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마나통은 안녕하십니까?-30화 (30/350)

30. 한 달 전

상태창으로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상태창에는 두 개의 시각이 표시되어 있었다.

하나는 한국의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시각이었다.

한국과 일본은 동일한 표준시(標準時)를 사용하기 때문에 표시되는 시각은 동일했다.

대변혁 이후 상태창이 표시하는 표준시는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했다.

마나통증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고 각성자 비율도 가장 높았던 것으로 보아 대변혁에 가장 잘 적응할 민족으로 우리 민족이 선택된 것 같았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여러 정황을 미루어보아 아주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표준 시각이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길 일본이 아니었다.

일본은 상태창에 표시되는 표준시각이 일본을 기준으로 하는 시각이고, 일본은 대변혁에 선택된 민족이라고 우겼다.

우리와 일본이 동일한 시각을 사용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주장을 할 법도 했다.

그러다 크게 망신을 당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대변혁의 전조 증상인 마나통증이 시작된 순간부터 대변혁에 관한 모든 기준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했다.

그것은 간혹은 축복으로, 간혹은 재앙으로 다가왔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기회가 더 많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상태창에 표시되는 시각만 해도 대한민국은 분명 축복을 받은 것이었다.

처음 상태창을 얻으면 단 하나의 시각만이 표시된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표준 시각이었다.

그리고 모든 일정은 그 시각을 기준으로 일어났다.

지금 내 상태창처럼 자신이 현재 있는 곳의 시각을 동시에 나타내기 위해서는 마나로 일반 상점을 열고 '상태창'에 관한 상품 목록에서 '시각표시'를 구매해야 했다.

일본에 도착하는 순간 나에게는 두 개의 시각이 표시가 되었지만 그것은 특별 서비스 중의 하나로 제공되는 것이었다.

아무튼 한국 시각으로 2029년 1월 1일이 되는 순간 마나통증을 느낀 모든 사람은 비세계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 시험을 치르게 된다.

이 시험은 각성자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중요한 시험이었다.

특히 이곳에서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발현율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말이 있었다.

비세계를 제법 가장 많이 기억한다고 우긴 각성자가 한 말이었는데 확인되지 않는 말이었고 확인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발현율을 높일 수 있든지 없든지 간에 비세계는 대변혁 이후의 삶을 결정짓는 곳이었다.

불려갈 때마다 경우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1주일 이상 비세계에서 머물게 된다고 한다.

이 사실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이유는 각성자라고 해도 비세계에 있었던 일을 모두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인은 비세계에 자신이 다녀온 것 자체를 기억하지 못했다.

각성자의 경우에는 발현율이 높을수록 비세계에 대한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지만 말이다.

향후 알려진 것에 의하면 불려가는 것은 총 12회.

2029년 1월 1일을 시작으로 매달 첫 날 불려가게 되고 마지막 소환이 끝났을 때 각성자들은 비세계를 기억했다.

그것이 2029년 12월 1일!

총 열두 번 비세계를 다녀온 후였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2030년 1월 1일 세상은 대변혁을 맞이했다.

매번 비세계에 불려가 시험을 치르는 동안 현실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 시험을 다녀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은 2028년 12월 1일.

정확하게 첫 시험을 위한 소환까지 한 달이 남은 시점이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드디어 원하던 것 중의 하나를 손에 쥐었다.

취업비자.

대학 졸업자가 아니기 때문에 일본에서 취업비자를 받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의외로 손쉽게 취업비자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군에 입대하기 전 2학년 1학기까지 마친 상태였고, 군대에서도 학점 은행제를 이용해서 학점을 취득했었다.

예전에는 군대에서 이런 제도를 활용하기 쉽지 않았다고 하지만 요즘은 권장하는 추세여서 분위기에 휩쓸려 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에 와서도 인터넷 강의로 학점 취득을 계속했더니 취업비자를 위한 학점은 차고 넘쳐서 대학 졸업이라는 첫 번째 자격조건은 쉽게 달성을 했고, 언어능력은 원어민 못지않았기 때문에 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화장 주식회사와 화 출판 주식회사에서는 어떻게든 나를 계속 고용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더더욱 쉽게 취업비자를 발급 받을 수 있었다.

