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비세계(秘世界)
<집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네. 나도 그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나호가 내가 선택한 물건을 보며 말했다.
일반상점에서 선택한 것은 인벤토리였다.
사실 인벤토리는 '인류 최초로 권능을 보유한 각성자' 보상으로 받아서 가지고 있었다.
크기는 10*10*10센티미터!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인벤토리였다.
작아 보이지만 이곳에 귀금속을 담는다면 상당량을 담을 수 있고, 무엇보다 몬스터를 잡았을 때 나오는 가장 중요한 물품인 몬스터 마나홀이나 몬스터 마나통을 이곳에 보관할 수 있었다.
꿈에 떡 얻어먹을 정도로 간혹 나오는 마정석도 이곳에 보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생에 각성자들 대부분은 가장 작은 사이즈인 10*10*10센티미터인 인벤토리는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아니 일반인들도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인은 마나를 모으기 쉽지 않아서 상점을 오픈하기 어려웠지만 각성자처럼 능력치나 스킬에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어서 인벤토리에만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일반인들도 마나만 있으면 일부 능력치나 스킬을 살 수 있었다.
실제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마나만 버리는 꼴이 된다는 말이었다.
이걸 모르고 대변혁 초기에는 일반인들이 마나를 허비하는 일이 많았다.
시스템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고, 대변혁 초기에는 인터넷이나 통신이 두절되면서 정보교환이 쉽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물론 정보를 교환할 수 있어도 마나를 허비하고 알게 된 정보를 알릴 사람은 많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대변혁 초기 많은 물자를 가지고 있던 일반인 중에는 물건과 마나를 교환하는 식으로 많은 마나를 모은 경우가 있었다.
이 사람들 중 일부는 꽤 넓은 인벤토리를 구매한 사람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전문 짐꾼으로 활동을 하면서 각성자 못지않은 대접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물론 늘 가슴 통증은 느끼고 살아야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비세계에는 어떤 물건이 있을지 모른다.
전생에는 비세계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기억술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 세계를 모두 기억할 수 있으니 챙겨올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챙겨 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넓은 인벤토리는 필수였다.
최초로 구매하는 인벤토리의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차근차근 구매하지 않게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럼 가장 큰 인벤토리를 아이템 획득권으로 얻을 수 있었을 거야.>
물건마다 상점에서 파는 방식이 조금씩 달랐는데 대부분은 단계별로 구매할 수 있었다.
스킬이 성장하는 것처럼 점진적으로 구매가 가능했던 것이다.
상점에서 파는 가장 작은 크기의 인벤토리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크기였다.
같은 크기의 인벤토리를 반복해서 구매할 수도 있고, 마나를 더 모은 다음 한 단계 위의 인벤토리를 구매할 수도 있었다.
아래 단계의 인벤토리를 하나라도 구매해야 다음 단계의 인벤토리를 구매할 수 있었다.
상점에서 파는 가장 작은 크기의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상점에서 구매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작은 크기의 인벤토리를 먼저 하나 구매했다.
10*10*10센티미터의 인벤토리 가격은 10마나였다.
대변혁 초기에는 결코 작지 않은 마나였지만 차후에는 그리 부담되지 않은 가격이었다.
하지만 나는 10마나도 줄 필요가 없었다.
5마나만을 지급하고 10*10*10센티 인벤토리를 구매했다.
인류 최초로 인벤토리를 가진 각성자가 된 보상으로 50% 할인구매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띠링! F급 인벤토리를 구매하셨습니다. 기존에 가지고 계신 F급 인벤토리가 확인되었습니다. 합치시겠습니까?]
여기서 합치지 않겠다고 하면 1번 인벤토리, 2번 인벤토리 이런 식으로 구분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한 번 합쳤다고 해서 다시 나눌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선 합치겠다고 했다.
[띠링! 인벤토리가 20*10*10센티미터가 되었습니다.]
<마나 1이 정상적인 성인 한 명의 마나 정도 되는 거지?>
"지금은 아니지만 마나통이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그렇지. 뽑아 쓰는 것은 제각각이겠지만 말이야."
