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고향 땅
따다다다다! 따다다! 따닥!
작은 부엌에 경쾌한 칼질 소리가 울렸다.
경쾌한 소리 사이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지하에 살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소리 중 하나였다.
환풍기 소리.
아무리 잘 만들어진 환풍기도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데 지하실에 붙은 환풍기가 좋은 것일 리 없었다.
사람이 있을 때는 항상 틀어놓는데 전생에는 이 소리에 적응하는 것도 한참 걸렸었다.
의식을 하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은데 의식이 안 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꺼두면 지하실 특유의 냄새가 심해지기 때문에 틀어놔야 했다.
지금은 적응이 되어서 그러려니 하지만 말이다.
<아버지 저녁도 과식하시는 거 아니야? 너무 맛있으면 안 되는데···.>
나호가 여전히 가슴에 박힌 채 이야기했다.
마주 보는 것은 너무 엽기적이라고 했더니 지금은 얼굴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려다보니 귀가 쫑긋거리는 것이 제법 귀엽게도 보였다.
나호에게 괴기스럽게 보인다고 투덜거렸지만 나호가 가슴으로 들어오고 난 후부터 마나홀이 기분 좋게 진동하고 있었다.
당장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마나홀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보글보글! 보글보글!
대변혁 이후에는 먹기 힘든 음식 위주로 요리를 하고 있었다.
마트에 들어간 순간부터 내 눈은 그런 음식재료에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메인요리는 시원한 동태탕이었다.
얼큰하게 끓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우리 식구는 시원한 동태탕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동태탕과 함께 준비한 것은 애호박나물과 잔멸치볶음이었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상추 겉절이를 했는데 깻잎을 서너 장 넣어서 향을 가미했다.
여기다 계란 장조림을 후다닥 만들었다.
요리가 모두 완성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밥상을 차리기만 하면 되도록 준비를 해둔 후 고시원으로 향했다.
전화를 하면 오시지 않을 것 같아서 모시러 온 것이었다.
사양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선선히 따라나서는 큰아버지셨다.
집에 들어서자 큰아버지께서 말씀을 먼저 꺼내셨다.
"이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식으로 장사를 할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큰아버지의 이야기는 상당히 길게 이어졌다.
모든 것을 기록해 놨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 모양이었다.
기록된 것은 30억 정도의 돈이었지만 실제적으로 보낸 것은 40억 남짓이라고 하셨다.
<호구였네. 국제적인 호구. 그 여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좋았겠어. 전화만 하면 돈이 오니···. 40억! 금칠을 해서 키워도 그렇게 많이 들지는 않겠다.>
큰아버지께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큰아버지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더 방방 뛰는 나호였다.
전생에 큰아버지께서 어떻게 돌아가신지 알기 때문에 더 속상해 하는 것이었다.
"네가 정리해둔 자료를 보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겠더구나. 네 덕분에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어. 아버지 말씀도 생각이 나고······."
큰아버지의 한숨이 깊었다.
내가 고시원을 나가고 난 후 생각이 많으셨던 모양이었다.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볼 생각이다."
"법률관계를 돌릴 생각이세요?"
"그 생각도 했지. 네가 아니라 다른 루트로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게 돌려놓는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니. 넌 오늘 아버지의 호통보다도 더 큰 가르침을 내게 준 거야. 고맙다 대한아."
큰아버지를 존경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었다.
큰아버지는 다른 어른들과 다르게 꼰대 기질이 없었다.
나이를 떠나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모습 때문에 때론 가볍게 보일 때도 있었지만 이런 모습이 모든 연령층에 두루 친구를 가지게 했다.
"법적으로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을 거예요. 큰아버지께서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하는데 쉽지 않잖아요. 너무 오래된 일이라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찾기도 어려울 거고요."
대변혁 이전에 판결이 날 리 만무했다.
그래서 큰아버지께 힌트가 될 만한 자료를 정리해서 파일에 넣어두었는데 보셨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소송과 동시에 네가 자료에 남긴 방법으로 접근해볼 생각이다. 변호사 친구에게 물으니 친구도 그게 좋을 것 같다고 하고 질질 끌고 싶지도 않고···."
"지금이라면 빨리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언론이나 상대진영에 알린다고만 해도 연락이 올 테니까요."
