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정상적인 모습
으드득! 으드득!
나호가 고향 땅을 거론한 순간 이가 갈렸다.
미우라 그 놈이 한 짓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그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전생에는 빼앗겼던 기회들을 이번에는 절대로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빼앗기지 않은 정도를 넘어서 미우라 놈이 차지했던 기회와 이익들을 모조리 나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우리는 큰아버지께서는 머무시고 계시는 고시원에 도착했다.
막 고시원 건물에 들어서는데 큰아버지께서 계단에서 내려오고 계셨다.
"대한아. 마침 잘됐다. 혹시 내 핸드폰 못 봤니? 오늘 유진 엄마가 전화하기로 했는데···. 전화기가 보이지 않는구나. 좁은 방에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아니 근데 이게······."
이제야 밖의 상황이 파악되시는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요. 핸드폰 제가 가지고 있어요."
"네가 내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고?"
"예. 안에 들어가서 드릴게요."
큰아버지께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엉망이 된 도로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시는 큰아버지를 뒤로 하고 계단을 올랐다.
뚜벅! 뚜벅! 뚜벅!
큰아버지께서 내 뒤를 따라오고 계셨다.
아주 익숙한 발소리였다.
각성자가 되고 난 후부터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이렇게 내 곁을 지키셨던 큰아버지셨다.
왼팔을 쓰지 못하셨지만 초반에 쾌속쾌검으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더 좋은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내 곁에 머무시는 것을 택하셨던 분이었다.
못난 조카가 어디 가서 눈먼 칼에 죽을까 한시도 눈에서 떼어놓지 못하셨던 큰아버지.
큰아버지의 발자국 소리가 심장의 울림처럼 들렸다.
202호.
고시원 방에 들어와 큰아버지는 침대에, 나는 책상 의자에 앉았다.
좁은 방이어서 마주 앉지 못하고 비껴 앉은 상태였다.
"큰아버지. 제가 주제넘은 짓을 했습니다."
"네가 그럴 일이 뭐가 있어?"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큰아버지의 핸드폰을 꺼내서 익숙하게 잠금을 해제한 후 메시지창을 열었다.
자신의 핸드폰을 마치 내 핸드폰인양 조작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시는 큰아버지의 눈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큰아버지의 시선은 무시한 채 큰아버지 전처와 주고받은 메시지를 화면에 띄웠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핸드폰을 건넸다.
"이거 한 번 보세요."
큰아버지께서는 잠시 내 눈을 응시하시더니 핸드폰을 받아 화면으로 시선을 내리셨다.
처음에는 이것이 뭔가 싶으신 모양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이런 상황을 쉽게 이해하겠는가.
처음 오간 몇 개의 문자를 확인하신 큰아버지께서 목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급하게 고개를 드시더니 나를 쳐다보셨다.
"이게 뭐니?"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하긴 아버지와 달리 큰아버지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소리를 지르시거나 쉽게 화를 내시는 분은 아니셨다.
"보신 대로예요."
큰아버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손도 잠깐 떨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다잡으려고 애를 쓰셨다.
"어떻게 안거니?"
"어떻게 알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25년이에요. 메시지 끝까지 보시고 나면 말씀드릴게요."
큰아버지께서 다시 내 눈을 응시하셨다.
진위(眞僞)를 묻는 눈이었다.
피하지 않고 큰아버지의 눈을 마주했다.
내 눈에서 진심을 읽으셨는지 큰아버지의 시선이 서서히 핸드폰 화면으로 내려갔다.
큰아버지께서는 메시지를 위로 올리시며 하나하나 메시지를 읽어나가셨다.
간간이 손이 떨리시는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셨는데 그때마다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상당량의 메시지이기 때문에 읽는데도 한참이 걸리셨다.
나야 상황을 모두 파악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큰아버지께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지 앞의 문자를 다시 확인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냥 사실을 말씀드렸다면 큰아버지께서는 쉽게 믿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이런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다.
<대학도, 대학원도 다니지 않으면서 철철이 학비며, 연구비며, 각종 모임에, 있지도 않은 대회 참가비까지 들먹이며 돈을 뜯어낸 것들이 사람이야? 이런 식으로 돈이 뜯겨 나가면 누가 버텨? 이건 귀신 할애비가 와도 못 버텨.>
그간 큰아버지께서는 유진 누나에게 보낸 돈의 목록을 알고 있는 나호가 옆에서 열을 내고 있었다.
