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온 몸이 엉망이었다.
나호가 말하는 녀석들은 새들이었다.
도축한 토끼 왈라비 맛을 본 새들의 눈은 지금 제대로 돌아간 상태였다.
먹성이 놀라울 정도의 새들만 사는 것인지 하루 종일 쫓아다니면서 폭풍 먹방을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한 녀석이 배가 터지도록 먹는 것은 아니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먹어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세 번째 도축을 해줄 때부터 특이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도축을 해둔 것을 먹고는 고마운지 한두 마리가 내게 날아와서 내 주위를 날았다.
당연히 질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새들이 그런 행동을 보이면 몬스터에게든 사람에게든 내 위치가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싫은 내색을 팍팍 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무척이나 조심을 하며 소리를 내지 않은 채 따라 다녔다.
그야말로 눈치껏 조심할 테니 먹을 것을 달라는 태도를 취한 것이었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서 그냥 놔뒀더니 이제는 근처에 누가 있다거나 누군가가 접근을 하면 알려주기까지 했다.
토끼 왈라비가 숨어있는 곳도 귀신처럼 알아채고는 알려주기까지 했다.
내가 쉬고 있을 때는 경계까지 서는 총명함을 보였다.
먹이를 얻어먹기 위해 보이는 행동이지만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 남은 거 도축해줘야지. 도움이 많이 되잖아. 방해하지도 않고. 귀엽기도 하고 말이야. 저기 봐. 저 녀석이 대장인 것 같아."
새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대장은 한 마리였다.
위로 솟은 노랑 머리깃이 유난히 돋보이는 녀석인데 덩치는 새들 중에 작은 편에 속하지만 날렵하고 총명했다.
많은 수의 새를 잘 통솔하는 녀석이기도 했다.
따라다니기 시작하면서는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실체가 있다면 말이야. 저 녀석 친구해도 좋을 것 같아. 왠지 말이 잘 통하게 생겼잖아.>
"나도 마음에 들기는 해. 그래도 데리고 갈 방법이 없잖아."
<그렇긴 하지. 이곳도 던전과 비슷한 곳이라면 더더욱 데리고 갈 수 없겠지. 지금 새를 키울 때도 아니고 말이야.>
대장 새를 데리고 가면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데리고 갈 방법이 없을뿐더러 저 새에게도 이곳을 나가는 것은 고생길이 열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움직이는 내내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드디어 거래창을 개방했다
전생에는 거래창하면 사람과 사람간의 상거래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사실 시스템과의 부산물 거래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거래창을 통해 거래를 하면 사기를 당할 염려가 없어서 대변혁 이후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거래창을 개방했다.
이것은 일반인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면에서는 일반인이 거래창의 필요성을 더 절실하게 느꼈다.
거래창을 통한 거래는 각성자와의 거래라도 손해를 볼 일이 없었고 안전이 확보되기 때문이었다.
대변혁 이후에는 모든 거래가 마나와 금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누구나 거래창을 개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전생에 나도 몬나통을 획득한 날 거래창을 개방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첫 소환에서 거래창을 개방했다.
물론 시스템과의 거래창이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인간과의 거래창을 개방해도 뭔가 보상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냉큼 50마나를 지불하고 인간과의 거래창을 개방했다.
두근! 두근!
거래창을 개방하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보상에 온 신경이 곤두서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때 기다리던 알림음이 기분 좋게 울렸다.
[띠링! 인류 최초로 '거래창을 오픈한 각성자'가 되셨습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히든 거래창'을 개방했습니다. 강대한님께서는 지금부터 거래창을 통해 거래하실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두둥!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재빨리 상태창에서 거래창을 확인했다.
[거래창]
·인간-일반-개방됨
-히든-개방됨
·시스템-부산물 거래-개방됨
거래창이 이렇게 변해 있었다.
히든 거래창이라고?
전생에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 얻었다.
히든 거래창!
이것은 전생에 추측만 무성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떡 하니 나타나 있었다.
그것도 보상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사실 인간과의 거래창을 개방하면,
[거래창]
·인간-미개방
·시스템-부산물 거래-개방됨
이 상태에서 전생에 그랬듯이 '인간-개방됨'으로만 바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인간과의 거래가 일반 거래와 히든 거래로 나뉘었다.
전생에 거래창을 개방하면 거래창을 통해 거의 모든 것이 거래가 가능했지만 거래가 금지된 것들이 있었다.
