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빛의 정기의 안식처
손끝에 말캉한 것이 닿은 순간 그것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부드럽게 손질 된 양가죽 같은 표면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집사! 집사! 제발 잡아!>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던 것 같다.
그 사이 나호는 진액 덩어리가 빨리 떨어지라고 진액 덩어리 위에서 방방 뛰고 있었다.
내가 잡기 쉽도록 도우려는 것이었다.
영체이기 때문에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지만 나호는 지금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호의 간절한 바람이 통했을까?
그 순간 진액 덩어리가 다시 손끝에 닿았다.
손끝에 닿는 순간 손을 쭉 뻗으면서 몸을 위로 날렸다.
때마침 나무에 뚫린 구멍으로 돌풍이 불어 들어왔다.
바람은 구멍을 따라 위로 올라왔고, 마침 위로 몸을 날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 내 몸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주었다.
그 덕에 진액덩어리 위로 한 팔이 올라갔고 다른 한 팔은 반대쪽으로 향하며 진액덩어리를 끌어안을 수 있었다.
진액덩어리를 끌어안은 순간 몸의 방향을 틀어 진액덩어리가 아래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잘했어. 집사! 지금이야! 뛰어!>
나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끌어안고 있던 진액 덩어리를 놓으면서 다시 한 번 몸을 날렸다.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몸이 뜰 리 없었지만 약간이나마 충격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진액 덩어리가 바닥에 먼저 떨어지고 그 위로 철퍼덕 하는 소리와 함께 내가 떨어졌다.
온 몸으로 충격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나호가 부르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더니 온 몸이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정신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아무리 각성자라고 해도 33미터 높이에서 떨어졌다.
즉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까맣게 변했는데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치 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온 몸이 축축하다고 느꼈는데 잠시 시간이 흐르자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잔뜩 목이 쉰 나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죽은 거 아니지? 그렇지? 대답 좀 해봐. 집사! 집사아아아! 아아아앙! 크화와아아앙! 크와아아앙!>
"······."
<이렇게 죽으면 안 돼! 집사아아! 복수도 못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가버리면 어어어엉! 어엉! 으아아앙!>
나호가 일곱 먹은 아이처럼 엉엉 목 놓아 울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을 하고 싶은데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눈도 떠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참을 그렇게 서러운 울음을 듣고 있어야 했다.
깊은 물속에 잠겨 있었던 것 같았던 몸이 서서히 수면위로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한데 아픈 곳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는 아무리 애를 써도 떠지지 않던 눈이 갑자기 번쩍 떠졌다.
그 순간 까무러지는 줄 알았다.
붉게 충혈 된 짐승의 눈이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사! 집사!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어?>
나호는 겨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너무 울부짖어서 목이 잔뜩 쉬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괜찮아. 너는?"
<내가 문제가 아니잖아. 나는 영체인 상태라 1000미터 위에서 떨어져도 멀쩡하단 말이야.>
나호의 목소리에 눈물이 가득했다.
<물약이라도 사놨어야지. 이게 뭐야 이게. 허어엉!>
"나 괜찮아. 이제 아프지 않아."
<정말 아픈 곳 없어? 어서 물약이라도 하나 사서 먹어. 마나 뒀다 어디에 쓰겠어. 아끼다 똥 되는 거야. 지금 바로 구매해. 어서!>
많이 놀랐는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구매를 재촉했다.
"알았어. 숨 좀 돌리고."
<왜? 앞으로 떨어져서 폐에 무리 갔어? 혹시 갈비뼈가 부러진 것은 아니지?>
"그런 거 아니야."
대답을 하면서 몸을 뒤집었다.
등을 바닥에 대니 훨씬 몸이 편안했다.
<집사. 기능에 문제없지? 터지지 않았지?>
나호가 냉큼 배 위에 올라앉더니 슬쩍 고개를 뒤로 향하며 물었다.
터지지 않았냐고 물을 때는 시선이 내 바지춤을 향하고 있었다.
"별 걱정을 다하고 있어. 멀쩡해. 걱정하지 마. 이래봬도 전생에 각성자 생활이 23년이야. 몸통과 머리에는 최대한 충격이 가지 않도록 노력했어."