<그때가 되면 집사에게는 하루에 얼마의 마나가 쌓이는 거야? 엄청나겠는데?>
"하루에 그렇게 쌓인다면 미우라가 세계 1위가 되는데 20년 이상이 걸리지 않았을 거야. 각성자는 쉽게 마나를 모으지만 일반인은 아니잖아. 사냥을 하지 못하는 일반인이 마나를 모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워. 기억하고 있지?"
<자꾸 잊어버리네. 집사가 각성자였기 때문인지 각성자 위주로만 생각한다니까.>
"그래도 한국인은 가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아서 미우라 놈에게 보탬이 많이 됐을 거야. 일본 놈들은 어떤지 봐야지."
대답을 하면서 빠르게 F급 인벤토리를 여덟 개를 더 구매했다.
그래서 완성된 인벤토리는 100*10*10센티미터인 인벤토리였다.
[띠링! 강대한님께서 구매하실 수 있는 F급 인벤토리는 이제 한 개 남았습니다.]
<시스템은 도대체 이렇게 마나를 모아서 어디에 쓰는 거야? 정말 심할 정도로 박박 긁어가는 것 같아.>
상점창에 나타난 인벤토리 수량을 보면서 나호가 열불을 토했다.
상점창에 뜨는 물품의 수량은 개인이 구매할 수 있는 한도를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인벤토리처럼 일정 이상을 구매하고 나면 다시는 구매할 수 없는 물품도 있고, 물약처럼 몇 시간이나 하루 단위로 구매 수량이 갱신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것은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스킬이나 권능 같은 경우에는 인류 전체에 단 하나만 존재하거나 몇 개만 존재해서 누군가가 구매하면 영원히 사라지는 것도 있었다.
미우라 놈이 이것을 이용해서 가슴통증까지 없앨 수 있는 입 냄새 제거 음료를 오직 자신만 만들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이런 스킬이나 권능을 소유한 사람은 결코 자신이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소유한 사람이 죽으면 다시 상점에 등장하기 때문에 스킬이나 권능을 얻기 위해 살인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F급 인벤토리인 10*10*10센티미터의 인벤토리의 경우에는 10마나면 구매할 수 있지만 그 위 단계인 E급 인벤토리의 경우에는 20*20*20센티미터로 여덟 배 확장이 되지만 100마나에 구매해야 했다.
D급인 30*30*30센티미터는 27배 확장되지만 300마나.
C급인 50*50*50센티미터는 125배 확장되지만 2000마나를 주고 구매해야 했다.
수량에 제한이 없다면 F급 인벤토리만 사서 합치는 것이 나았지만 그걸 허락할 시스템이 아니었다.
F급은 열 개, E급은 다섯 개, D급은 세 개, C급은 개인당 두 개만 구매할 있고, B급부터는 개인당 하나씩만 구매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남은 F급 인벤토리까지 구매를 했다.
그리고 그것은 합치지 않고 따로 두었다.
지갑처럼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으로 100*10*10센티미터 인벤토리와 지갑용으로 사용할 10*10*10센티미터 인벤토리 이렇게 두 개의 인벤토리를 갖게 되었다.
가진 마나에서 총 50의 마나를 소모한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체력을 비롯한 물약을 구매할 차례였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했던 것처럼 일반 상점에서 물약코너로 가서 가장 먼저 체력물약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런 메시지가 들려왔다.
[띠링! 현재 이곳에서는 구매하실 수 없는 물품입니다.]
다른 물약들도 마찬가지였다.
물약을 구매할 수 없다면 다음으로 선택할 것은 옷이었다.
미리 군화를 준비해 두었으니 신발은 당장 살 필요는 없지만 눈과 비를 막아주고 몸 전체를 가려줄 망토 정도는 갖추고 있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물약과 마찬가지로 의류의 구매도 되지 않았다.
아마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는 모두 막혀 있는 것 같았다.
"상점 구매가 안 되면 필요한 물건이나 챙겨봐야겠어."
<가져가지 못할 수도 있잖아?>
"시도는 해봐야지."
비세계에는 이곳의 물건을 가지고 갈 수 있다는 말도 있고 그렇지 않다는 말도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도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각성자도 마찬가지였다.
몸에 두르고 있던 금붙이는 가지고 간다는 것이 확실하지만 그 이외에는 모두 숨겨진 상태다.