일각에서는 강자들은 거래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증명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저 히든 거래창을 통해 거래가 가능한 것 같았다.
모른 척하고 히든 거래창을 통해서는 어떤 것을 거래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인간과의 모든 거래가 가능해집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정보가 있습니다. 정보는 일반 거래창에서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가치를 매기는데 수고가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히든 거래창에서는 소정의 마나를 받고 정보의 가치를 평가한 후 원활한 거래를 돕습니다.]
"······."
[정보 이외에도 몇 가지 금지 품목을 제외한 모든 것의 거래가 가능합니다.]
전생에 정보거래는 거래창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로 합의에 의해 가격을 매기고 마나를 주고받았다.
약간은 주먹구구식의 거래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거래창에서 가격을 매겨주면 억울한 일이 없이 거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히든 거래창에서도 금지 품목이 있는 거야?"
[인간의 욕망은 생각보다 거대합니다. 그래서 생겨난 금지 품목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상대의 목숨 자체는 거래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목숨 자체는 되지 않지만 살해 의뢰는 히든 거래창을 통해 거래가 된다는 말이잖아?"
[정확합니다.]
인간을 배려해주는 것 같지만 섬뜩하기 그지없는 것이기도 했다.
"상대도 히든 거래창까지 개방을 하지 않아도 거래가 가능한 거지?"
[그렇습니다. 매겨진 가치를 상대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습니다.]
전생에도 어느 한 쪽만 거래창이 개방되어 있어도 거래에는 문제가 없었다.
물론 아직 거래창을 개방하지 않은 쪽이 사용료라는 명목으로 조금 더 비용을 지불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노란 머리깃을 가진 대장 새가 앞으로 포르르 날아와 앉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면서 주위를 끌더니 아직 도축하지 않은 채 내버려둔 토끼 왈라비 위로 가서 앉았다.
<어쭈? 이제는 아예 도축해 내라고 하네. 저놈 하는 짓이 너무 영악하지 않아?>
"어차피 해줄 생각이었어. 너무 오래 끌기는 했지."
도축하지 않고 두었던 십여 마리의 토끼 왈라비를 도축해주자 대장 새가 쪼로롱 하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 소리가 신호가 됐는지 숲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새들이 일시에 날아오더니 대장 새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대장 새는 능숙하게 새들을 적당하게 분산시켰다.
거기까지 지켜보다 자리를 이동했다.
그러자 대장 새가 포르르 내 뒤를 따랐다.
이렇게 따라다니면서 먹이를 얻어먹는 것이었다.
그 사이 해가 떠올랐고 24시간이 지나면서 숲에 다른 생명체가 추가되었다.
이번에 추가된 생명체는 쥐였다.
물론 일반적인 쥐는 아니고 몬스터화 된 쥐였는데 물렸을 때 고열을 동반한 질병을 유발하는 쥐였다.
던전에서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쥐로 '던전쥐'라고도 불렸던 쥐였다.
일반적인 쥐에 비해 보통 두 배에서 다섯 배까지 큰 것이 주류를 이루지만 개중에는 매우 작은 녀석도 있었다.
큰 쥐는 문제가 되지 않는데 작은 쥐가 오히려 문제였다.
작아서 옷 속으로 들어와서 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었다.
던전쥐는 등장에서부터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부산스런 움직임과 찍찍하는 특유의 소리 때문이었다.
던전쥐는 던전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먹거리가 되어주기도 하는 고마운 녀석들이기도 했다.
던전쥐를 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던전쥐가 보이자 스무 마리 정도를 산 채로 잡아서 자루에 담았다.
그리고 그것을 든 채 미우라 놈이 기거하고 있는 절벽으로 향했다.
놈이 기거하고 있던 곳은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어제 우리가 돌아가고 난 후 뒤쫓아 오던 놈들에게 제대로 당한 모양이었다.
토굴 안에는 미우라 놈이 쓰러진 채 잠이 들어있었다.
온 몸이 엉망이었다.
오늘 안으로 일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놈은 포기 하지 않을 것이다.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을 가진 놈이니 분명 늦게라도 일어나서 움직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놈이 더 이상 활동하도록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자루에 담아온 던전쥐를 놈의 토굴 안에 풀었다.
던전쥐는 상처가 난 사람을 더 좋아했다.
상처가 있으면 살점은 물론이고 피까지 빨아먹기 편하기 때문이었다.