이것으로 대변혁이 일어나기 전인 2029년 12월 말일까지는 이곳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말일까지 있을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2029년 12월 1일이 되면 각성자들이 대변혁이 올 것을 말하게 될 것이고 그럼 수술을 받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다.

온전한 마나통을 얻을 수 없다면 내가 일본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취업비자로 대변혁 전까지 일본에 있으면서 마나통을 얻을 수 있는 발판이 확보된 셈이었다.

취업비자가 발급이 되자 회사는 웬일인지 먼저 휴가를 주겠다고 했다.

그동안 휴가도 없이 일을 시켰던 것이 미안했던지 보름이나 되는 유급휴가를 내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휴가를 낼 생각이었기 때문에 급하게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광주로 내려갔다.

광주역에서 화순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춘양면 월평리로 가는 직행버스가 있었다.

<이 버스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버스구나. 엄청나게 변했네. 집사 그치?>

버스에 오르며 나호가 말했다.

그랬다.

이전에는 이런 버스는 없었다.

그런데 우리 회사가 생기고 월평리를 찾는 사람이 늘자 아예 광주역이나 터미널에서 월평리로 바로 가는 직행버스가 생긴 것이었다.

'미리 땅을 사두길 잘했지?'

<잘했지 그럼. 내가 적극 추천했던 거 잊으면 절얼대 안 된다.>

나호가 유난히 절대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말했다.

회사를 설립하기 전 월평리 2구의 땅은 모조리 사들였었고, 회사초창기에도 주변에서 땅을 판다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사들였다.

그래서 현재는 처음 회사를 세울 때에 비해 땅이 2.5배 정도 넓어진 상태였다.

회사가 자리를 잡고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제는 땅을 사려고 해도 내놓는 사람이 없는 실정이었다.

회사와 내 명의로 된 땅 주변으로 가게들이 많이 생겼다는 말을 큰아버지와 어머니께 이미 들은 상태였다.

이전에 집을 팔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집을 고쳐서 직원들의 숙소로 제공했기 때문에 원룸 같은 건물은 필요 없는데도 원룸이나 펜션 같은 건물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말씀도 하셨다.

버스가 춘양면에 들어서자 부모님과 큰아버지의 말씀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와우! 집사! 저기 봐. 노래방도 생겼어. 당구장도 있네. 직원 중에 젊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왜 노래방과 당구장이 있지? 영업이 되나?>

'물건 받아가려고 기다리는 유통업자들도 있고, 회사 구경을 오는 경우도 많다고 하잖아.'

<무슨 회사 구경을 와? 이해가 안가는 사람들이야.>

'입 냄새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았으니까 그렇지. 그 중에는 독도의 비법을 원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말이야.'

<원액은 세 분이서 만드셔서 절대 외부로 알려질 염려가 없는데 헛수고들 하고 있어.>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헛수고라고 생각하지 않겠지.'

독도는 현재 최초 판매 가격의 절반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정부가 절반 금액의 절반 즉 최초 금액의 25%를 보조하고, 우리 회사가 25%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정된 금액이었다.

어차피 그 가격으로 팔아도 손해가 나지 않는데 정부에서는 우리가 가격을 하향한 만큼 세금 혜택을 주고, 직원들 월급의 일부도 고용증진 정책 등을 통해 보조해 주었다.

사실 이런 혜택이 없다고 해도 회사가 자리를 잡으면 금액을 하향할 생각이었다.

우리 회사의 목적이 돈보다 마나통 보존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회사가 이익을 포기하고 입 냄새 제거 음료를 풀자 우리 회사의 이미지가 매우 좋았다

시골집이기는 하지만 전 직원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것도 호평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직원에게 집을 제공하자 가족 모두가 이주를 하는 경우도 있어서 아이들 등하교를 책임지는 스쿨버스까지 생겨났다.

사람이 떠난 마을에 생기가 돌고 있는 것이었다.

월평리에 도착하자 튼튼하게 보이는 울타리가 보였다.

<집사가 말한 대로 잘 세워뒀네. 걱정했는데···.>

'큰아버지께서는 이제는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으실 거야.'

