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진동하는 마나홀
나호가 화면에 나오는 내용이 궁금하냐고 묻는 것과 동시에 직원이 사인을 요구했다.
두 건의 연금보험을 해약하는 것이니 두 번만 사인을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네 번이나 사인을 해야 했다.
두 개는 해약에 관계된 것이고 나머지는 안전금융거래에 관한 것이었다.
"손님 모두 처리되었습니다. 여기···. 또 하실 일 있으십니까?"
보험 해약 내용이 기록된 종이 두 장을 건네주면서 물었다.
없다고 말을 하고 우체국을 나서는데 연금보험이 해약되었다는 안내 메시지가 휴대폰으로 들어왔다.
<부자네. 완전 부자야. 나 사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먹지도 못하잖아.'
<지금은 먹지 못하지. 집사 그러고 보니 배고프다. 마나 빨리 쌓아. 시간이 갈수록 기 빨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지금은 어쩔 수 없어. 계속 마나 호흡 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참아.'
<마나 호흡으로는 마나가 쌓이지 않는 거 알지?>
'미량은 쌓이기도 해.'
<쥐꼬리만 한 걸 어디다 써?>
'쓰기 싫으면 쓰지 말고.'
<피이이.>
나호가 입술을 삐죽였다.
전생에 각성자라도 마나호흡을 아예 하지 않는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마나호흡만으로는 마나 능력치가 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나는 지하실에 갇히기 전까지 계속해서 마나호흡을 했었다.
마나호흡을 꾸준히 하면 마나회복이 빨라지고 마나의 활용이 자연스러워지기 때문이었다.
물론 플라시보효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집사. 이래서는 다른 보험회사는 못가겠는데?>
도로는 아직도 차량이 뒤엉켜 있었다.
빠르게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처리가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슴 통증은 구급대원이나 의사, 경찰을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그러니 인명구조를 하던 구급대원이 쓰러지기도 하고, 사고처리를 하던 경찰이 통증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러니 도로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급한 볼 일이 있는 사람 중에는 도로에 차량을 방치한 채 자리를 비우기까지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더 정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지금 인터넷 난리겠다.>
'오늘 밤이었지? 뉴스 생방송 도중에 아나운서가 쓰러진 것이···?'
<그런 것까지는 나는 모르지. 전생에 내가 이 시기에 TV를 봤던 것은 아니니까.>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남겨주신 보험들이라 직접 가서 해지를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앱을 통해 처리해야 할 것 같았다.
큰아버지가 계시는 고시원 쪽으로 걸어가면서 은행 앱을 접속했다.
요즘은 아무 은행 앱이나 접속하면 통합 처리가 되기 때문에 편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은행 앱을 통해 세 보험회사에 들어있는 다섯 개 보험의 해지를 요청했다.
이 중에서 두 개는 연금 보험이고, 하나는 제법 보장 내용이 좋은 종합보험, 나머지 두 개는 암보험이었다.
<이거 다 처리하면 얼마야?>
'이것들은 받을 수 있는 금액이 많지 않아. 할아버지는 우체국이 익숙하셔서 큰 것은 우체국에 넣어주셨으니까.'
<그래도 오늘 해약한 보험 다 합치면 거의 10억에 가까운 거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야. 처리가 완료돼야 정확하겠지만···.'
방금 해지 요청한 다섯 개의 보험은 해지가 돼야 정확한 금액을 알 수 있었다.
처리까지 5에서 10분 정도 걸린다고 하니 참 빠른 세상이었다.
<직접 찾아다니지 않아도 돼서 참 좋다. 대변혁이 나고 한동안은 발품을 팔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됐었잖아.>
둥실 뜬 채 이동을 하면서 굳이 왜 발을 움직이는지 모르겠지만 나호는 지금 허공답보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집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대변혁에 대해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네가 있어서 좋아. 네가 없었으면 얼마나 답답했겠어?'