큰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열불까지 내고 있었다.
<······딸년도 나쁜 년이에요. 엄마가 그러면 말려야지. 똑같이··· 어떻게 아빠한테 그럴 수 있어? 사람새끼가 제일 무섭다더니···.>
'아빠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지. 한국 나이로 세 살에 미국에 가서 오지 않았어. 큰아버지께서 보고 싶어서 가도 갖은 핑계로 보여주지 않았고. 면접교섭권을 이용해서 딸을 보려고 했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지.'
이혼할 때 한 달에 두 번 보여주기로 했지만 처음에는 딸의 정서적인 안정을 위해 만남을 자제해달라고 해서 자제를 했다고 한다.
대신 딸이 크면 마음이라도 알아달라고 미국 오가는 비용까지 보냈단다.
전처가 요구해서 나중에는 당연하게 지급하는 돈이 되어버렸지만 보지 못한 딸에 대한 정(情이)었고 그렇게라도 딸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다고 했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법의 힘까지 빌려 만나려고 하자 전처가 미국법원에 면접교섭권을 그동안 행사하지 않았다는 이유와 아직 어린 딸의 정서적인 안정을 이유로 면접교섭권을 제한해달라고 하면서 진흙탕 싸움이 됐었다고 했다.
미국법정에서 영주권을 가진 전처와 외국인인 큰아버지의 싸움은 결과가 뻔한 싸움이었다.
간간이 딸의 사진과 영상을 보내주고, 편지를 주고받는 정도에서 합의가 됐지만 약속이 제대로 지켜질 리 없었다.
딸에게 받은 메일은 각종 청구서일 뿐이었지만 그것마저 소중히 보관하고 계신 큰아버지셨다.
그것이 이제 모두 모녀를 옭아맬 증거가 되겠지만 말이다.
'세 살 이후로 보지 못한 아버지에게 정이 있겠어? 전처가 딸에게 아버지란 사람을 어떻게 인식시켰는지 뻔한 거잖아. 큰아버지는 그들에게 열린 지갑에 불과했을 거야.'
<에효. 이래서 내가 사람들과 거리를 뒀던 거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가 가장 좋더라고. 이 꼴 저 꼴 안 보고. >
나호와 이야기를 나눈 사이 큰아버지는 사건의 전말이 파악되신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침착하셨다.
전생에는 정말 많이 힘들어하셨는데 말이다.
"돈이야 자식 교육비로 줬다고 생각하면 그만인데···."
하지만 이런 반응은 전생과 똑같았다.
이래서 미리 자료를 내 클라우드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큰아버지. 어린 제가 이런 말씀드리는 거 외람 된다는 거 아는 데요. 지금까······."
내 생각을 차근하게 이야기했다.
큰아버지께서는 묵묵히 듣고만 계셨다.
생각이 많으신 것 같았다.
<집사. 소용없어. 지금 들리기나 하겠어?>
'큰아버지는 의외로 냉철하신 분이야. 딸 앞에서는 바보가 됐지만 콩깍지가 벗겨진 지금도 그럴까? 큰아버지는 누구보다 무서울 수 있는 분이니까 기다려봐.'
<딸 바보에서 조카바보로 바뀐 케이스였구나.>
이런 일이 있기 전에도 그랬지만 대변혁이후에는 큰아버지께서는 나를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듯 돌보셨다.
나호는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혼자 있고 싶구나."
"학교에 다녀올게요. 다녀와서 이야기해요."
고시원을 나와 학교로 이동했다.
아직도 도로는 엉망이었고 사람들 사이에 빠르게 공포가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가슴통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뉴스 속보도 계속되고 있었다.
교수를 만나 자퇴 확인을 받는 것은 금세 처리가 되었다.
우리나라 최고 학교여서 다시 한 번 생각하라든지,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교수는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퇴의 의사가 확실하냐는 말만 묻고는 처리가 되었다는 말과 함께 축객령을 내렸다.
너무 사무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질척거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지하철에 올랐다.
지하철 역사에서도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지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다.