<그러시겠지. 이제 말할 거야?>

나호가 버스에서 내리며 말했다.

'고민 중이야. 이곳의 기억을 얼마나 가지고 가게 될지 모르잖아.'

현실에서 비세계를 기억하지 못하듯이 비세계에서는 현실을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사람마다 현실을 기억하는 정도가 달라서 말을 해드려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불명확한 기억은 자칫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같이 이동되도록 할 거야. 전생에는 따로 이동이 돼서 도움이 되지 못했거든.'

소환되기 전 같은 공간에 있어야 같은 곳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

이번에는 반드시 부모님, 큰아버지와 함께 이동이 되도록 할 것이다.

월평리는 회사는 물론이고 마을까지 활기가 넘쳤다.

공장에 특별히 위험한 시설이 없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았다.

<아이들이 보이니까 좋다. 예전에는 마을이 너무 조용해서 적막했는데···.>

나호가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에는 처음 보는 얼굴들이 보였다.

아마 대부분 화순에 살던 사람일 것이다.

"저 왔어요."

"아이고 우리 아들!"

어머니께서 가장 먼저 맞아주셨다.

직원들이 없었다면 안고는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셨을 것이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런지 안아주시는 것으로 반가움을 대신하시고는 나를 이끌었다.

아버지와 큰아버지께서도 굴비 엮듯이 줄줄이 따라오셨다.

어머니께서 나를 이끄신 곳은 할아버지 댁이었다.

이제는 할아버지 댁이 아닌 우리 집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겠지만 말이다.

본채에 부모님, 별채에 큰아버지께서 머물고 계셨다.

본채도 충분히 넓어서 같은 건물에 머물러도 되지만 큰아버지께서 별채에 머물기를 원하셨다.

본채에는 내가 올 것을 대비해 이미 밥상이 차려진 상태였다.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셨어요?"

막 차려진 국과 밥을 보면서 말했다.

"뻔하지. 그리고 직행 버스가 춘양면을 통과하면 자동으로 신호가 오게 되어 있어. 하도 관광객이 많이 찾아와서 설치를 해뒀거든."

"그거 좋은 시스템이네요."

"흠! 흠! 그건 내가 하자고 한 거야. 버스회사하고 말만 잘 되면 의외로 간단하다고 해서 하자고 했지."

아버지께서 조금은 자랑하듯이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역시 은근 귀여우셔. 맘껏 칭찬해 드려. 집사.>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이렇게 갓 차린 따뜻한 밥상을 받을 수도 있잖아요."

아버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어서 먹어. 한국음식 그리웠지?"

"요즘은 어디서나 한국음식 먹을 수 있어요. 엄마 손맛이 그리워서 그렇지."

"그러니까. 어서 먹어."

"같이 드세요."

"우리는 회사 직원들 하고 조금 전에 먹었어. 되도록 식사는 함께 하려고 하거든. 워낙 바빠서 직원들 하고 이야기 할 시간이 없어서."

회사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휴일을 가져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운동은 하고 계시죠?"

"열심히 하고 있다.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있어. 직원들도 스트레스 해소 된다고 좋다고 하고."

회사가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두세 시간은 꼭 운동을 하셔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었다.

공장으로 보이는 건물 중의 하나는 공장이 아니고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사실 신생회사가 그런 공간을 만드는 것은 모두 미친 짓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 공장을 세울 때 옆에 함께 세워서 날씨에 상관없이 어떤 운동이든 가능하도록 만들어두었다.

그리고 우리 회사에는 특별한 한 사람을 직원으로 고용을 했는데 그건 바로 운동 코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전혀 관여를 하지 않았지만 이 사람만큼은 내가 직접 고용을 한 사람이었다.

전생에 인연이 있던 사람으로 큰아버지처럼 옆에 두고 싶어서 직접 찾아가서 모시고 온 사람이었다.

전생과 달리 지금은 우리 마을로 아예 이주를 한 상태였다.

마을로 이주를 했으니 그도 전생과 같은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어떠세요? 세 분 모두 1년을 배우셨는데?"

난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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