전처와 딸에게 그동안 뜯긴 돈과 위자료 그리고 사과까지 받아내려면 지금처럼 좋을 때가 없었다.
유력 대선 주자의 참모로 일하고 있는 전처의 현 남편 때문에라도 이 일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은 피하고 싶을 테니까 말이다.
"마음이 좋지 못하시죠?"
"편하지는 않지. 그런데 말이다. 뭔가 매듭이 지어진다는 느낌도 드는구나. 왜 그렇게 아버지께서 내게 못난 놈이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 아버지 보시기에도 뭔가 이상하셨던 거야."
할아버지께서는 시골에서 나서 평생 그곳을 떠나지 않고 사셨지만 누구보다 현명하셨다.
그런 할아버지께서 큰아버지에게 못난 놈이라고 한 것은 오로지 큰아버지 전처와 관계되는 일에서였다.
큰아버지 전처와 관계되지 않은 일에서는 단 한 번도 '저만치 서라'는 말씀조차 하신 적이 없었다.
아버지와 내게 우상이었던 것처럼 큰아버지는 할아버지께도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던 것이다.
큰아버지와의 이야기가 마무리 될 때쯤 부모님께서 함께 퇴근해서 돌아오셨다.
"대한아! 너는 괜찮니?"
퇴근하고 돌아오신 부모님께서는 내 걱정부터 하셨다.
"저는 괜찮아요. 엄마 아버지는요?"
"묵직하니 가슴이 아프고 입 냄새가 나."
"나도 그런데 혹시 전염병일지 모른다고 하는데 이렇게 모여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네? 되도록 격리 생활을 하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우선 씻고 나오세요. 밥 차릴게요."
부모님께서는 혹시 병을 옮길까 걱정을 하셨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부모님께서 씻는 사이 밥상을 차렸다.
거실은 네 사람이 앉으니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좁았다.
"내일부터 출근을 하지 말라고 하더구나. 이런 상태에서는 민원인을 상대할 수도 없고···. 네 엄마도 그렇고."
"나도 아까 통증을 느꼈다가 사라졌는데 들으니까 어제 처음 통증을 느낀 사람들은 아침이 되니 통증이 다시 시작됐다고 하더라고."
큰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막 그 말씀을 하시던 큰아버지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셨다.
"사장님. 어디 안 좋으세요?"
엄마가 급하게 큰아버지를 불렀다.
거래처 사장으로 처음 만나서 최근까지도 거래처 사장이다 보니 '사장님'이라는 말이 입에 붙어서 급할 때는 '아주버니'라는 호칭보다는 '사장님'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 것이었다.
"괜찮아요. 갑자기 가슴이 묵직해서···."
아침에 첫 통증을 느꼈으니 다시 통증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큰아버지의 입에서 입 냄새도 시작되었다.
큰아버지께서 자신의 입을 가리며 당황스러워하셨다.
"괜찮아요. 큰아버지. 학교에 가봤더니 가슴 통증을 느낀 사람은 모두 입 냄새가 난대요. 병원에서도 별 이상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다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이상이 없다고 했다고?"
"어제 가슴 통증 때문에 병원에 간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아침에 다시 통증과 입 냄새가 시작됐지만 이상은 없다고 했대요."
안심을 시켜드리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그럼 다행이기는 하지만 입 냄새가 빨리 가셔야 할 텐데 걱정이구나. 민원인을 상대해야 하는데···."
아버지의 얼굴이 어두웠다.
<모든 사람이 입 냄새가 나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되는데···.>
나호가 저도 식구라고 밥상 앞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상태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예전에 할아버지께서 입 냄새에 아주 좋다고 하신 약이 있어요. 그거 만들어볼까 하는데 어떠세요?"
"그런 약이 있다고 하셨어?"
"방학 때마다 할아버지 옆을 졸졸 따라다녔더니 알려주셨어요."
"아버지가 널 예뻐하시기는 하셨지. 약은 잘못 쓰면 독이 될 수 있다고 절대로 알려주지 않으셨는데···."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확실하기만 하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최고의 약이 될 것 같기는 하겠지만 약은 절차가 너무 복잡해."
사업을 하셨던 큰아버지께서는 이런 쪽으로는 파삭하셨다.
"그래서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그냥 음료로 만들어서 팔면 어떨까 싶어요."
