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진액 덩어리
대변혁이 일어나고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 중의 하나가 비명소리였다.
이제 비명소리만 들어도 대강 어떤 상황에서 지르는 소리인지 알 지경에 이른 것 같다.
"어어어! 어어어엄마야아아!"
"아악! 악! 악! 다다다아앙시이이신 누누누구우우야아?"
"으아악! 으악!"
프드덕! 프덕! 프더더더덕!
짹! 짹! 째래래래래! 찌이이루루룽! 찌룽!
쪼로롱! 쪼쪼롱옹! 까아아악! 피리리잉! 핑! 삐이이치! 삐치!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아오르면서 다양한 새소리를 냈다.
한꺼번에 이렇게 다양한 새소리를 듣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새들이 이렇게 소란스럽게 울 때는 잠깐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곳에 몬스터가 없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몬스터가 있다면 분명 이쪽으로 관심이 쏠렸을 것이다.
그나저나 미우라 놈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로 떨어졌는지 어제 이곳에 소환되었을 때부터 찾았는데도 찾을 수가 없었다.
소환되기 전에 가까이 있을수록 가까운 곳에 소환된다는 말대로라면 내가 소환된 곳과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미우라 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멀어지다 엄청나게 큰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이 나무에 오르면 멀리까지 보일 것 같아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큰 나무는 처음 보는 것 같아. 집사는 이렇게 큰 나무 본 적 있어?>
'비슷한 나무는 본 적 있어. 이 나무가 더 큰 것 같지만 말이야.'
<조심해.>
'걱정 마. 나무를 오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다행히 껍질이 울퉁불퉁해서 나무를 오르는 것은 어려움이 없었다.
높아질수록 시야가 넓어지면서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명소리에 놀라 깨어나는 사람도 보이고 재빨리 수풀 사이로 몸을 숨기는 사람도 보였다.
하지만 다행히 아무도 내가 오르고 있는 나무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소환된 곳과 나무와의 거리가 조금 있기도 했지만 당장 상황 파악하기도 바쁜 것 같았다.
간간이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나무를 계속해서 올랐다.
민첩과 감각은 나무를 오르는 것도 수월하게 했다.
바닥에서 10미터 정도 오르자 나무의 중간에 큰 구멍이 하나 뚫려있었다.
<집사! 밤에 여기서 자도 좋겠다.>
'생각해 보자.'
10미터를 올랐는데도 아직 옆으로 뻗은 가지가 하나도 없었다.
정말 꼿꼿하게 잘 자란 나무였다.
'나호야. 미우라 놈 있는지 잘 살펴봐.'
<그렇지 않아도 찾고 있었어. 현실에서는 손을 댈 수 없어서 보아 넘겼지만 여기서는 아니잖아.>
나호의 눈이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어림짐작으로 20미터는 오른 것 같은데 아직도 첫 번째 가지에도 닿지 못했다.
정말 특이한 나무였다.
꼭대기까지 오르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더 오르면 숲을 살피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았다.
사실 지금도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이었다.
나뭇잎 때문에 사람들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게 된 것도 한참 전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지형을 살피기 위해 꼭대기까지 올라볼 생각이어서 쉬지 않고 계속해서 위로 올랐다.
45미터 정도 올랐을 때 드디어 옆으로 뻗은 첫 번째 가지가 있었다.
가지의 두께도 엄청나서 그 위에 누워서 자도 걱정이 없을 정도였다.
나호가 앞장서서 가지 위를 걸었다.
나호의 꼬리가 기분 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녹색 융단을 깔아놓은 것 같다. 던전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야. 그치?>
나호의 목소리에 편안함이 묻어났다.
시원하기는 정말 시원했다.
이곳은 환경도 정말 좋았다.
던전 중에서는 환경이 열악한 곳도 많은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계속 올라보자."
첫 번째 가지 다음부터는 3미터에서 5미터 간격으로 가지가 있었다.
"미국에서 봤던 레드우드와 비슷하게 생겼지?"
<맞아. 미국에서 봤던 나무다. 그 나무 옆에 던전 생겨서 갔었지? 짐꾼이었지만···.>
"난이도가 높아서 짐꾼으로 참여했지. 일반인은 도저히 짐꾼으로 들어갈 수 없는 던전이었으니까."
