로 큰아버지의 어깨를 베어버린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가슴 통증과 함께 어깨통증까지 느끼신 큰아버지께서는 뭐라도 잡기 위해 손을 뻗다가 뭔가를 잡으면서 넘어졌는데 하필 손에 잡힌 것이 라면을 끓이기 위해 물을 끓이던 냄비자루였다.
넘어진 큰아버지 위로 펄펄 끓던 냄비의 물이 그대로 쏟아졌고 그 물은 큰아버지의 어깨와 목, 얼굴을 강타했다.
유리에 베이고 끓는 물을 뒤집어 쓴 채 넘어진 큰아버지는 그 상태에서 15분의 가슴 통증을 견디셔야 했다.
심각한 세 가지 고통에 휴대폰을 찾을 수도 없었고, 15분이 지나고 119에 전화를 했을 때는 계속해서 통화중이었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연결이 되지 않자 큰아버지께서는 그 몸을 이끌고 1층까지 내려오셔야 했다.
도로는 이미 여기저기서 난 교통사고로 엉망이어서 119에 연락이 됐다고 해도 바로 올 수 없었을 것이다.
큰아버지께서 엉망인 몸을 이끌고 도로로 나오자 사람들이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겨주었지만 어깨를 비롯한 목과 얼굴 한쪽은 이미 엉망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깨진 거울이 목 쪽으로 1센티미터만 더 들어왔어도 과다출혈로 생명을 잃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큰 사고에서 그만한 것이 다행이라고 했지만 큰아버지는 이후로 왼쪽 팔을 아예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왼쪽 팔뿐만 아니라 왼쪽 어깨 밑에서 가슴까지 한때 감각을 느끼지 못했었다.
나중에 몸통의 감각은 돌아왔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왼쪽 몸통의 감각은 둔하고 이질적이라고 하셨다.
그런 몸을 가지고도 각성을 하시고 쾌속 쾌검으로 나를 도와주셨던 분이 큰아버지셨다.
큰아버지의 왼팔이 눈에 들어왔다.
전생에는 오늘 이후에는 달려있기만 할 뿐 힘을 쓰지 못하던 팔이었는데 지금은 멀쩡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큰아버지는 앞으로 내가 일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분이다.
전생에도 나에게 큰 힘이 되어주셨고 무엇보다 믿을 수 있었다.
조만간 일본으로 가야 하는 나를 대신해서 한국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해주실 수도 있는 분이었다.
이런 저런 사정을 떠나서 큰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도 오늘의 사고는 꼭 막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운명을 비틀었다.
회귀한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의 운명에 손을 대는 순간이었다.
"불 꺼드릴게요. 잠깐 쉬세요."
"괜찮아."
큰아버지께서 괜찮다고 해도 방의 불을 껐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구급차소리도 나고 제법 큰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큰아버지의 방은 서로의 숨소리가 크게 들린 정도로 조용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구나. 다 잘되고 있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아.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방의 불이 꺼지자 이야기를 꺼내기 수월했는지 큰아버지께서 착잡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시고 우선은 쉬세요."
"일해야지. 뭐라도 찾아봐야 유진이 등록금도 보내줄 수 있고···. 박사과정에 입학했대. 등록금과 연구비가 필요하다고 하던데···."
"큰아버지."
"······."
사실 오늘 큰아버지를 보러온 것은 사고에서 큰아버지를 구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큰아버지께 폭탄을 투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막상 큰아버지를 보니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슴 통증의 여파와 그간 마음고생으로 지치셨는지 큰아버지께서는 이내 잠이 드셨다.
불 꺼진 어두운 방에서 잠이 든 큰아버지를 보자 전생에 큰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도 저리 편안한 얼굴로 가셨었다.
나대신 공격을 받고 이제야 할 일을 다 한 것 같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눈을 감던 큰아버지.
화인(火印)처럼 남은 그때의 기억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집사! 슬퍼?>
'마음이 좋지는 않지.'
