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몰매
앞으로 대변혁은 1년 10개월 15일.
그리고 각성자를 가리는 숨겨진 세계, 비세계(秘世界)로 불려가는 것은 이제 10개월하고 15일이 남았다.
이것은 분명히 다가올 미래였다.
내가 각성을 하고, 상태창이 보이고, 나호가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 다가올 미래를 증명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미래이기 때문에 대비가 필요했다.
대단한 재벌이나 힘이 있는 권력자였다면 대비가 한결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일개 평범한 서민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는 것뿐이었다.
입 냄새 제거 음료를 만들어서 최대한 마나통 수술을 받는 사람을 줄이고,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푸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입 냄새 제거 음료인 독도는 아직은 가슴 통증까지는 줄일 수 없었다.
줄일 수 있다고 해도 대변혁이 일어날 때까지는 가슴 통증은 줄이지 않겠지만 말이다.
가슴 통증은 마나홀과 마나통이 몸속에 들어서면서 느끼는 통증이었다.
서서히 몸속의 노폐물을 제거하고 마나에 적응하도록 돕는 기능도 있기 때문에 가슴 통증을 줄일 수 있다고 해도 줄여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대변혁 이후 각성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가슴 통증과 입 냄새를 달고 살게 되는데 이때에는 입 냄새 제거 음료에 마나를 주입해서 가슴 통증을 줄여줄 수 있었다.
특히 마나통이 팔린 경우에는 절대로 각성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통증이라고 줄여주는 것이 좋지만 지금은 고통을 느끼더라도 그대로 유지해야 했다.
몸이 마나에 적응을 하는 시간을 주는 것이고 이 통증이 심한 사람일수록 각성확률이 높은 것이니 2년의 고통으로 남은 생을 편안하게 사는 것이 나았다.
입 냄새 제거 음료는 효과가 바로 보이는 것이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어느 정도 유도가 되지만 금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익명으로 금을 몸에 지니는 것이 좋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지만 그걸 얼마나 신뢰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금을 몸에 지니면 마나 호흡이 원활하고 마나에 더 쉽게 적응을 해서 마나 통증도 덜 느끼게 된다.
그래서 대변혁이 나기 전까지는 금을 지니지 않는 것이 더 좋다.
각성 전의 마나 통증은 많이 느낄수록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세계로 소환되기 직전에 사람들에게 금을 지니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고 해도 바로 금붙이를 살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꾸준히 그런 소문을 내는 것이었다.
이런 소문들이 금값 상승을 부추길지 모르겠지만 한 명이라도 더 각성자를 만들 수 있다면 계속 해야 할 일이었다.
이곳에서보다 비세계에서 금의 효능이 더 좋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본의 문이 열린 오늘 나는 일본행 비행기에 탑승한 채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본은 오랜만이네.>
'너 우리나라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오늘도 은근 걱정하고 있었는데···.'
<혼자 다닐 때는 벗어나지 못했지. 외국을 여행했다는 사람들 말을 들을 때마다 궁금해서 여러 번 시도를 해봐도 안 되더라고. 그런데 네게 묶이고 나서는 벗어나지더라.>
전생에 외국 던전의 공략에 심심치 않게 참여했었다.
외국 던전의 경우 정보가 부족해서 더 위험했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는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큰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어서 더 위험한 곳을 많이 다녔었다.
그때마다 나호도 동행했던 모양이다.
'좋았어?'
<들떴지. 생전 처음 한국을 벗어나니 가슴이 다 두근거리더라. 그럼 뭐 하겠어. 막상 나가본 외국은 전혀 즐겁지 않았어. 네가 죽을 자리를 찾아다니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거든.>
'이제는 즐겨. 그런 일 없을 테니까. 미우라 놈이 가졌던 것 다 빼앗으러 가는 길이니 즐겨도 돼.'
<흐흐.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기는 하네.>
나호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도쿄에 도착해 화출판(花出版)주식회사로 찾아갔다.
전생에는 겨우겨우 찾아왔었지만 이번에는 힘들이지 않고 찾아올 수 있었다.
회사로 들어가 신분증을 내밀고 찾아온 용무를 말했다.