<그 나무에는 낙뢰를 방지한다고 피뢰침도 있었잖아. 그 던전에서 집사 참 고생 많이 했었는데······.>
나호가 재잘거림을 들으면서 나무를 오르자 어느새 꼭대기였다.
<우와아아! 이런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해? 집사 너무 좋다. 그치? 각성을 가리는 곳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나호는 말이 많았다.
전생에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지만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고 하더니 그 많은 세월동안 켜켜이 쌓아둔 이야기들을 모조리 풀어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호의 말이 싫지 않았다.
목소리도 좋고, 무엇보다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더 좋은 것 같았다.
나호의 재잘거림을 들으면서 지금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한정된 공간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가 있는 곳은 산이었는데 끝도 없이 산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나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저기는 호수 같지?"
<내가 보기에도 호수 같아. 그런데 저기까지 가려면 열흘 이상은 걸릴 것 같아.>
"열흘도 더 걸릴 거야. 산에서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먼 경우가 더 많잖아. 어쩌면 이 숲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설정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마을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이 숲에서 생존해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몬스터가 보이지 않는 것은 다행이기는 한데···."
어제 잤던 작은 동굴은 사실 천연 동굴은 아니었다.
짐승이나 몬스터가 오래 전에 사용했던 것 같았다.
들어가서 잠을 잘 정도의 크기였으니 짐승이나 몬스터라면 상당한 덩치를 자랑할 것이다.
그래서 새소리에도 조심 또 조심을 했는데 새와 인간을 제외하고는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내려가자."
<내려갈 때 더 조심해야해. 알지?>
"걱정하지 마."
나호가 내려오는 것을 걱정했지만 전생에 각성자로 산 세월이 23년이었다.
그 세월 동안의 경험이 있는데 이런 나무에서 헤맬 리가 없었다.
쉽게 나무를 내려오다 10미터 지점에 파인 구멍 안을 들여다보았다.
나무가 워낙 커서 구멍의 크기도 상당했다.
<들어가지 마. 뭐가 있을 줄 알고 들어가려고 하는 거야?>
'괜찮아. 살짝만 들어가 보자.'
주변에 누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심상으로 말을 하고는 재빨리 나무 안으로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 몸이 아래로 쑥 꺼졌다.
밖에서 봤을 때는 아래로 1미터쯤 파여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오니 3미터 정도 아래로 파여 있었던 것이다.
<여기 신기하다. 위로는 얼마나 구멍이 뚫려 있으려나?>
"올라가 보면 알 수 있겠지."
나무속이라 소리가 울리면서 목소리가 훨씬 좋게 들렸다.
<오올! 집사 성우 해도 되겠다. 여기에서 노래하면 어떻게 들리려나?>
"노래를 하면 밖에까지 소리가 울릴 거야. 올라가 보자."
<밖에까지 들리면 귀신 들렸다고 이 부근으로는 아무도 안 올 것 같은데? 그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이런 곳에서는 사람이 제일 위험하잖아.>
나호의 말을 뒤로 하고 위로는 어디까지 구멍이 뚫려 있는지 살피기 위해 나무 안의 구멍을 오르기 시작했다.
밖은 나무껍질 덕분에 위로 오르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데 안쪽은 매끄러워서 위로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중간에 하나씩 나무 진액이 뭉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잡고 올라갈 수 있었다.
위로는 30미터 정도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중간에 다시 옆으로 움푹 파인 곳들이 있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서 잠을 자면 좋을 것 같았다.
움푹 파인 곳이 여러 개였다면 캡슐 호텔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무튼 구멍의 끝에 접근했을 때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가 울렸다.
[띠링! 부근에 마나가 깃든 물건이 있습니다.]
이런 곳에 마나통이 있을 리 없으니 아이템일 확률이 높았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전생에 20년을 넘게 각성자로 살면서도 아이템을 획득해 본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그만큼 귀한 것이 아이템이었다.
나호도 메시지를 들었는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보다 3미터를 앞장 설 수 있는 나호가 먼저 뭔가를 발견했다.