<헤헤. 나도 집사가 있어서 너무 좋아. 이렇게 눈을 마주치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나호가 허공답보를 하며 내 가슴을 향해 돌진했다.
쑤우욱!
나호가 내 가슴을 통과해서 등 뒤로 나왔다.
'이거 하지 마. 이거 느낌 정말 이상해.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슴이 찡하려고 해. 왜 이러지?'
<그래? 나도 그랬는데···. 나도 방금 가슴이 떨렸어. 가슴에 미약한 전류가 흐른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들었어.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이런 느낌이 들 수 있지?>
나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집사 이거 다시 한 번 해볼까?>
'잠깐 시스템에게 물어보고.'
전생이라면 이런 것을 시스템에게 물어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특별 서비스를 받고 있는 지금은 아니었다.
당당하게 방금 느낀 것을 시스템에게 물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물었지만 여전히 어떠한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특별 서비스라고 하더니 말만 특별이네. 궁금한 것 정도는 재깍재깍 말해줘야지. 뭐하고 있는 거야?>
'지금 상태로도 감지덕지지. 그런데 네가 내 가슴을 통과할 때 마나홀이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어. 찌르르 한다고 표현하면 정확할 것 같아.'
<그래? 나도 그런 느낌이었는데. 강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첫 가슴 통증을 느끼는 순간 세상 모든 사람의 심장 옆에는 마나홀과 마나통이 형성 되었다.
마나홀은 김치 냉장고이고, 마나통은 김치 냉장고 안에 들어가는 김치통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마나는 김치통 안에 들어가는 김치이고 말이다.
단 김치 냉장고에는 여러 개의 김치통이 들어가지만 마나홀에는 단 하나만의 마나통만 존재했다.
김치 냉장고의 용량보다 큰 김치통을 넣을 수 없는 것처럼 마나통은 마나홀의 용량을 초과할 수 없었다.
더 많은 마나를 사용하고 싶으면 마나홀과 마나통을 성장시켜야 했다.
각성자들도 간혹 마나통증을 느끼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통증은 쉽게 오지 않았다.
성장이 임박했을 때 오는데 지금처럼 찌르르 하는 감각부터 시작해서 제법 강한 통증까지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런 통증을 느끼고 난 이후에는 작게라도 마나홀과 마나통이 성장했다.
물론 통증을 느끼고도 성장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말이다.
<집사. 이거 혹시 마나홀을 자극하는 거 아닐까?>
각성자에게 있어서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많은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래서 전생에 많은 연구자들이 마나홀을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었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마나홀과 마나통을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몬스터를 사냥하고 던전을 클리어 하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알게 될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분명 마나홀이 있는 자리가 찡했다.
나호의 감정을 느낀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가슴에 느껴지는 감각이 너무 선명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마나홀이 기분 좋게 진동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마나홀이 진동하자 마나홀 안에 든 마나통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물론 마나통까지는 느낄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그럼 빠르게 마나홀을 키울 수 있잖아. 남들은 사냥을 통해서만 키울 수 있는 것을 이렇게도 키울 수 있다면 성장 동력을 하나 더 갖게 되는 것과 같잖아.'
나호가 나를 통과하는 순간부터 길거리에 멈춰 있었더니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지나갔다.
'그런데 넌 왜 가슴에 반응이 왔을까? 실체가 없는데···. 만약 이것이 마나홀을 자극하는 것이라면 분명 네게도 좋은 의미일 거야.'
<집사도 그렇게 생각하지? 나도 그래. 왠지 좋은 느낌이 들어. 이거 전생에 처음 실체를 갖게 됐을 때 느꼈던 느낌과 아주 흡사해. 나 아예 집사 가슴에 들어가 살까?>
나호가 무서운 소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호도 나도 성장할 수 있다면 똥오줌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본다면 기겁을 하겠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니 우리만 좋으면 그만이었다.
'좋아. 들어와 봐.'