<목은? 목은 괜찮아? 얼굴을 보호하려고 그랬는지 목을 뒤로 심하게 꺾던데···.>
"목도 괜찮아. 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나무에 나있는 구멍을 통해 햇살이 들어와야 하는데 햇볕이 전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해 떨어진지 두 시간 정도 됐어.>
"해가 진지 두 시간이나 됐다고? 그럼 도대체 몇 시간이나 이렇게 있었다는 거야?"
<열세네 시간은 족히 될 거야. 집사 죽은 줄 알고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비세계에서는 죽어도 현실에서는 죽지 않아. 단지 각성 가능성이 떨어질 뿐이지."
사실 비세계에서 죽는다고 무조건 각성을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각성은 종합 평가를 통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환되어 오자마자 죽어버리면 평가할 자료자체가 없으니 일반인이 되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진액 덩어리 위로 떨어진 것 같은데···. 나무가 다 흡수를 해버렸나?"
진액 덩어리로 보였던 주머니 안에는 말캉한 액체가 가득했었다.
덩어리가 워낙 커서 양도 엄청났을 텐데 바닥에 액체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진액 덩어리가 떨어진 적이 없던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게 터지면서 충격을 분산시킨 것까지는 좋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액체가 들어있었어. 집사가 그 액체에 완전히 잠겼었다니까. 집사가 더구나 엎드려 있어서 죽었다고 생각했어.>
나호의 목소리에 다시 눈물이 배었다.
"액체에 빠졌는데도 살았다고? 물에 잠긴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숨이 막히지는 않았는데?"
<그러니까 이상하다고. 집사가 그 액체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호흡을 하더라. 그래서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어. 그런데 그 액체가 집사의 몸으로 서서히 스며들었어. 액체가 전부 사라지고 나서야 집사가 깨어난 거고.>
"그 액체가 물약 같은 건가? 몸이 유난히 가볍기는 하네."
<혹시 모르니까 메시지 확인해봐.>
그 많은 양이 몸으로 스며들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미확인 메시지를 클릭했다.
[띠링! 축하합니다. 마나가 가득한 '빛의 나무의 정기(精氣)'를 흡수하셨습니다.]
그 많은 액체가 흡수되었으니 뭔가 많은 메시지가 쌓여있을 것 같았는데 이 메시지가 끝이었다.
몸도 가볍고 계속 누워있을 필요가 없는 것 같아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다시 메시지가 들려왔다.
[띠링! 빛의 나무가 정기를 담을 그릇으로 적합한지 강대한님을 살피고자 합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흡수되었던 정기가 다시 배출됩니다.]
<잠깐! 흡수됐던 것 때문에 집사가 죽지 않고 살아난 것 같은데 배출되면 설마···?>
[흡수로 인해 치유됐던 것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빛의 나무가 강대한님을 살피는 것을 허락하시겠습니까?]
허락을 할지말지를 묻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물음이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른다면 고민을 할지 모르겠지만 이곳이 어떤 곳인지 뻔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허락하겠어. 이대로 있으면 되나?"
[지금이 가장 좋은 자세입니다. 그대로 편하게 누운 채 손바닥을 바닥에 대주십시오. 힘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무와 접촉하는 면적을 넓히려는 것뿐입니다. 그대로 계셔주십시오.]
손바닥으로 매끈한 바닥이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진액으로 흥건했을 바닥이지만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빛의 나무가 강대한님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메시지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묘한 감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어차피 눈을 뜨고 있어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나호 밖에 없었기 때문에 굳이 눈을 뜨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눈을 감자 나호가 내 배 위에 올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마나홀과 마나통의 자극을 위해 가슴으로 파고들 때가 아니면 나호를 느끼기란 쉽지 않았다.
영체인 상태이기 때문에 눈을 뜨고 있을 때도 내 시야에서 벗어나면 느낄 수 없었는데 지금은 눈을 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호가 내 배위에 앉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기분 좋은 무게감이었다.
나호가 실체를 가지게 되면 지금보다는 훨씬 무거울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몸이 꿀렁꿀렁하며 살짝 움직였다.