<집사. 이거 같아. 그런데 이게 뭐지?>
나호가 천장에 달라붙어서 뭔가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빠르게 구멍을 올라가서 보니 천장에 나무진액 같은 것이 뭉쳐서 아래로 축 쳐져있었다.
석회암 동굴 천장에 고드름처럼 매달린 종유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종유석도 큰 것은 엄청나게 크듯이 나무진액처럼 보이는 것도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내가 껴안아도 내 품에 다 들어올 것 같지 않은 크기였다.
팔을 뻗어 살짝 만져 보았다.
구멍을 오를 때 밟거나 잡았던 나무진액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 이것은 아니었다.
물렁물렁한 정도는 아니었고 살짝 말캉했는데 겉은 잘 손질된 양가죽처럼 아주 부드러웠다.
이대로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권능 마나의 눈이 말한 마나가 깃든 물건이 아무래도 이것 같은데···. 너무 커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인벤토리에도 들어갈 크기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걸 들고 내려갈 수도 없었다.
그때 메시지가 들렸다.
[띠링! 마나가 깃든 물건이 있습니다. 수거하시겠습니까?]
마나통 수거 스킬이 여기에서도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직업효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자동 수거를 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수거를 하고 싶기는 한데 이걸 어디에 보관해? 인벤토리에 들어갈 수도 없는데?"
[띠링! 수거하시겠습니까?]
시스템은 내가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다시 수거하겠냐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집사! 이거 아무래도 수상하다. 인벤토리에 들어갈 수도 없는데 어떻게 자동 수거를 해주겠다는 거야? 설마 마나통 저장고에 넣어주겠다는 건가?>
그렇지 않아도 마나통 저장고를 얻고 난 후 다른 물건이 들어가는지 몇 번이고 실험을 했었다.
하지만 마나통을 제외하고는 어떤 물건도 넣을 수 없었다.
인벤토리와 비슷한 것처럼 보여도 결코 인벤토리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나호 말대로 살짝 불안했지만 비세계에서 처음으로 만난 마나가 깃든 물건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나무 꼭대기에서도 봤던 것처럼 이 나무는 이곳에서 가장 큰 나무였다.
그런 나무가 품고 있는 것이라면 보통의 물건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수거하겠어."
[띠링! 마나가 깃든 물건을 자동 수거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어서 피할 사이조차 없었다.
뜨드득! 뜨득!
천장에 매달려 있던 것이 천장과 분리 되더니 그대로 내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나무 속 구멍을 타고 올라 잔뜩 몸을 내민 채 손을 위로 뻗어 만졌던 물체였다.
그런 물체가 천장에서 아주 깔끔하게 분리되더니 자유낙하를 시작한 것이다.
거대한 가죽 주머니 같은 물체를 피해 재빨리 몸을 벽으로 붙이려고 했다.
투둑!
하지만 매끄러운 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상황이어서 급격한 움직임을 견디지 못한 발판이 떨어져버렸다.
벽에 눌러 붙은 결정을 밟고 있던 참이었는데 발판이 사라져 버리자 몸이 아래로 푹 꺼졌다.
벽에 붙은 결정을 아직은 손으로 잡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한 곳에 무게가 쏠리자 이것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 모든 일들이 무척이나 느리게 느껴졌지만 사실은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밟을 것이 사라지고 잡을 것 마저 사라져 버리자 본능적으로 무엇이든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뻗은 손에 잡힌 것은 천장에서 떨어져 내린 물주머니 같은 진액 덩어리였다.
진액 덩어리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조금 전에는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 몸을 뒤로 뺐었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잡기 위해 몸을 내밀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몸은 빠르게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몇 초도 지나기 전에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런 급박한 순간인데도 바닥이 나무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사. 잡아! 잡아! 잡고 올라타!>
나호가 떨어져 내리는 진액 덩어리 위에서 크게 외쳤다.
마치 자신이 나를 잡아 올려주려는 듯 절박하게 발을 내밀기까지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나호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호는 영체였다.
나호가 진액 덩어리를 내 쪽으로 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너무도 절박하게 애를 쓰고 있어서 순간 가슴이 찌르르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손끝에 진액 덩어리가 닿았다.
빛의 정기의 안식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