회사로비에서 안내를 맡고 있던 직원이 위아래로 나를 훑었다.
<뭘 꼬라 보고 지랄이야? 집사! 저년 집사가 일본말 하는 것이 신기한가봐.>
'아무리 일본사람들이 싫다고 해도 처음 본 사람에게 이놈 저놈은 아니잖아.'
<저것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 말리지 마. 다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아. 선량한 일본인?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나호는 공항에 도착해서부터 계속 이런 상태였다.
일본 사람을 보자 전생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한두 시간 뒤에 도착할 거라고 연락을 받았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안내를 맡고 있는 여자가 앞서 걸으며 말했다.
<그럼. 너희만 하겠냐? 미개한 것들. 스마트 안내판 하나 세워두면 끝나는 일을 이렇게 답답하게 처리하고 있으니 원. 이러고도 자기들이 선진국이라고 하지.>
나호는 보이는 모든 것이 불만인 것 같았다.
사실 전생에 처음 일본에 왔을 때 엄청 놀랐었다.
3년 전에 지진으로 타격을 받기는 했지만 선진국이라고 자처하는 일본이었다.
그런데 막상 접한 일본은 답답할 정도로 구습을 벗지 못하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서만 일을 하기는 했지만 인터넷으로 뭔가를 처리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복잡한 서류를 마치 전통이라도 되는 것처럼 일일이 수작업으로 처리했다.
인터넷이 깔리지 않은 곳도 많았고 카드가 되지 않은 곳이 많아서 이곳이 정말 선진국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노벨상을 몇 개씩이나 딴 나라라고 떠들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발전이 정체된 나라로 보였다.
연구소에서 개발되는 기술들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런 기술이 사회로 스며들지는 못한 것 같았다.
일본인들은 2028년이 아니라 2018년, 2008년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안내원을 따라가자 전생과 똑같은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워킹비자로 들어오는 청년들을 담당하는 하야시라는 사람이었다.
하야시는 일본인 특유의 친절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겼다.
"어서 와요. 마중을 나갔어야 하는데 바빠서 나가지 못했네요."
<염병. 나올 마음도 없었으면서 말은···. 책상을 봐. 저게 바쁜 사람의 책상이야? 바쁜 척 하느라 고생이 많네. 썩을···.>
나호가 남자의 말이 거슬렸는지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
내가 보기에도 하야시라는 남자는 절대 마중 같은 것은 하지 않을 사람으로 보였다.
"바빴는데 알아서 찾아와 주니 좋네요. 아주 좋아요. 숙소는 설명이 끝난 후 데려다 줄게요. 바쁘지만 일이니까···."
하야시가 여행용 가방을 흘끗 쳐다보며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처음부터 출판사에서 일을 시키고 싶지만 먼저 들어온 선배들이 있어서 한두 달 자회사에서 일을 좀 해야 해요. 여기 출판사보다 월급도 더 많고 숙소도 훨씬 좋으니 더 만족스러울 겁니다. 그리고······."
근무지에 대한 말을 하면서부터 하야시는 유난히 장황하게 설명을 했다.
전생에도 하야시는 지금처럼 열심히 설명을 했었다.
당시에는 일본어에 능숙하지 못해서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놈이 내미는 서류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명을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먼저 내가 어디로 가게 되는지 물었다.
"강대한씨는 우리 자회사 중 하나인 화장(花葬)주식회사에서 일하게 될 겁니다. 아주 좋은 곳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화장 주식회사 중에서도 여기에서 멀지 않은 화 제일(花 第一)장례식장에서 근무하게 될 겁니다. 아주 좋은 곳이죠."
<그리 좋은 곳이면 네가 가지 그러냐? 썩을···.>
다시 나호가 욕을 퍼부었다.
"······."
"우리 출판사의 자회사인 화장 주식회사는 도쿄에서 발생하는 70%에서 90%의 화장(火葬)을 담당하고 있어요. 그중에서도 화 제일 장례식장은 도쿄에 있는 여덟 개의 장례식장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하야시를 기계처럼 말을 쏟아냈다.
일부러 말을 이렇게 빠르게 하면서 정신이 없게 만드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모두 이해했죠? 여기 설명을 충분히 들었다는 서류에 도장···. 외국인이라 도장이 없죠? 여기에 사인하고 지장(指章) 찍고 숙소로 이동할게요."