12월 첫날 마지막 소환에 다녀오고 나서야 각성자만이 비세계를 기억했고 그것도 온전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모른다고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인벤토리에 넣어도 가지고 갈 수 없다면 모두 이곳에 남을 것이다.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우선 챙길 수 있는 것은 다 챙겨야했다.
가장 먼저 인벤토리에 넣은 것은 몇 개의 라이터와 성냥, 종이였다.
그리고 그동안 모아둔 백여 개의 나무젓가락을 넣었다.
나무젓가락은 의외로 던전에서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그 다음으로 챙긴 것은 여벌의 옷과 두껍고 넓은 투명 비닐이었다.
비닐도 의외로 활용도가 높았다.
여벌의 옷을 투명 비닐로 감싼 후 단단하게 묶어서 최대한 부피를 줄였다.
이렇게만 해도 큰 인벤토리의 절반이 차버렸다.
여기에 미리 준비해 둔 캠핑용 칼과 쇠꼬챙이를 넣었다.
"빼먹은 것이 뭐지? 안 넣은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아! 음식."
그동안 모아둔 통조림과 즉석밥, 물 두 병, 수저와 젓가락, 망토처럼 걸칠 수도 있는 모포까지 챙겨 넣는 것으로 인벤토리 준비는 마무리 되었다.
인벤토리 준비가 끝났으니 차근히 옷을 갈아입었다.
미리 준비해둔 오토바이용 레이싱 슈트를 챙겨 입고 장갑까지 착용했다.
레이싱 슈트 중에서 튼튼하면서도 활동이 용이한 것으로 고르고 고른 옷이었다.
레이싱 슈트를 입고 나니 정말로 비세계에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군화를 신고 목에 걸린 목걸이를 확인하고는 긴 봉을 들고 숙소를 나왔다.
그리고 다시 휴게소로 이동했다.
휴게소에 도착하고 나니 소환되기까지는 10분이 남은 상태였다.
<미우라 놈은 팬티 차림으로 자고 있어. 저 차림으로 불려 가면 고생할 텐데. 히히히.>
생각만으로도 즐거운지 나호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집사! 나도 같이 가게 되겠지?>
"일본도 같이 왔잖아. 그러니 거기도 함께 가게될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나도 어떤 곳으로 가게 될지 궁금하긴 하다."
전반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살짝 긴장이 되기도 했다.
<다녀와도 이곳의 시간이 단 1초도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나는 더 신기해.>
"전 세계 사람들이 다 같이 가는 것이니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알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런가? 마나통증을 느끼지 않았던 아이들은 가지 않잖아.>
"말이 그렇다는 말이야. 지구의 시간을 잠시 멈추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시스템에 비하면 우리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일 뿐인데."
<집사는 아니야. 집사는 유일한 인간이야. 전생을 기억하는 유일한 인간, 비세계를 기억하고 있고,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말이야. 그러니 더 이상 나약하다고 할 수 없지. >
"그렇게 따지면 너도 마찬가지잖아. 너는 유일한 산신령쯤 되려나?"
<왜 갑자기 산신령이야? 난 백호인데···.>
"옛날이야기에서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고 하더라. 산에 사는 호랑이를 산신령처럼 생각했다는 말이지."
<하긴. 예전엔 내게 제사를 지내네 마네 하면서 산에다 음식을 가져다 놓고 절을 하고 그랬어. 정작 나는 먹을 수도 없었는데 말이야.>
"네가 안 먹으면 누가 먹었는데?"
<제사 지내고 지들이 다 챙겨가더라. 산 여기저기에 조금씩 던져놓고 말이야. 산신령 대접이면 그렇게 하면 안 되지. 고운 접시에 오려주지는 못할망정···. 맘에 안 들었어. 대부분은 개미 밥이 되었지 뭐.>
"······."
<산에서 말이야. 호랑이나 늑대, 멧돼지 같은 짐승들이 최고일 것 같지? 아니야. 산을 지배하고 사는 것은 의외로 작은 곤충들이야. 단지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뿐이지.>
나호가 자신이 아는 숲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곤충이 국민과 비슷하구나 싶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로 인해 사회가 건강하게 돌아가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2029년 1월 1일 0시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순간 시야가 까맣게 변하며 주위 환경이 바뀌는 것 같았다.
찰나!
정말 찰나의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었다.
능력치 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