<그래도 지금은 살아계시잖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큰아버지 죽인 놈들도 찾아서 복수할 수 있고···.>
대변혁이 일어나고 10년 째 되던 해 큰아버지와 내가 속한 길드가 공격을 받았고 그때 길드장을 비롯해서 수많은 길드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중에는 큰아버지도 끼어있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대여섯 명.
그것도 한동안 활동을 하지 못할 정도로 치명상을 당한 상태였다.
자연스럽게 길드는 와해됐고 다시는 길드에 속하지 않고 떠돌았었다.
<찾을 수 있을 거야. 대강은 짐작하고 있잖아.>
으드득! 으득!
큰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이 떠오르자 감정을 주체하기 쉽지 않았다.
함께 죽어간 길드장과 길드원들의 얼굴도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길드가 와해되고 한동안 복수를 꿈꾸었지만 길드를 습격한 놈들의 정체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정체를 알았다고 해도 내 실력으로 복수는 꿈도 꾸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핑계 같지만 상황이 복수만을 쫓을 수 없게 만들기도 했었다.
큰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는 큰아버지와 함께 부모님의 약값과 병원비를 감당했는데 큰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자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그때부터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었다.
잠까지 줄여가며 움직여야 겨우 두 분의 약값과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당시의 일들을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다.
떠올리는 것조차 힘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주르르!
전생에 부모님께서 겪었던 고통을 떠올렸을 때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내 안에 버튼이 있는 것 같았다.
특정 기억에 닿으면 눌러지면서 눈물이 흘러내리게 하는 버튼 말이다.
눈물이 의지를 벗어나 흘러내렸다.
그런 나의 눈물을 나호가 닦아 주었다.
물론 나호의 발은 내 얼굴에 닿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도 그때 함께 있어서 누구보다 잘 알아. 지금 집사의 감정이 어떨지 말이야. 그런데 집사! 그때는 찾지 못했지만 이제는 찾을 수 있을지 몰라. 그때 길드에 쳐들어와서 떠들었던 놈들의 목소리, 생김새 다 기억되어 있잖아. 권능을 이용하면······.>
나호가 열심히 재잘거렸다.
'목소리도 변조 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우리만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었잖아. 비슷한 일들을 겪은 길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백방으로 알아봤는데 정보가 어느 선에서 끊긴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거지.'
지금 생각하면 우리나라 각성자들의 성장세를 경계한 강대국들의 수작질이 아니었을까 싶다.
거기에 동조한 매국노 같은 놈들도 있었을 것이고 말이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주무시도록 비켜드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큰아버지께 폭탄을 투하할 생각으로 왔는데 말이 나오지 않더라. 그런데 돌아가시던 모습을 생각하니 역시 투하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하루라도 빨리 떨쳐내야 새 삶을 사실 수 있을 테니까.'
<큰아버지께 폭탄을 투하한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큰아버지께 폭탄을 투하한다고? 집은 망하게 했지만 큰아버지가 집사에게 어떻게 했는데 폭탄을 던지겠다는 거야? 집사! 다시 생······.>
나호는 의외로 말이 많은 녀석 같았다.
저렇게 말이 많은 녀석이 평생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못하고 살았으니 얼마나 답답했을지···.
앞에서 온몸으로 시위를 하는 나호를 무시하고 큰아버지의 핸드폰을 들었다.
<그것으로 뭘 하려고? 핸드폰 폭발시키려고? 한때 폐 핸드폰을 폭탄처럼 이용했던 그 테러 흉내 내려고?>
나호가 나를 말리기 위해 몸부림을 했지만 나호의 발은 핸드폰을 통과할 뿐이었다.
'기다려봐. 네가 모르는 일이 있어.'
큰아버지의 육체를 구했으니 이제 정신적인 고름을 짜낼 생각이다.
전생에는 너덜너덜한 몸과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정신으로도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셨던 분이 큰아버지셨다.
큰아버지께서 멀쩡한 몸과 정신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전생부터 하던 생각이었다.
지금 그 가정(假定)을 현실화시켜볼 생각이다.
친양자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