하야시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집사! 함부로 사인해 주면 안 돼. 오자마자 사인을 요구하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해.>
나호가 앞을 가리며 사인을 해주지 말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전생에는 저기에 사인을 하면서부터 일본 생활이 꼬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호구처럼 그냥 사인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
먼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청년처럼 하야시에게 물었다.
"혹시 이거 근로계약서 같은 건가요?"
"어? 우리말을 잘하네요? 맞아요. 근로계약서에요."
하야시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근로계약서라면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들이 하나도 없네요?"
"지금 적어 넣으려고 했어요."
하야시가 당황하며 화출판 주식회사를 적어 넣었다.
<이 쌍놈의 새끼들! 벌써부터 수작질 하려고 한 거지? 그런 거지?>
나호가 그대로 날듯이 뛰어서 하야시의 면상을 덮쳤다.
물론 나호는 하야시를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하지만 나호는 이를 미리 짐작한 듯 통과하자마자 다시 방향을 바꾸어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발톱을 세운 채 쭉 내리그었다.
하야시는 느끼지 못했지만 나호의 발이 그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갈랐다.
세상이 변하면서는 이것보다 훨씬 심한 것도 봤는데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멀쩡한 세상이기 때문에 나호의 행동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 같기도 했다.
"제 입 냄새 때문입니까? 그러고 보니 강대한씨는 입 냄새가 나지 않는군요? 한국인들은 모두 난다고 하던데?"
자신의 입 냄새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고 생각했는지 뒤로 물러나며 하야시가 말했다.
"항상 예외는 있는 법이죠. 일본인 중에서도 멀쩡한 사람이 많다고 하던데요?"
"우리 일본인은 유전적인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병세가 시작되었지만 일본인 중에는 아직 멀쩡한 사람이 의외로 많죠. 첫 통증도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심하지 않다고 하고요."
하야시가 은근히 일본인이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말했다.
<염병 지랄. 너희들이 가장 미개해서 반응이 느린 거야. 첫 통증도 같은 이유로 심하게 아프지 않았고. 너희는 이제 뭣 된 거야. 이렇게 어리석은 민족이니 변한 세상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거 아니겠어? 그치? 집사.>
나호가 열불을 토하는 순간에도 하야시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수술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성공하고···. 오션 28의 대처는 우리 일본만한 나라가 없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우리 일본을 주목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강대한씨도 일본으로 잘 오셨습니다."
"······."
"우리 일본에 거주하는 것만으로도 오션 28의 발병을 늦춘다는 조사결과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각지에서 이주를 문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시죠? 대부분의 호텔 예약이 이미 불가능합니다. 향후 1년까지 꽉 찬 상태라고 하더군요. 호텔예약이······."
하야시의 입이 다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에 거주하는 시간이 길수록 먼저 수술을 해주겠다고 하니까 그런 거잖아. 원전 때문에 빠졌던 관광객들 어떻게든 불러들이려고 되지도 않은 꼼수를 부리고 있으니···. 쯧쯧!>
'놔둬. 나중에는 저 모든 것이 화살이 되어서 일본을 겨냥하게 될 테니까.'
<하긴. 대변혁이 일어나고 마나통을 떼어내 사람은 각성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알려지고 일본이 몰매를 맞기는 하지. 미우라 놈 같은 놈만 없었으면 일본은 국제 사회에서 미아가 되었을 텐데.>
대변혁이 일어나고 일이 년은 나라간 왕래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장거리 워프 게이트들이 생겨나면서 국제교류가 다시 재개되었다.
이때 일본은 엄청난 비난을 받았었다.
하지만 미우라 놈 같은 강자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아무도 일본을 비난하지 못했다.
각성자의 힘이 국력이 되는 시대였다.
일본에게는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겠지만 우리에게는 아니었다.
국제적인 도움마저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때부터 강대국간 뒷거래가 있지 않았나 싶다.
"자, 이제 됐죠? 사인하고 지장 찍으세요."
하야시가 화출판 주식회사가 적힌 고용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온전한 마나통 수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