던전쥐를 풀어놓고 놈의 토굴에서 3미터도 벗어나기 전에 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스무 마리의 던전쥐는 충분히 놈을 괴롭힐 것이다.
던전쥐에게 물리면 발열은 물론이고 설사와 구토까지 하니 놈은 활동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던전쥐는 한 번 맛을 본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괴롭히기로 유명한 녀석들이었다.
미우라 놈의 피 맛을 본 던전쥐들이니 미우라 놈을 악착 같이 쫓아다니면서 물어뜯을 것이다.
놈이 우리 민족에게 그랬듯 지독할 정도로 집요하게 놈을 괴롭힐 것이다.
<집사. 속이 다 시원하다. 직접 때려줄 수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아.>
미우라 놈이 사는 토굴 안에 던전쥐를 몰아넣은 직후부터 한껏 기분이 상승한 나호는 발걸음마저 가벼워보였다.
이제 이 숲에서는 토끼 왈라비와 던전쥐를 잡을 수 있었다.
잠깐잠깐 쉬면서 사냥을 계속했다.
두 종류의 몬스터가 있으니 사냥할 맛이 났다.
새들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채워지지 않는지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니면서 먹거리를 얻어먹었다.
양껏 얻어먹고는 만족스러울 때는 듣기 좋은 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만족감을 표현하는 것 같은데 소리만 들어도 새들이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곳이 각성자를 가리는 시험의 장이 아니라면 여유롭게 새들과 시간을 보내도 좋았겠지만 이곳은 각정자를 가리는 운명의 장소였다.
그래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움직였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사람이 의지만으로 몸을 컨트롤하는 데는 분명 한계라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그 범위를 한참 벗어난 것 같은데도 몸을 움직이는데 무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빛의 나무의 정기'을 흡수한 후부터 몸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아."
<조금이 아니라 많이. 활력이 넘치는 것 같아.>
"빛의 나무의 정기라고 했으니 뭔가 특별한 것이 있겠지 했는데 피곤도 풀어주는 것 같아. 그리고 왠지 이게 끝이 아닐 것 같아."
치유력이 좋아진 것은 빛나정을 흡수할 때 바로 확인을 한 것이었다.
몸이 가볍고 피로가 잘 쌓이지 않는 체질로 변한 것인지 아니면 빛나정이 피로물질을 제거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냥을 하다 높은 나무에 올라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대장 새가 포르르 날아오더니 낯선 사람들의 접근을 알려왔다.
대장 새는 소리를 달리 내면서 나와 몇 가지 의사소통을 했다.
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했더니 나를 자신들의 협조자쯤으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몇 분이 지나자 대장 새가 가리키는 곳에서 열댓 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모두 날카롭게 만든 나무창을 들고 있었다.
<미우라 놈에게 당한 놈들이네. 저기 봐. 목에 다들 훈장처럼 상처가 있잖아.>
미우라에게 당했었지만 미우라에게 복수를 한 놈들이기도 했다.
물론 모두 복수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사람들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얍삽하게 생긴 놈은 여전히 무리 속에 있었다.
미우라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단단하게도 동료를 묶었던 놈이었는데 여전히 얍삽한 표정을 지은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사냥 나온 것 같네. 집사 어떻게 할 거야?>
'30분 정도는 잘 생각이야. 그래야 또 움직이지. 30분 후에도 근처에 얼쩡거리면 처리를 해야지.'
<알겠어. 집사 어서 자. 30분 지나면 깨워줄게.>
나호는 정확히 30분 후에 깨울 것이다.
대변혁 이후 시간 약속은 대변혁 전보다 중요했다.
시스템이 시간에 철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삶을 20년 넘게 지켜본 나호이니 믿고 굵은 나뭇가지에 누웠다.
자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렇게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30분이 지났다고 했다.
<집사. 일어나. 정확하게 30분이야. 1등 한다며.>
쪼로롱! 쪼로롱!
대장 새도 내 배 위에 앉아서 잠을 깨웠다.
<너도 30분의 개념을 아는 거냐? 어떻게 정확히 30분이 되니 그렇게 우는 거야?>
나호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장 새를 보며 말했다.
"시간 개념을 아는 것이 아니라 어서 일어나서 사냥하라는 거 아닐까?"
<설마 자기들 먹이 조달하라고?>
"그렇지. 저 표정을 봐. 딱 그 표정이잖아."
쪼로로롱! 쪼로롱!
대장 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경쾌한 소리를 냈다.
그때 숲에서 높고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가는 거야.