분명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 몸이 저절로 움직였던 것이다.
꿀렁꿀렁?
이건 뭔가 이상했다.
상식적으로 몸이 꿀렁거릴 수는 없었다.
뭐지 하는 생각을 하려는 순간 다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안온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이 들자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려는 생각을 내려놨다.
그리고 나무에 온전히 몸을 맡긴다고 생각하며 힘을 풀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결코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 온몸으로 찾아왔다.
이런 느낌은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정말 기분 좋은 온도의 물이 온몸을 감싸는 것과 동시에 청량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스트레스가 일시에 사라지고 온갖 잡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너무 편안한 느낌에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나무에 몸을 맡기고 누워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찰나 같은 시간이었지만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을 것이 분명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기는 했지만 어둡기만 했던 나무 안으로 옅은 빛이 느껴졌다.
그렇게 빛을 느낀 순간 메시지가 들려왔다.
[띠링! 빛의 나무가 '빛의 정기'의 안식처로 강대한님을 선택하였습니다. 이제 빛의 정기는 강대한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메시지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내 몸 전체가 액체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결코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액체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액체 안은 빛으로 가득했다.
얼마나 강하고 밝은 빛인지 액체 안에 가득 담겨있으면서도 밖으로까지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살을 찌푸려지는 빛이 아니라 편안함을 주는 빛이었다.
여기까지도 놀라운데 액체 안에서 나무가 느껴졌다.
빛의 나무 같기도 하고 빛의 나무의 열매 같기도 했지만 분명 나무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액체자체가 나무 같기도 했다.
내 몸이 마치 빛의 나무를 담는 그릇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래서 정기를 담는 그릇으로 적합한지 살피겠다고 한 것 같았다.
"빛의 정기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내가 잘못 느끼는 건가?"
[그건 강대한님께서 직접 알아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빛의 나무의 정기를 품은 강대한님의 마나홀과 마나통이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마나도 성장하였으니 상태창을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메시지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상태창을 확인해 보았다.
아니 그 전에 기분 좋은 묵직함을 먼저 확인해야 했다.
눈을 뜨고 배에 올라앉은 나호를 바라보았다.
나호가 조금은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마주보았다.
<집사! 집사도 지금 느껴지지? 나도 느껴져. 그런데 여전히 영체 상태야. 집사! 이거 좋은 징조 같지? 아무래도 나 대변혁 전에 실체를 갖게 되는 거 아닐까? 실체를 가지게 되면···.>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마는 나호였다.
순간 멍해지는 나호의 표정에는 많은 감정들이 스쳐지나갔다.
왜 그러냐고 물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물을 수가 없었다.
<하하하! 내가 말이야 집사! 내가 실체를 가지게 되면 집사 확실하게 지켜줄게. 나만 믿어. 하하하!>
급하게 말을 돌리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실체를 가진다는 것이 환상이 아닌 성큼 다가온 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순간 뭔가를 생각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저렇게까지 말을 돌리는 것을 보아 지금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모른 체 넘어가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재잘재잘 말하기를 좋아하는 나호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직은 말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너만 믿고 있을게. 이리와."
자리에서 일어서며 두 팔을 벌렸다.
어차피 배에 앉아 있었던 나호였기 때문에 그대로 안을 수 있었다.
이렇게 안으면 몸을 통과했던 나호였는데 지금은 무게감과 함께 나호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나호가 실체를 가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여전히 영체상태였지만 나에게는 나호가 느껴진 것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감사한 순간이었다.
"사랑해!"
<우에엑! 집사! 뭐야? 왜 갑자기 그런 닭살 돋는 말을 하는 거야? 집사! 우리 그런 말은 서로 하지 말자. 사랑이라니 무슨···.>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품으로 더 파고드는 나호였다.
"너 마나통 자극을 위해 가슴으로 들어올 수는 없겠다. 그랬다가는 나 죽겠어."
<집사는 이럴 때 꼭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해? 은근 감동파괴자야. 이렇게 분위기를 몰라서야···. 집사 걱정이다. 이러다가 이번 생도 전생처럼 모태솔로로···.>
나호가 재잘거릴 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영리하게 움직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