아는 병이라 지나쳤는데 괜스레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탑승하고 이동하는 와중에도 같은 칸에서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었다.
전염병이라도 되는 듯 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든 도와주기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도 있었다.
점차 대한민국은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
녹양역에서 내려 근처의 마트에 들어가 장을 보고 있는데 대학 등록금이 반환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확인을 해보니 6,432,940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들어온 돈이 등록금이었지?>
'그렇지. 개학 전이라 전액 환불됐어.'
<아니 등록금을 6백 40만원만 받으면 되지 32,940원은 왜 붙여 놓은 거야? 이런 거 정말 싫어.>
문자가 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이밀고 핸드폰을 본 나호가 투덜거렸다.
'한 명의 32,940원은 별 것 아닌데 그것이 백 명, 천 명이 되면 무시하지 못하잖아.'
<그러니까 하는 소리야. 그리고 말이야. 왜 늘 대학 결산 공개는 제대로 하지 않는 거야? 은근슬쩍 넘어가더라. 돈을 내라고 하는 것은 문자도 보내고 별 지랄 염병을 다하면서 결산 공개 같은 것은 왜 통보해주지 않는데?>
갑자기 나호가 열을 냈다.
'갑자기 왜 그래?'
장 본 것을 계산하면서 나호에게 물었다.
<그냥 속이 상해서 그래. 대학 등록금이 내려간 적이 없어요. 매년 고공행진이야.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제대로 공개해 주지도 않으면서 말이야. 공개했다고 하는데 언제 어디에 공개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공개야? 등록금 고지서 발부하듯이 상세하게 작성해서 발송해야지.>
대학 등록금에 대해서는 대변혁이후 돌려받지 못한 것만 억울했지 이런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입대 전에도, 후에도 등록금 때문에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과 동기 중에는 등록금 때문에 고민을 하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피부로 와 닿지 않았었다.
'생각해보니 등록금을 낸 주체가 학생이니 어떻게 사용됐는지 확실히 보고해줄 필요가 있기는 하네. 아니 그보다 등록금 산정 근거부터 제대로 밝혀야겠네.'
<그렇지!>
나호와 이야기를 하며 걷자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려다 옆집 문이 눈에 들어왔다.
<왜?>
'옆집부터 살까 하고.'
대답을 하고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미리 사놓으면 좋기는 하지만 팔려고 하겠어? 보기는 이래도 얼마나 안전한 곳인데···. 어? 잠깐만···. 지금은 아무도 모르네? 집사! 이거 완전 개꿀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생각보다 많아. 이 근처만 해도 어디가 대변혁이후에도 안전한지 다 알고 있잖아. 으하하하! 집사! 집사? 내 말 듣고 있어?>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것을 깨달았는지 나호가 시끄럽게 떠들었다.
가슴에 박힌 채 나를 마주보고 있는 나호는 엽기 그 자체였다.
조금 전 거리를 걸을 때까지만 해도 바른 자세로 있더니 집에 들어오자 발라당 누운 채 눈을 마주쳐왔던 것이다.
현관에 걸린 거울에 비친 나호와 내 모습을 보고 놀라자빠지는 줄 알았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나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슬쩍 보고는 눈썹을 한 번 까딱이고는 계속 떠들었지만 나는 나호처럼 태연할 수 없었다.
등 뒤로 나호의 꼬리가 흔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호의 덩치가 더 컸다면 엉덩이까지 등 뒤로 나왔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자 소름이 끼치며 오소소 닭살이 돋는 것 같았다.
<집사! 거울 속의 저 모습 때문에 그러는 거야? 뭘 저 정도 가지고 그래? 더한 것도 보고 살았으면서···. 나름 괜찮잖아.>
나호가 빙그르 한 바퀴 돌았다.
가슴 앞으로 튀어 나온 머리와 등 뒤로 나와 있는 꼬리도 함께 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지 못해서 정말 다행이다. 어지간히 간땡이가 부은 사람도 기겁을 하고 도망갔을 거야."
<그럼 좀 어때? 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대변혁 이후에는 더한 짓도 하는 사람이 천지였어. 기억해?>
"음식 준비나 하자. 저녁에 부모님과 큰아버지께 사업 이야기 하려면 밥이라도 제대로 준비해야지."
고향 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