"대한아. 사업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야. 지금 우리 수중에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그렇긴 한데 효과만 있다면 확실한 아이템이에요. 아버지."
"효과가 있으면 뭐하니. 이것이 된다 싶으면 대기업에서 금세 따라할 텐데."
큰아버지 사업이 망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큰아버지께서는 건강음료사업을 했었다.
한 때 외국으로 수출을 할 정도로 승승장구를 한 적도 있었지만 된다싶은 상품은 대기업들이 비슷한 상품을 쏟아내는 바람에 버텨낼 수 없었다.
"괜찮아요. 아버지. 비슷한 제품은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똑같은 제품은 절대로 만들 수 없어요. 우리 가족만 입을 열지 않는다면 요."
확신에 차서 말을 하자 부모님께서도 조금 수긍하는 눈치셨다.
사실 나를 믿는 것이 아니고 한약에 일가견이 있으셨던 할아버지를 믿는 것이었다.
"확실하다고 하셨어?"
"예! 확실해요. 할아버지 말씀은 틀린 적이 없잖아요. 신기 있다고 의심받을 정도로 꿰뚫어 보시던 거 기억하시죠?"
"기억하지 그럼.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어. 어쩔 때는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잘 맞았지."
"아버님은 신기한 분이셨어요."
"다른 약은 하나도 가르쳐주시지 않으셨는데 이 약은 몇 번씩 가르쳐주시고 직접 만들게도 하셨어요. 그때는 입 냄새가 나지 않아서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할아버지께서 세상의 모든 입 냄새를 제거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회귀를 했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 할아버지 핑계를 댔다.
우리 집안에서는 '할아버지'하면 웬만한 것은 무사통과였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이 그럴 분이 아니신데···. 본인이 만드신 약은 잘 나눠주시지만 절대로 약을 알려주시지 않았잖아요. 약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에게도 절대로 알려주지 않으셨고···."
"약도 그냥 나눠주시는 법이 없었지. 확실한 병세를 알아야 나눠주셨어. 그것도 주의사항과 복용법을 세세히 알려주시면서 말이야."
"약에 있어서는 아버님은 엄격하셨죠.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예요. 왜 대한이에게 몇 번씩 연습을 시키셨을까요? 절대로 그럴 분이 아니신데···."
"할아버지께서 이거 하나 정도는 알아두라고 하시면서 알려주셨어요. 그러면서 절대 만드는 법을 남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산도 절대로 팔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고요."
"산을 팔지 말라는 말씀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하시긴 하셨지. 나에게 고향집에 음료공장을 세우라는 말씀도 자주 하셨고."
큰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할아버지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처음 알았는데 잘 되었다 싶었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하면 어떨까요? 저에게도 할아버지께서 고향은 물로 흥할 거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거든요. 나중에 물과 관계되는 일을 하게 되면 꼭 할아버지 집에서 시작하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집사! 거짓말을 너무 잘하는 거 아니야? 집사 고향에 미우라 놈이 같은 공장을 세우기는 했지만 말이야.>
'이건 정말이야. 할아버지께서는 고향 땅에 좋은 물이 만나면 천지로 뻗어나갈 거라고 하셨어. 터도 좋다고 하셨고. 그러면서 절대로 고향집과 산을 팔지 말라고 하셨는데 미우라 놈이···. 으드득!'
<이빨 부러질라.>
"그래서 아버님께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집과 땅을 그렇게 사셨을까요? 이제 네 집 남았죠?"
"그렇지 않아도 엊그제 일순이 아주머니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자기 집과 땅을 사줄 수 없겠냐고. 몸이 아파서 요양원에 들어가실 생각이라고 하시더군요."
큰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진작 들어가시고도 남을 연세이기는 하죠."
"팔아서 요양원 비도 내고 자식들 나눠준다고 하시더군요. 작은 땅덩이 때문에 당신 가시고난 후에 싸우는 꼴은 보기 싫다고요."
그동안 고향을 떠나면서 팔려고 하는 사람들의 집과 땅은 모조리 샀기 때문에 큰아버지께 연락을 하신 모양이었다.
이런 이유로 시골이라 금액은 얼마하지 않지만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집사! 고향 땅은 나오는 족족 사야해. 아니 팔지 않는다고 해도 찾아다니면서라도 사야해. 알지? 거기에 뭐가 생기는지···?>
가족기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