<정말? 정말 들어가?>
'그래. 들어와.'
<집사가 들어오라고 할 줄은 몰랐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망설임 없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나호였다.
찌르르르! 지르르르!
처음에는 조금 강하게 느껴지던 진동이 약해지더니 기분 좋은 정도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가슴으로 들어온 나호가 머리만 쏙 내밀고는 나를 올려다봤다.
<어때?>
'넌?'
<아까보다 강하지는 않은데 기분 좋아. 가슴에 들어와 있어서 포근해서 그러나?>
나호가 바로 밖으로 나오더니 다시 가슴으로 쏙 들어왔다.
엽기적인 모습인데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꽉 찬 듯한 안정감이 들었다.
나호의 표정을 보니 나호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것 같았다.
<집사. 남들이 우리를 보지 못해서 다행이다. 그치? 아무리 영체 상태이지만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생각할 거야. 지금 내 꼬리는 집사의 등을 벗어나 있거든.>
머리는 가슴 밖으로 나와 있으니 옆에서 보면 더 기괴해 보일 것 같았다.
'너무 자세하게 설명하지 마. 상상되잖아. 이상해지려고 해. 그런데 느낌은 좋네. 확실히 마나홀이 반응을 보이고 있어.'
<나도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더 빨리 실체를 가질 수도 있겠지?>
나호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계속 진동했다.
해지를 청구한 보험이 처리가 완료 됐다는 문자였다.
거래 내역을 확인하니 우체국 것까지 총 일곱 개의 입금 내역이 나타나 있었다.
바로 주택종합저축도 해지를 했다.
보험과 달리 바로 처리가 되면서 통장으로 돈이 넘어왔다.
<이 통장으로 돈을 다 모으는 거야?>
'맞아. 그래야 관리가 편하니까.'
<주식 통장도 없앨 거야?>
'아니. 주식 통장은 대변혁 한 달 전까지는 유지해야지. 아는 정보를 썩힐 수는 없잖아.'
<역시. 이래서 미리 회귀를 알았으면 좋았을 거란 말이야. 지금은 3미터만 벗어날 수 있지만 그때는 조금 더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더 많은 정보를 모을 수 있었을 텐데.>
'우리가 아는 정보만으로도 충분해. 아니 차고 넘쳐.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겠지만 돈은 충분히 모을 수 있을 거야.'
<돈이 아니라. 금!>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
<이맘때에 주식에 관심 많았어?>
'아니. 주식에 대한 것은 굵직한 것밖에 알지 못해. 그러니까 다른 것을 이용하려고. '입 냄새 제거제' 그거 만들려고.'
<아!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그거잖아. 지금이라면 주인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거고.>
'그렇지. 그 약이 있기 전까지는 입 냄새는 어떤 방법으로도 없앨 수 없었으니까.'
전생에는 대변혁이전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입 냄새를 제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변혁 3년 후 미우라 놈이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입 냄새를 제거하는 약이 나왔다.
당시 그 약을 만든 것은 미우라 놈이 만든 길드였는데 그 약을 만드는 모든 재료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같은 재료로 만든 약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재료로 만든 약과 달리 입 냄새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재료로,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만들었지만 우리나라에 가장 비싸게 팔았다.
그것도 우리나라에는 B품만을 판매했던 것이 미우라 놈이 길드장으로 있던 미우라(三浦)길드였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약을 사서 마실 수밖에 없었다.
냄새라는 것은 원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면서 느끼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마나통증과 함께 시작된 냄새는 그렇지 않았다.
남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도 냄새에 시달려야 했다.
악취를 계속 맡게 되면 두통과 구토를 유발하기 때문에 이 약을 사서 마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악취가 나는 사람을 아무도 고용해주지 않으려고 해서 더 약을 사먹을 수밖에 없기도 했고 말이다.
<그 약 만들려면 고향 가야겠네? 이번에는 고향 땅 팔지 않을 거지?>
정상적인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